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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클럽-배수아

DidISay 2012. 9. 7. 01:14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2000년대 초반, 나는 아직 어린 학생이었고

그때는 이 문장들이 너무 과격하고 건조하며 어렵게 다가왔었다.

 

당시 내가 이 소설에서 좋았던 것은

화가 노석미님의 그림이 글과 기가막히게 들어맞는다는 것. 정도였다.

 

 

 

 

 

이 소설이 다시 떠올랐던 것은 

A의 끝난 연애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듣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A의 연애는 그녀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 세계관 모든 것을 고쳐야 했으며

때문에 그 연애기간 내내 자아는 흔들리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시험받아야 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잊어갈 지경이었고,

그래서 우울했으며 또한 무기력해지곤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아무리 만류를 해도, 이상하리만치 A는 그 관계에 빠져들어갔다.

그 이유는 그 고통스럽고 잔혹한 과정이 오히려 자신의 강렬한 사랑을 시험하는 장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희생한 것들로 인해 더더욱 연애를 놓을 수 없었고

또한 스스로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는 그 관계에 어느순간 중독되었다고 말했다.

 

마치 자신의 전생애에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감정을,

이번 관계에서 모두 활활 태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관계가 끝났을 때 그녀는 한동안 어떤 종류의 관계도 시작할 수 없을만큼

몸과 마음이 모두 아무 감각이 없는 폐허의 상태.허물어진 도시처럼 변해버렸고,

마치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녀는,

다시는 자신을 죽이는 관계를 맺지 않겠노라고.

차라리 조금은 무덤덤한 안전한 관계를 맺겠노라고 다짐하며

아랫입술 한쪽을 피가 날정도로 꽉 물며 나를 바라봤다.

 

 

 

 

 

작가의 말 

 

 

THIS LOVE

 

 

 

  처음에 이 글을 의뢰받았을 때부터 이것의 제목은 ’붉은 손 클럽’ 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 앞에 앉기 전부터 나는 이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소설이 아니다라는, 그런 뜻은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허구이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애용이었기에 이것을 쓰는 것은 전혀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는 것을 단지 말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붉은 손 클럽'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연애소설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런 연애는 아주 흔할 것이다. 누구나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랑'의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작가로서 나는 독특함이라는 표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단지 독특함' 말이다. 독특하다는 그것은 작가가 마치 일기나 편지 같은 사적인 문서를 쓸 때처럼 그런 식으로 소설도 쓴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다수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고 도덕적으로도 옹호받을 수 있는 그런 글을 한번쯤은 쓰고 싶었다. 연애소설이란 그런 면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결코 연애를 즐기는 타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썼다. 연애에 관한 화제, 연애에 관한 노래, 연애에 관한 소설, 이런 것들을 나는 항상 재미없다고 느껴왔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대 평가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가 연애일 것이다. 그런 내가 연애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역시 써버렸다.

  내가 생각한 의도가 실패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실패한 연애소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읽는 누구도 한나를 사랑할 수 없고 연민을 가질 수는 더더욱 없다. 모든 것은 한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붉은 손 클럽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 요리 잡지도 마찬가지며 이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술사는 없다. 육체의 순결을 맹세하고 살해당하는 것마저 감수한다고 해도, 그래도 역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이것을 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극도의 고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단지 언어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두 손을 끓는 기름 속에 담그는 정말, 고통 말이다. 앞으로 남은 모든 인생의 성관계 제의에 'No' 라고 말하리라는 맹세의 고통 말이다.

  그토록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그리고 명분도 쾌락도 없고 섹스고 없고 표정도 없고 존재도 없는 연애가 갖는 역겨움 말이다. 그 역겨움이 꿀보다 달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공포의 가면에 입맞추게 된다. 입술이 갈가리 찢기는 피의 입맞춤이라도 결코 멈추고 싶지 않다. 아무리 치명적인 핸디캡이라도 결국은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즉, 나는 스스로, 불행해진다. 그것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 더 강하다.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더 몸이 떨린다. 이 세상 천지에 유혹도 없다. 그런 사랑이다. 읽고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것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느꼈던 그로테스크함.

하루키의 1Q84의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어딘가 균열의 틈이 있는 듯한 세상.

 

그리고 짓무르고 아물기를 수십번 반복해 피부의 흔적이 사라진 화상자국 같은.

뿌연 붉은 색의 안개였다.

 

자신의 평온함 혹은 불감을 깨고 처음 고통을 주었기에, 애착을 갖게 된 관계.

그리고 스스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관계맺기.

혹은 다른 선택들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무열과 한나의 서로 다른 선택과

동일한 상황에서 보이는 다른 생각과 반응들이 흥미로웠다.
(인물별로 분석해서 해석을 길게 썼다가,

 다 지워지는 바람에 의욕상실+ 스포일러 방지 겸 그냥 날렸다;;) 

 

읽는 이마다 모두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설이고,

작가 또한 어떤 의미를 달아놓지 않았기에,

당신은 나와 전혀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1장.

