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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완구점 여인-오정희

DidISay 2012. 9. 17. 09:31

 

 

 

 

오정희님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항상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냉탕의 청량감을 느낀 후,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몸을 풀어나가는 온천의 포근함이라기 보다는

드라이아이스에 화상을 입는 것 같은.. 가스렌지의 파랗게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볼 때의.. 그런 위험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 사진을 봤을 때. 너무 단아하고 얌전한 이미지셔서 깜짝 놀랐었다.

 

 

 

이런 음울한 느낌은 그녀의 장편들 보다는 단편소설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학생들이 주로 배우는 '중국인거리' 나 '동경'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품은 '완구점 여인'이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쏘아보는 앙칼진. 작은 여자아이

끝도 없이 아이를 낳는 공장 같은 임산부의 이미지

어딘지 마법적인 휠체어 탄 완구점 여인이 떠오르는 작품인데

환상문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어딘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인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이 책의 초반부는 처음 읽었을 때 그려지는 분위기가 너무 강렬해서

그 장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한참동안이나 그 언저리를 맴돌면서 거듭해서 읽었었다.

저녁무렵의 교실을 볼 때면 지금도 이 장면을 상상해보게 되는..

 

 

 

 

 

 


 

 

 

 

완구점 여인 (1968)

 

 

 

