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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책장 엿보기 1. 아이. 활자에 눈 뜨다.

DidISay 2012. 7. 19. 02:27

'소리 내어 책읽기'에 쓰는 글과는 달리,
이 글들은 특정한 책의 감상이나 줄거리를 말하기 위함이 아닌
말 그대로 책과 연결되어 있는 내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두려고 한다.

 

때문에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하는 책이 아닐 수도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과 엮인 온갖 책이 등장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들은 '소리 내어 책읽기'의 과정이 아니라,
다만 '스쳐가는 생각'을 잡아두려는 시도이다.

 

 

 

"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문명의 초석이다. 문맹은 기형으로 취급된다. 육체적으로 기형인 사람들을 겨냥하던 조롱의 방향이 문맹인 사람들 쪽으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문맹자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살아가려 한다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이 나쁜 사람들의 나라에서 장님이 배척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처럼."        -루스 렌들, '활자 잔혹극' 中

 

 

 


 

위의 말처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인류의 문명의 기초이며, 현대..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문맹인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과거 일제시대 한글말살정책과 공교육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한글을 모르는 노인층은 조금 남아있지만,
노인층을 제외하고는 한국사회에 문맹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단순히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닌, 독해 능력을 계산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일단 글자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1.7%정도 밖에 안되므로, 선진국들보다 분명 뛰어난 수치이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읽고 쓸 줄 앎'을 깨달은 순간은 언제일까?

 

 

 

내가 처음 말하고, 걷고, 배변을 스스로 하고...이런 순간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처음 스스로 '책을 읽게 된 순간'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나에게도 이건 문명의 초석! 까진 아니더라도 꽤 놀라운 경험이었나 보다. 

 

 

 

어릴 적 우리집 한쪽 벽에는 아이가 있는 다른 여느 가정집처럼
알파벳이며 한글이 써 있는 코팅지로 된 커다란 판이 붙어 있었다.

ㄱ은 기린, ㄴ은 나비..이런 식으로 연상하면서 익힐 수 있게 만들어진 학습장.
자음과 모음을 어떤 순서로 적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배우던 과정.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꿀밤을 대기 중인 엄마와 들썩이는 엉덩이를 잠재우며 힘겹게 배운 덕에
어느새 자음과 모음을 모두 익힌 나는 떠듬떠듬 '간판 읽기'를 하곤 했었다.

 

 

 

 

우리집에는 꽤 많은 책이 있었는데,
첫 딸에 대한 조기교육의 열망-_-으로 가득차 있었던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온갖 전집 세트를 구비해 놓으셨다.


덕분에 '식물도감' '곤충도감' '명작동화전집' '위인전세트'
나중에 브리태니커로 업그레이드 된  '동아 백과사전' 등이
내가 읽어주기만을 바라면서 한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 책을 읽어라 하면서 채근하시는 법도 없었고,
나 역시 겨우 '간판'에 머물던 실력으로 절대 '세트'는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냥 방치 상태였는데
어느날 엄마가 외출하시고 티비에서도 영 재밌는 것을 하지 않아
혼자 책장을 뒤적이다가 손에 들어왔던 것이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견우와 직녀'였다.

 

 

 

 대략 요런 패션에, 훨씬 더 동화스럽게 그려진 직녀는 분명 예뻤다!

(저 선녀 머리가 너무 좋아서, 유치원에 저 머리로 갔었는데... -_-;;
 한동안 유치원 여자애들이 죄다 저 머리로 다녔었던;;)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한글자 한글자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예상 보다 더 재밌는 이야기에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고
결국 꽤 시간을 들여 떠듬떠듬이긴 하지만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너무 뿌듯해서!
시장에 다녀오신 엄마에게 또 다시 재현을 했고,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것에 고무받아
퇴근하신 아빠 앞에서도 다시 공연을 하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ㅎ

 

음 아마 상으로 엄마한테는 떡볶이를, 아빠한테는 용돈을 받았던 것 같다 :)

 

 

 

아마 이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완성했다. 완료했다!의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어쩐지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대단한 일. 큰 세계로 한걸음 진입한 느낌.

 

성취감이라는 말로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내가 최초로 느낀 성취감은 '견우와 직녀'의 기억이다.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어렴풋하게나마 간접체험하게 해준 것도,
바로 이 예쁜 동화책이다.

 

 

 

 

올해 칠월칠석은 8월 24일이다.
오늘도 직녀와 견우는 어김 없이 만났다가 곧 헤어지는 안타까운 이별을 하겠지만,
어쩌면 이런 순간의 만남과 긴 이별이 있기에, 애틋한 사랑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사랑이 죄다 땅으로 내려와 축복을 주는 것인지,
이 시기엔 호박이 잘 열리고, 참외가 달다고 한다.


 

 

이번 칠월칠석에는 동그랗고 순한 애호박에 노란 계란물을 씌워 부치고,
즙이 많은 참외로 식탁을 채워야겠다.

 

그리고 직녀견우 커플이 나에게 준 그 최초의 기쁨을,
이날도 열심히 책을 읽는 것으로 보담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