 

어딘가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과 '붉은 손 클럽'의 이반이 존재하는 도시가

어둠 속의 불을 밝히며 서있을 것 같은..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

 

 

미안해요. 난 불감증이에요." 

  나는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흰 된장을 연하게 탄 라면이었다. 여기에 살짝 볶은 양파와 고추를 넣은 라면만을 좋아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치즈는 불에서 내리기 직전에 넣으면 된다.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미안해요. 난 불감증이에요." 

  새벽 세 시 반이었다. 수요일 새벽 이 시간에 라면을 끓이는 사람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남자들이 원피스를 걷어보라고 할 때나 라면을 끓이라고 시키고는 뒤에서 갑자기 안을 때는 오랫동안 나는 이렇게 말해 왔다. 그런 남자들은 대부분 위선자 아니면 바보였다. 둘 다인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거의 모든 경우 실례했던 것을 사과하고 얌전하게 라면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한 달이나 두 달쯤 후 다시 전화해서는 일 얘기나 날씨나 정치 얘기만을 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침에 신문이 배달되어 오면 나는 운세란을 밑줄을 그어 가며 읽고 난 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텔레비전은 Q채널과 KMTV의 몇 개 프로그램과 요리 코너만을 본다. 책이라고는 격월간의 아방가르드 요리라는 잡지를 구독하고 있을 뿐이다. 드물게 돈이 생기면 국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를 들으러 간다. 물론 어떤 친구도 같이 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 갈 수밖에 없다. 그런 내가 가끔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한참 있다가 커피를 한잔 더 권하곤 했다. 

  "우리들은 그런 데 관심이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지? 어떤 머저리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어. 김일성이면 어떻고 박정희면 어때? 

  이런 식이었다. 

 

  수요일 새벽 세 시 반 나는 흰 된장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라면이 거의 익었기 때문에 나는 초조해 졌다. 가스 불을 꺼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이 다가와 말없이 내 몸을 안았다. 나는 놀랐다. 그 날 처음 만났지만 그는 위선자도 바보도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요일 오후 여섯 시 사십 분에 처음 만났고 커피를 마시고 지하 레스토랑에서 폐타이어처럼 딱딱한 스테이크에 카레 소스를 얹은 저녁을 먹었다. 접시는 끈끈했고 카레에서는 지독한 기름 냄새가 났다. 그 다음에 아이스크림을 큰그릇으로 두 개나 먹었고 과일과 치즈와 맥주를 아주 약간 마셨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안경을 쓰고 있었고 흰 셔츠에 깨진 우리 조각 같은 무늬의 타이를 매고 요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나는 백 퍼센트 아웃소싱을 하고 있습니다. 기획이나 필자 관리, 편집, 사진과 영업까지 모두." 

  "그렇다면 직원이나 사무실이 굳이 필요하지 않겠네요 ."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의 명함에는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이라고 금박으로 쓰인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이름이 한문으로, 그리고 전화 번호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뒷면은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상당히 절제되어 있는 디자인이었으나 어울리지 않게도 나는 거기서 관료의 냄새를 느꼈다. 

  "잡지를 위해서 직접 하고 있는 일은 뭔가요?" 

  "내가 직접 하고 있는 일은, 지금으로선 음, 없어요. 한 달에 한 번, 회계사무소의 사람을 만나 저녁을 먹습니다. 그는 잡지를 위해 외주한 여러 회사들을 관리해 주고 세금을 적게 내는 방향으로 재정을 관리하죠." 

  "그럼 이 명함은 단지 취미신가요?" 

  "그런 셈입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를 닦았다. 따뜻한 유월의 밤이었다. 그는 덧붙였다. 

  "문화적인 취미를 갖고 싶었습니다." 

  "원래 직업은 다른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이 빈 아이스크림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내 몸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렇다면 새로운 삽화가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셈이군요. 그렇죠?" 

  "어제까지는 그랬습니다. 아니, 오늘 오후 두 시까지는 그랬죠. 정확히 말하자면 삽화가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회계사 사무실의 사환이 당신이 나에게 보내주신 삽화를 가지고 왔더군요. 정답을 맞추면 선물로 쿠킹 세트나 디너 티켓을 주는 그런 퀴즈나, 독자들의 평을 적은 엽서 같은 것은 관리해 주는 회사가 따로 있어요. 그들은 엽서에 회신을 보내기도 하고 불평이 있으면 시정하겠다고 약속하거나 제본이 불량인 잡지를 우송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중히 사과하고 새로운 잡지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삽화는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회사는 매달 결제를 받는 회계사 사무실로 삽화를 보냈고 그곳에서는 아무래도 내가 한번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거겠죠."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잡지를 낸 지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요." 