  태양이 마지막 자기의 빛을 거둬들이는 시각이었다. 어둠은 소리 없이 밀려와 창가를 적시고 있었다. 어둠이 빛을 싸안고 안개처럼 자욱이 내려덮일 때의 교실은 무덤 속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낡은 커튼으로 배어든 약한 빛 속에서 머무르던 갖가지 숨결과 대화는 어둠이 깃들이는 것과 동시에 죽어버리는 것이다. 소리를 지르면 그대로 터엉 울려올 듯 공허해지는 것이다. 가로와 세로로 각각 여덟 개씩의 책상들,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죽음처럼 사라져가는 어두운 교실 안에서 그것들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놓은 그들의 질서가 두려워진다. 정확하게 열려진 두 개씩의 서랍들은 시커멓게 입을 벌려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노려보면서 언제나처럼 진기한 보물이 가득 들어찬 동굴 속을 보는듯한 기대와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이곳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예순넷의 책상들이 모두 나의 차지라는 사실이 가슴을 떨리게 한다. 이제 시작할까. 나는 소리를 내서 말해 본다. 아무런 대꾸도 있을 리 없다. 다만 내가 뱉아놓은 여섯 개의 음절이 어둠 속에 먹혀감을 느꼈을 뿐이다. 창가에 놓인 책상 서랍부터 휘젓기 시작했다. 방석이 집히는 곳도, 필통이 집히는 곳도 있다. 필통을 열어 안의 것을 가방에 넣었다. 덧신이 집히는 곳도 있다. 신고 있던 덧신을 멀리 던지고 서랍 속의 덧신을 신었다. 조금 작은 듯했다.  뒤축을 꺾었다. 아직 새 것인 듯 빳빳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코를 풀어 버린 휴지만 가득한 곳도 있다. 도시락이 만져진다. 뚜껑을 열었다. 먹다 남긴 부분이 톱날처럼 선명하게 뵌다. 비릿한 냄새와 달짝지근한 맛이 구토를 일으킬 듯했다. 밥도 더럽게 먹었군, 중얼거려본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몇 개의 동굴을 거쳐오듯 공허한 나의 목소리는 전혀 타인의 음성으로 들렸다. 나는 갑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버린 어두운 교실에서 눈뜨는 나의 세계와 저녁마다의 이러한 작업으로 나는 오뚝이를 사 모은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 장난감 가게의 두 다리를 못 쓰는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유리창이 덜컹거렸다.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손에 집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지루해졌다. 허나 아직도 다섯줄이나 남아 있는 책상들을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다음 책상으로 손을 넣으려다 나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복도로 슬리퍼 끄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너 명은 될 것이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들은 항상 떠들며 지나갔다. 한 번도 내가 있는 교실문을 열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견딜 수 없이 심장이 뛰었고, 갑자기 그들이 문을 열어젖히며 내 이름을 부를 것 같은, 또한 그들은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고 그맘때만 소리를 내며 지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문득 나는 어둠 속에서 살피고 있는 날카로운 두 눈을 느꼈다. 누가 있니? 오히려 대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말했다. 이런 따위의 공포는 견딜 수 없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다시 서랍들을 뒤졌다. 문득 긴장을 느꼈다. 매끄럽고 납작하게 만져지는 것은 분명 지갑일 것이다. 나의 손은 서랍 속에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분명히 지갑이라고 생각한 경우에도 안경집이었거나 전차표 두어 장 정도 들어 있는 비닐지갑이어서 실망한 때도 여러 번이었던 것이다. 다시 그것을 더듬어 안경집도 아니고 빈 비닐지갑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야 꺼냈다. 자크를 열자 동전이 우르르 쏟아졌다. 동전이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듯 생각되었다. 다시 다른 책상으로 옮겼다. 이마에는 진득한 땀이 만져졌다.
  서랍 속에서 나의 손은 거의 기대도 없이 허둥거리고 있었다. 아까의 지갑에 이미 만족해 버려 그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교실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잉크병과 그 밖의 잡다한 물건들로 채워진 가방이 한결 묵직했다.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검게 번들거리는 거울면에 나의 몸이 비쳐있고 그 뒤로 가직하게 교실 전체가 담겨 있었다. 내 손이 한 번씩 거쳐 간 책상들은 완전히 먼저의 질서를 잃고 있었다. 나는 꽤 오래 거울 속의 교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창문이 몹시 덜컹거렸다. 거울 앞을 떠나 복도로 나왔다.
  인조 대리석의 복도는 구석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번들거렸다. 하늘이 새까맣다. 불빛에 검게 아른거리는 복도는 먼지 한 알 없이 청결해 보여서 위축감을 느꼈다. 무거운 가방을 멀찌감치 동댕이치고 그 위에서 뒹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뻣뻣한 스커트를 허리께까지 훌쩍 걷어 올리고 그대로 선 채로 오줌을 누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침을 뱉었다. 입 안에서는 끈적한 타액이 자꾸 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자꾸 뱉어냈다. 타액이 인조 대리석에 달라붙는 소리가 묘하게도 일정하다. 가득한 침이 마르자 입에서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며칠이고 양치질을 안 한 채 낮잠을 자고 난 여름날 문득 느끼는 냄새였다. 