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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호시노 미치오

DidISay 2012. 9. 11. 00:44

 페어뱅크스에 내리는 눈은 언제나 똑같다.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떨어진다.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지상의 모든 것을 흰 베일로 감싸는 불가사의한 힘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 또한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다. 눈처럼 쌓여만 가는 고통스런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희미해진다. 고통은 사라지고 지나간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만 남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흰 눈이 세상을 감싸듯 삶을 정화시켜 나간다. 이런 과정이 인생에서 제외된다면 늙음이란 얼마나 비참한 경험일까.

 

-Northern Lights 中

 

 

 

 

 

한 때 마음이 너무 아파서 견딜수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신호등에 가만히 서있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음악을 듣다 보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통곡을 하고 싶었던.

 

 

차가운 물로 몸을 씻어내어 보아도, 마음에 맺힌 답답함과 분노를 벗겨낼 수가 없었다.

온 몸이 축축한 걸레와 같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날들.

눈물이 날 때면, 온 몸의 구멍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소설에는 오렌지 껍질로 된 몸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만약 나의 몸과 마음도 오렌지 껍질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하나하나의 결을 모두 찢고 벗기고. 돌돌 말아서 태워버린 뒤에.

새로운 껍질을 만들고 싶었던 그런 날들이었다.

 

 

 

이 당시에 고작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옥상에 올라가 한참동안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서, mp3의 모든재생목록이 다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끝도 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겨울 거리를 한밤중에 계속 걷는 것이었다.

 

유독 어둠이 짙은 밤이면 두툼한 코트로 내 몸을 감싸고,

세상의 끝까지 가려는 마음. 혹은 세상에 부는 모든 바람을 다 맞으려는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곤 했었다.

 

이성적으로 설명되진 않지만.

그냥 그래야만 내 안에 가득찬 온갖 무거운 것들이

모두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극지방을 사랑하게 된 것은. 

 

완벽하고 냉혹하게 빛나는.

영하 23도. 알래스카의 겨울에 매혹된 것은.

 

 

 

 

10대 후반의 청년시절에 처음 알래스카로 떠난 이래, 20여 년간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낸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야생사진가.

19세가 된 1973년, 알래스카 쉬스마레프 마을에서 에스키모 일가와 여름 한철을 보냈다.

그 후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야생동물 사진가 다나카 고조 씨의 조수로 2년간 일했다.

1978년 알래스카 대학 야생동물관리학부에 입학했고, 이후 알래스카의 대자연과 야생동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진작업을 시작하여....

1996년 7월 22일 러시아 캄차카 반도 쿠릴 호에서 TBS 텔레비전 프로그램 취재 작업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8일 쿠릴 후반에서 취침중 불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향년 43세.

 

 

호시노 미치오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진 작가 중 한명이다.

위의 약력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에 공통적으로 적혀있는 호시노 미치오의 인생을 보여준다.

 

19세에 처음으로 알래스카를 방문하고, 그 기억을 잊지 못해 삶의 나머지를 모두 알래스카에서 보낸 사람.

명문대학을 나온 뒤에 충분히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는데도, 모두 버리고 사진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작가.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단순히 아름다운 사진 이상의.

알래스카에 대한 애정.. 사라져가는 문화를 지키려는 마음, 원주민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져서

글 한구절 한구절이 감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가 내가 접한 그의 첫 책이었고

그 뒤에 '노던라이츠'와 '여행하는 편지'까지 모두 구해서 읽게 되었다.

 

 

 

그가 처음 알래스카를 방문하게 된 계기가 매우 궁금했는데, 글로 읽고 상상하고 나니 더 재밌어졌다.

나도 같은 주소로 편지를 보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밤이 되자 셰리가 낡은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미치오, 이거 기억나?"

  나는 색바랜 편지봉투릉 열고 놀란 가슴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20년쯤 전에 내가 이 마을에 부친 편지였다.

  ".....저는 일본에 사는 호시노 미치오라는 학생입니다. 책에서 그 마을 사진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곳 생활에 흥미가 많습니다. 방문하고 싶지만, 그 마을에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을 해야 한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으니, 모쪼록 어느 댁에서든 저를 받아주실 수 있을런지요.....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색바랜 편지 속에 나도 다 잊어버리고 있던 먼 옛날의 내가 있었다.

 

 

 

  열여럽 살 시절이었다. 북방의 자연을 동경하고 있었다. 시베리아든 알래스카든 훗카이도든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가 품은 꿈처럼 설명하기 힘든 막연한 동경이었다. 어느 날, 헌책방들이 늘어선 도쿄 간다거리의 서양원서 전문서점에서 발견한 알래스카 사진집. 나는 그 책을 다음 페이지에 어떤 사진이 있는지 훤히 기억할 수 있을정도로 보고 또 봤다. 알래스카에 관한 정보가 없었던 그 시절, 이 책이 나의 꿈과 현실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 책에 작은 에스키모 마을을 공중촬영한 사진이 있었다. 석양이 베링 해로 떨어지려고 하는, 역광이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나는 그 사진이 보여주는 신비한 광선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황량한 곳에 인간의 생활이 있을까 하며, 사진의 배경에 점점 마음을 빼았겼다.