이어서 귀에서도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목줄을 타고 올라가서 지잉지잉 울리고 나는 자꾸 오른쪽 귀가 비대해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확대된 귀에 유리창이 덜컹거리는 소리는, 콘크리트 교사 전체가 술렁술렁 흔들리고 마침내는 우릉우릉 울부짖고 있는 듯 들렸다. 나는 한 손으로 오른쪽 귀를 감싸쥐고 입을 벌려 숨을 내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숨이 가빠왔다. 허나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날 듯해서 입 안의 냄새는 도저히 들여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는 비에 젖어 흐득흐득 흐느끼고 있었다. 불빛이 환한 완구점 진열장에는 빨간 플라스틱 오뚝이들이 밖을 향해 서 있었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은 여인은 말끔히 씻긴 듯한 표정으로 빗물이 뿌려지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맑은 날, 그녀의 모습은 괴괴한 느낌을 주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청결감마저 풍기고 있었다. 갖가지 장난감들이 빈틈없이 채워진 가게 안에서 여인은 한 개의 커다란 인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인은 언제부터인가 입기 시작한 앞이 막힌 잿빛 스웨터를 입었고 그녀의 아주 빈약한 가슴이 나타나는 부분에는 모슬렘 여인이 새겨진 펜던트를 정물처럼 붙이고 있었다.
  내가 가방으로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여인은, 무얼 찾으세요, 라고 물을 것이다. 내가 이곳을 찾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어김없이 빨간 플라스틱 오뚝이를 사 갔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그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와 여자가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여인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물러났다. 나는 그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심한 질투를 느꼈다. 여인이 빙긋이 웃었다. 그럴 때의 그녀는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에서 이십 년쯤 거리고 갑자기 마흔 살이 되어 버린 듯한 얼굴이 된다. 여인이 갖는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는 나에게 이미 친숙한 것이었고 말할 수 없이 그리운 것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몸이 부딪혀 왔다. 그들은 완구점 진열장 유리에 매달려 안을 들여다 보는 나를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완구점 앞을 떠났다. 전류처럼 온몸을 돌고 있는 질투나, 다시 스멀스멀 열려오는 관능에의 혐오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로소 목덜미에 와 닿는 빗방울을 의식했다. 조그만 사내애가 우산을 사라고 외친다. 노란색을 골라 들었다. 비를 흠뻑 먹어 모포자락처럼 톡톡해진 스커트가 종아리를 스칠 적마다 닿는 부분이 쓰라렸다. 건너편의 약방을 발견하자 종아리가 참을 수 없이 아팠다. 어디에건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고 싶다. 약방으로 들어가서 반창고를 샀다. 높다란 빌딩 아래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에서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넓적한 반창고를 종아리에 붙였다. 가뿐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무거워진 몸에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싶다. 그래서 몸의 마디마디에 가래처럼 걸찍하게 괸 혐오를 털어 버리고 싶다. 완구점의 여인이 보고 싶다. 내가 찾아갔던 그녀의 방, 자잘한 꽃무늬가 찍힌 커튼과 창백한 불빛과 무엇보다도 야윈 그녀가 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찾아갈 수 없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감각한 그녀의 체온과 뭉텅 잘린 두 다리와 또 나의 행위는 한갓 춘화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나는 아주 우연히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장바구니를 들고 길가 양장점 쇼 윈도를 기웃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걸음이 무척 느렸다. 내가 등 뒤에 바짝 따라 걷고 있어도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곧 어머니와는 거리가 생겼다. 다시 바짝 붙어 섰다. 그래도 어머니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의 넓혀졌다 좁혀졌다하는 거리에 재미를 느꼈다. 길을 건넜다. 그리고 길 맞은편에서 어머니를 따라 걸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때가 가까운 모양이었다. 배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눈 가장자리에 안경을 낀 듯 시커멓게 기미가 덮여 있었다.
  그것은 낯익은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 가정부에서부터 나의 어머니의 위치로 변한 후 끊임없이 아이를 낳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천천히 걷고 있으면서도 가끔 우두커니 서서 쉬다가 다시 걷곤 했다. 어머니가 그녀의 여섯 살짜리 계집아이를 끌고 집을 나간 지 몇 해가 되었을까, 삼 년인지 사 년인지 기억이 아리송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어머니는 아이 낳기를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우뚝 섰다. 어머니의 머리 위에는 아르바이트 홀의 간판이 크게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마침내 치맛자락을 감싸 쥐고 화살표가 그려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급히 길을 건넜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고목을 두어 번 더 꺾고서야 아르바이트 홀이 나타났다. 금방 만화 속에서 뛰어 나온 듯한 차림새의 소년이 입구를 가로막아 서서 학생은 못 들어간다는 걸 모르고 있느냐고 말했다. 급히 찾을 사람이 있어요, 라고 나는 대꾸했다. 그러자 나는 정말 어머니를 찾아내서 꼭 전해야 할말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소년은 난처한 듯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습니다. 그러한 그의 몸짓은 차림새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홀 안은 무척 어두웠다. 아직 시간이 이른지, 넓은 홀 안에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스럽고 간간히 수군거리는 음성들이 들렸다. 차츰 어둠이 눈에 익자 어머니는 이내 찾아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새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대형 선풍기는 시익시익 바람 소리를 그치지 않고 그 바람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짧은 머리칼들이 곤두서고 검은 안경을 쓴 어머니는 곡마단의 한 멤버처럼 보였다. 차츰 사람들이 들어찼다. 선풍기 바람이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한군데로 몰렸다.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꾸물꾸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남자들은 여자들의 자리로 와서 손을 내밀었다. 무대 중앙에서 뚱뚱한 여자가 낮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아직 자리에 남아 있는 다른 여자들처럼 초조해 보였다.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어깨로 가쁘게 숨을 쉬었다. 배가 부른 것이 완연히 눈에 띄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꼈다. 빨간 잠옷을 입고 아침마다 변소에서 한 시간쯤 보내던 여자, 나에게 냉혹하리만큼 무관심을 가장하던 여자와는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가수는 여전히 마이크를 쥐고 흐느끼듯 노래를 계속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흐느적흐느적 돌아갔다. 조명이 붉게 푸르게 자주 바뀌었다.
  나는 꽤 오래 전에 어머니와 어머니의 아이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간다든가, 집에 불을 지른다거나 하는 종류의 꿈을 매일 밤 꾸던 생각을 했다. 나를 항상 공포와 죄의식 속에 몰아넣는 어머니의 은밀한 눈짓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밤마다 나는 어머니를 죽이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마침내 가수가 마이크 앞을 떠나고 한 곡이 끝났다. 춤을 추던 남자와 여자들은 허리를 굽히고 헤어져서 자리로 돌아갔다. 손바닥에 밴 땀을 그대로 선 채 선풍기에 들이대고 말리기도 했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어머니는 춤을 한 번도 못 추어 보고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남자와 함께 홀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어머니의 등에 손을 돌려대고 있었다. 어머니의 빳빳한 나일론치마가 바람에 날렸다. 밴드는 「푸른 다뉴브강」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이내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거북스럽게 부둥켜안고 있는 남자는 잘못 짚었군, 하는 투의 후회를 할 것이다. 아기의 태동이 남자에게 전달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남자는 흠칫 놀랄 것이다. 어서 곡이 끝나기를, 그리하여 이 배가 부르고 검은 안경을 쓴 여자에게서 놓여나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빙글빙글 돌아갈 때마다 훨씬 들려진 나일론치마 밑으로 버선이 장화처럼 드러나 보였다. 나는 뛰어 들어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어머니와 거북스럽게 껴안고 있는 남자와의 사이를 떼어놓고 어머니를 끌고 나와 소리를 지르며 울고 싶었다. 나의 몸속에서 핏줄처럼 돌고 있는, 때로는 나를 버티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하던 어머니를 향한 증오가 끈적끈적하게 풀림을 느꼈다. 몸도 느실느실 맥이 풀렸다. 홀이 파하자 어머니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삐 사라졌다. 나는 완구점을 찾아갔다. 그때까지 불을 환하게 밝히고 거리를 내다보던 여인은 나를 잠자코 맞아 주었다. 밤늦게 찾아온 나를 보고도 조그만 표정의 흔들림도 없는 여인에게 나는 당황해졌다. 날, 아시지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인이 뵐 듯 말 듯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여인의 표정은 나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는 애매한 것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집까지 갈 수가 없다고, 이 곳에서 재워 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여인이 비로소 방긋이 웃었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무얼 좀 먹겠어요? 라고 여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빨리 쉬고 싶을 뿐이었다. 여인이 계집아이를 불러서 가게를 닫으라고 이르고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마치 나를 맞기 위해 텅 빈 거리에 불을 요란스레 밝혀 놓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도와줘요, 여인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여인이 휠체어에서 내리는 것을, 다시 자리에 눕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여인이 시키는 대로 그녀의 곁에 나란히 누었다. 여인이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자기의 손을 나의 목에 돌렸다. 어느 새 여인과 나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팔의 힘을 바짝바짝 조이고 있었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맞대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저 미적지근한 감촉이었다. 여인이 몹시 허덕거렸다. 나의 목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기를 낳은 적도 있어, 돈을 많이 벌어서 충계가 없는 집을 짓고 사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들 틈에서 살아, 스스로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어, 여인은 자꾸 내게 밀착되어 왔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이불이 버석거리는 소리와 내 몸 속에서 물살처럼 화안히 열리는 관능의 움직임을 듣고 있었다.