  이 마을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사진 캡션에 "Shishimaref" 라고 씌어있었다, 지도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다. 그러나 찾아가려고 해도 방법을 알 수 없었고, 편지를 쓰려고 해도 주소를 알 수 없었다. 사전에서 'mayor' 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읍장'....아마 이장과 비슷한 뜻 같은데, 이것으로 하자.

 

 

Mayor

Shishmaref

Alaska U.S.A.

 

 

  그리고 아무 답장도 받지 못한 채로 반년이 지났고, 나는 곧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우편함에 국제우편 봉투가 들어 있었다.

 

 

Clifford Weyiouanna

Shishmaref

Alaska

 

 

  머나먼 알래스카가 바로 저기서 나의 꿈을 받아준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지낸 1971년의 여름.

  이 여행은 나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땅끝인 줄로만 알았던 것에도 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 사람의 생활과 살아가는 모습의 다양함에 매혹되어 갔다. 어떤 민족이라도, 아무리 다른 환경에서 살아도, 인간은 한 가지 공통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꼭 한 번만 산다는 것이다. 세계는 그런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쉬스마레프 마을에서 보낸 여름 한철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었다.

 

-바람 같은 이야기 中

 

 

 

이 책에 나와있는 호시노 미치오의 글을 읽다 보면, 새하얀 알래스카의 모습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삶에 어딘지 정감이 가게 된다.

 

아름답고 잔혹하고, 강하지만 동시에 약한

그런 이중적인 모습의 자연.

 

자연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다 보면,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고, 북극의 들판을 여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으며 평온해졌다. 

 

그리고 어느덧 눈 한가운데 모닥불을 켜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알래스카의 인디언이 되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내 힘든 시간들을 속깊은 친구처럼 위로해주었던.

그 모든 순간들에 감사한다.

 

 

다음은 '여행하는 나무'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들.

 

  "이렇게 많은 별을 매일 밤 도쿄에서 볼 수 있다면 아주 대단할 거야. 밤늦게 일하느라 지친 몸으로 회사에서 나왔을 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야. 그때 별들이 가득 찬 광경을 보면 얼마나 멋질까. 아,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끝났구나. 오늘도 나름대로 보람찼구나. 아무리 나쁜 녀석이라도 이런 생각이 들텐데."

  "어떤 사람이 나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 이렇게 별이 총총한 하늘이나 눈물나게 아름다운 석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야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아니면 그림을 그려주거나. 그게 안되면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지."

  "근데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아름다운 석양처럼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래.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거야."

  사람의 일생동안 자연은 여러가지 메시지를 보낸다.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사라져가는 노인에게도 자연은 제각기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마련이다.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는 단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과에 상관없이 지나온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진정 의미를 갖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일 것이다.

  볼을 스치는 북극 바람의 감촉, 여름철 툰드라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 백야의 엷은 빛, 못보고 지나칠 뻔한 작은 물망초.....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에 마음을 조금 얹어서 오감의 기억 속에 남겨놓고 싶다. 아무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싶다. 경황없는 세상의 삶과 평행을 이루며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디에선가 항상 느끼면서 살고 싶다. 그 소중한 시간들을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그렇게 조금씩 알래스카에 동화되어가면서 마침내 그는 가장 순수한 자신의 내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가 사진 속에 알래스카를 담는 동안. 알래스카는 그에게 자기자신을 담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는 알래스카를 통해 자기자신과 만나는 과정을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호시노의 여행은 단순한 알래스카 탐험이 아닌, 생명에 대한 외경이었으며, 인류가 잊고 살아왔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었다.

 

-옮긴이의 말 中

 

 

 

덧)

 

 

1. 인터넷 상에서 그의 유작이라고 알려진 곰 사진은, 그의 작품이 아니다.

 

호시노 미치오가 불곰에게 물려서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큐멘터리 촬영 때 음식을 준비하느라,

냄새가 배어있던 그를 불곰이 착각하는 바람에 텐트에서 자던 도중에 급습을 당한 것이다.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팬들이, 그의 일생을 신화처럼 만들려는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사실이 아닌 건 아닌거니까.

 

 

 

 

2. 인천시민이라면,  알래스카 주립대학교에 아주 저렴하게 입학할 수 있다.

인천과 앵커리지시가 자매결연 도시기 때문에. :)

 

 

 

 

3. 호시노 미치오는 발음 상, 별의 길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데

두근거리면서 찾아보니 한문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

 

하지만 참 잘 어울린다 싶어서, 잠시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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