  여인과 나는 서로의 가슴을 밀착시켜서 파닥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또렷이 느꼈다. 여인은 아주 성숙한 자세로 나의 팔 가득히 안겨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아직 어둡고 새벽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종소리를 혜었다. 열번째 종소리가 들릴 때 일어나리라, 그러나 나는 열번째의 종소리가 들릴 때 일어나는 대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인도 깨어 있을 것이다. 등을 대고 누운 여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도 전혀 없었다. 나는 손바닥 안에서 눈을 감아 버렸다. 종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허물처럼 내던져진 속옷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다.
  날이 훨씬 밝았을 때야 나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나는 심한 수치를 느꼈다. 여인의 얼굴은 말라붙은 눈물자국으로 번들거렸다. 그 후 나는 여인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인이 접하고 있는 모든 것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의 모든 행위가 저주처럼 생생히 요악한 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 완구점의 유리를 통해 여인을 통해 여인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고 때때로 나는 여인의 꿈을 꾸었다. 발가벗은 그녀를 팔 가득히 안고 있는 꿈이었다. 그러나 깨고 난 다음 다시금 고개 드는 관능과 혐오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똑같은 얼굴과 표정을 지난 백 개의 오뚝이가 책상 위에 정돈되어 있다. 손으로 밀어버려도 떼굴떼굴 구르다가는 다시 서버린다. 나는 하나씩 짚어가며 세어본다. 틀림없이 백 개였다. 내가 여인을 찾아갔던 날 이후로 한 개도 더 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쯤도 휠체어에 앉아서 거리를 내다보고 있을 여인을 생각했다. 오뚝이를 하나씩 방바닥에 굴려 본다. 빨간 점들이 방 안 가득 뿌려진다. 백 개의 오뚝이들, 그들은 사랑스러운 나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전혀 소외된 세계에서 나와 더불어 있었다. 하늘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고 태양은 곧 쪼개질 듯 하얗게 빛나고 있던 날, 심한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던 내가 무심코 들여다본 것이 오뚝이가 가득 찬 장난감 가게였다. 그리고 가득 늘어선 오뚝이들 너머로 휠체어에 앉은 여인이 보였다. 인형처럼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 나는 잠시 정신이 혼란해짐을 느꼈었다. 현기증 탓만도 아니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베란다와, 침침한 팔조 다다미방과, 역시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고 있는 사내아이와 벽에 가득한 그림들이 필름처럼 스쳐갔다. 그러나 내가 다시 눈을 비비며 유리문을 밀었을 때 나는 가게 구석에 세워진 두 개의 목발과 여인을 보았고 가득 들어찬 울긋불긋한 장난감들이 여인이 빚어내는 공기 속에서 괴괴하게 살아 있음을 보았다. 여인은 사십도 채 못 닿았을 나이에 얼굴에는 거뭇거뭇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나는 잠시 가게 문턱에 서 있었다. 여인이 무얼 찾느냐고 물었다. 나는 오뚝이를 가리켰다. 특별히 오뚝이를 사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진열대를 가득 채운 오뚝이에 시선이 머문 때문이었다. 여인이 순이야, 순이야, 라고 안에 대고 소리쳤다. 나는 급히 뛰어나온 계집애에게서 빨간 플라스틱 오뚝이를 받아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죽은 동생의 꿈을 꾸었고 그 후 밤마다 완구점에 들려 오뚝이들을 사 모았다. 그것은 마치 춥고 황량한 나의 내부에 한 개씩 한 개씩 차례로 등불을 밝히는 작업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나의 속에서 끊임없이 지어지는 고치를 딱딱하게 감각했다. 그것들은 혹처럼 무겁게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동그란 오뚝이를 손에 쥘 때 오뚝이의 빨간 막과 그 껍질이 부딪히는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다리를 못 쓰는 여인과 갖가지 장난감들이 빚어내는 괴괴한 흔들림 속에서 위축되기 쉬운 나의 감정들은 위안을 받는 것이다. 여인은 나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우리가 세 들어 살고 있던 일본식 집 이층을, 휠체어에서 살아 있던 동생을, 가슴이 두껍고 목소리가 걱실걱실하던 가정부를, 아니 나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햇빛이 별나게도 잘 드는 베란다 말고는 멋없이 크기만 한 다다미방들은 어둡고 침침했다. 냄새가 나는 오시이레와 군데군데 음이 나지 않는 피아노가 유일한 나의 놀이터였고 또 방의 가구였다. 상아를 입힌 건반이 노랗게 찌든 낡은 피아노가 언제부터 우리의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까만 칠이 이미 벗겨져 버린 커다란 피아노는 벽의 돌출된 부분으로 비티고 있을 뿐이었다. 소아마비를 앓아 하루의 대부분을 휠체어에서 보내는 동생은 손이 닿는 높이의 흰 벽에 종일 그림을 그렸다. 이층에서 보이는 전도관 흰 건물의 종각과 머리를 곱슬곱슬 지져붙인 가정부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의 손으로 벽화가 되었다. 더 그릴 것이 없자 동생은 옷을 벗고 자기의 몸 부분부분을 세밀히 그렸다. 동생은 나의 옷도 벗을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벽에는 각각 다른 형태의 남자와 여자가 가장 순수한 상태로 그려졌다. 오래지 않아 벽은 모두 띠를 두른 듯 일정한 높이에 그림으로 가득 차 버렸다. 가정부는 그것을 보고 킬킬거렸다. 투박한 손바닥으로 쓸어 보이기도 했다. 동생은 그녀에게 마구 떼를 썼다. 아줌마도 그릴 테야 아줌마도 벗어. 가정부는 흉물스럽게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날 하루 종일 동생은 아줌마도 그리겠다고 아줌마도 벗으라고 울었다. 그러던 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내가 막 이층 계단을 밟았을 때, 이층에서 기다리던 동생은 그림이 잔뜩 그려진 도화지를 쳐들며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누나야, 누나야, 곧 나는 휠체어의 바퀴를 움켜쥔 채 계단을 굴러 떨어지는 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들었다. 시멘트 바닥에 던져진 동생의 머리는 피투성이였고 얼굴은 송장처럼 부풀어 올랐다.
  부서진 휠체어 조각이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에 움켜쥔 도화지를 빼냈다. 한 귀퉁이가 찢어졌다. 숨이 꺽꺽 막혔다. 사람들이 달려와 동생을 안고 갈 때까지도 나는 부서진 휠체어를 보듬으며 도화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붉은 크레용으로 꽃이 그려져 있었다. 맨드라미인 듯도 했다. 동생이 꽃을 그린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층에서는 꽃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뒷면에는 벌거벗은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나에게는 그 여자가 가정부라고 생각되었다. 조금도 닮아 있진 않았으나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지져붙이고 또 엄청나게 커다란 젖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리 식구 중에 그녀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가정부와 나만의 단조로운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항상 동생이 그린, 벽에 가득한 그림들에서는 낮달처럼 창백한 그애의 환상이 넘실거렸고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동생이 죽자 언제나 우리와는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나와 함께 이층 셋집에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는 머물러 있는 동안 언제나 다정했다.
  저녁마다 배들이 늘비한 부두로 데리고 나갔고, 바다낚시에 한몫 끼워주었다. 때문에 언제나 저녁 찬은 석유내 나는 망둥이 조림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은 변해 있었다. 가정부가 아버지의 방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지며 나오고 학교 갈 시간이 되어도 그녀는 머리를 빗겨 주지도 밥을 주지도 않았다.
  나는 머리를 까치둥지처럼 헝클인 채 눈물을 좍좍 쏟으며 학교에 갔다. 죽은 동생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그날 밤 우리가 살던 이층을 떠났다.
  그러나 사태는 소리없이 변해 가고 있었다. 아버진 더욱 빈번히 집에 돌아왔고 그 때마다 가정부는 잠자리를 아버지 방으로 옮겼다. 그녀는 서서히 나의 어머니의 위치로 변해 갔다. 그녀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쉴 새 없이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조로운 집 안 공기를 흔들어 놓았다. 집안 어디서나 걱실걱실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고 아이들은 돌이 지나 아우를 볼 때쯤이면 설사를 하다 죽곤 했다. 무턱대고 나에게 잘 해주기만 하던, 그래서 촌스런 모양으로 자모회에도 참석하던 그녀는 점차 냉혹해져갔다. 연필과 공책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녀는 내가 군것질이나 하고 다니는 것 같은 얼굴로 질책을 했다. 나는 때때로 동무들의 연필이나 크레용을 몰래 집어왔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앉기를 싫어했고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내 가방을 거꾸로 들고 샅샅이 털어보곤 했다. 나는 분필토막을 주머니에 넣고 변소에 들어가, 선생님 나쁜년, 엄마 나쁜년, 이라고 오래오래 낙서를 했다.
  나는 자꾸 딱딱한 껍질 속으로 위축되어 갔고, 그럴수록 어머니에 대한 증오는 맹렬히 커져갔다. 죽은 동생은 더욱 생생히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어머니는 동생이 그린 그림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내가 동생을 느낄 수 있는, 끝없는 애정으로 대하던 그림들이 하나씩 지워질 때 나는 물걸레를 손에 든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어머니는 나를 밀치며 무관심하게 대꾸했다. 그 애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그날 네가 학교에서 조금만 일찍 왔거나 늦게 왔어도 잘 놀던 애가 죽었겠니? 어머니와 나와는 무섭게 냉담해져 갔다. 그러나 내 속에 자리 잡은 끈질긴 증오와 대결의식과 피해의식은 온 신경을 팽팽히 긴장시키고, 그녀에게 향하는   증오는 생활의 유일한 원동력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여인에게 편지를 썼다. 어제도 나는 당신의 꿈을 꾸었습니다. 매일 밤 나는 발가벗은 당신의 꿈을 꿉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언젠가 당신을 찾아갔던 날, 기억하시는지요? 그렇다면 잊어주십시오. 잊어주십시오. 그래서 다시금 당신의 세계에 나를 맞아 주십시오. 소리를 내서 읽어 보았다. 다소 연극적이었으나 감동을 느꼈다.

  완구점은 며칠째 내부 수리 중이라는 쪽지를 달고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거의 미칠 듯한 기분이었다. 여인을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매일 밤 유리문밖에서 여인을 들여다보던 일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여인에게 쓴 편지는 손때가 까맣게 올랐고 접은 자리는 헤실헤실 보풀이 일고 있었다.

  완구점이 있던 자리에 다방이 생겼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축제처럼 흥청거렸다. 나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화환들이 늘어선 문을 지나면 다시 불빛이 환한 완구점이 나타나고 가득한 장난감들과 여인이 나를 맞아 줄 듯했다. 그대를 사랑해, 그대를 사랑해, 스피커는 요란스럽게 울부짖었다. 다방 안을 둘러보았다. 완구점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불고 푸른 색등이 실내를 밝히고 있고, 열대어들이 끊임없이 물방울을 만드는 커다란 어항이 있고, 사랑을 하는 남자와 여자가 자리를 채우고 있어도 나는 항상 여인이 있던 자리를, 목발이 있던 자리를, 저마다 살아 있던 장난감들이 놓였던 자리를 또렷이 알 수 있었다. 다방을 나왔다. 스피커는 여전히 지잉지잉 울고 있다. 그대를 사랑해, 그대를 사랑해, 나는 여인을 생각했다.
  지금쯤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며 자기의 세계를 찾고 있을 여인과 그 뒤를 따라서 매끈한 장난감 자동차들은 달리고, 오뚝이들은 대굴대굴 구르며 인형들은 두 다리로 꼿꼿이 따라 걷고 있으리라. 그들은 나에게서 손이 닿지 않는 이방으로 멀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끝없이 고독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딱딱한 껍질 속에서 죽은 동생의 환상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단 첨가된 춘화와도 같은 여인과의 정사를 안고 달팽이처럼 한껏 움츠리며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오뚝이들을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 역시 나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다. 다리가 맥없이 후들거렸다.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가슴 금방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부서져버릴 듯 건조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