  "어쨌든, 새로운 삽화가 따위는 필요하지 않으신 거잖아요. 새로운 화가가 필요하면 편집 대행 회사에서 판단해서 고용하면 되니까요. 그렇죠?"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내가 뭐라고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는 그냥 문화적인 취미를 갖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내가 보낸 일러스트 세 점을 가지고 왔다. 저녁을 먹는 내내 그는 커다란 봉투에 담긴 내 그림을 식탁에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창간호부터 아방가르드 요리를 구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년 전부터 간단한 정물이나 살아 있는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로 건축물일 때도 있었다. 아방가르드 요리는 다른 잡지처럼 화가를 구하지 않았다. 나는 혹시 상근 디자이너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아방가르드 요리에 그림을 보냈던 것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화가로서는 경제적으로 불안한 삶이었다. 

  잡지를 구독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 잡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등장하는 요리는 평범한 것들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비싼 향신료나 지나치게 꾸며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생리 기간 중에 먹으면 좋은 닭 날개 요리, 비가 오고 구름이 낮은 날 먹는 국물 라면, 애인과의 잠자리에서는 떡볶이를 먹는다(그 애인이 오랜만에 만난 옛사랑일수록 매운 소스로), 국물 없이 먹는 일주일간의 식단(사막의 종족을 생각한다), 개고기를 넣은 샌드위치, 마늘 주스 만드는 법과 생라면을 맛있게 먹는 법 등이 실리는 잡지였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서라면 나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경력도 터무니없이 짧고 포토폴리오도 빈약하고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자극적인 소재를 선호하지도 않았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뭐 별로 기대하고 보낸 것도 아니니까 잊어버리면 돼요." 

  내가 마침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고 딸기 아이스크림과 크래커를 넣은 호두 아이스크림에 지쳐서 맥주를 반 컵 가량 마신 뒤였다. 맥주에서는 바닥을 청소 할 때 쓰는 젖은 걸레 냄새가 났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별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봉투 속의 삽화를 꺼냈다. 

  "이것은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가 꺼낸 그림은 내가 그에게 보낸 것 중 가장 작고 간단한 것이었다. 한 가지 색밖에 쓰지 않았다. 그림의 제목은 <붉은 손 클럽>이었다. 

그것은 <붉은 손 클럽>이군요." 

  나는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림을 잘 모릅니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아, 요리도 직접 만들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내 잡지의 상근 디자이너로 채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나는, 시스템이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잡지는 이 상태대로, 백 퍼센트 아웃소싱이 적당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잡지의 다음 호에 싣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 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템포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잡지로 그림을 보낼 때 나는 <붉은 손 클럽>을 함께 보낼 것인가 조금 망설였었다. 요리 잡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기도 했고 이미 오래 전에 그려놓았던 것이지만 어느 잡지에서도 사지 않았던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손입니까?"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내 손을 움츠렸다. 

  "그렇지 않아요." 

  "손은 하나뿐인데 왜 <붉은 손 클럽>입니까?" 

  "상징적인 제목으로 선택한 거예요."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은, 처음에는 그것이 요리 잡지에 별로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보내지 않으려고 했었어요." 

  "아,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당신에게 연락 할 일이 없었을 겁니다." 

  "다음 호에는 어떤 내용이 실리나요?" 

  "인생에 한 번 정도는 차릴 수 있는 식탁이 되겠죠.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기획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림의 값은 은행으로 넣어드리겠어요."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이렇게 말하고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둘 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불렀다. 

  나는 백에서 소화제를 꺼냈다. 노란빛 알약이었다. 

  "드시겠어요?" 

  "뭡니까?" 

  "그냥 소화제일 뿐이죠. 언제나 가지고 다녀요." 

  "과식하는 습관이 있군요." 

  "네, 이틀 정도는 물만 먹고 버틸 수 있지만 그 다음에는 열두 시간 동안 끊임없이 먹고 싶어요. 드시겠어요?" 

  "두 알 정도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소화제를 두 알씩 먹었다. 커다란 왁스 덩어리가 목구멍을 힘겹게 통과했다. 쓴 물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왼쪽 눈썹을 약간 꿈틀거렸을 뿐이다. 배가 불렀기 때문에 우리는 거리를 산책하기로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거리는 한산하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들과 택시를 잡는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아주 기분 좋게 따뜻한 유월의 밤이었다. 좁은 도로와 골목은 심하게 더러웠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던 나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

 

  "나는 하루 여섯 잔의 커피를 마셔요. 아침 오후 그리고 저녁 두 번씩이죠. 집에 들어가서 라면과 커피, 어때요?" 

  "좋습니다." 

  현관에는 전날 치워놓지 않은 세탁 안 된 속옷과 스타킹이 지저분했고 마룻바닥은 먼지로 버석거렸고 싱크에는 설거지 안 한 그릇들이 있고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플라스틱 일회용 요구르트 그릇이 부엌과 침실에 흩어져 있었다. 소파 아래에는 개 먹이통이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은 채로 굴러다녔다. 카펫은 잉크 자국으로 얼룩덜룩했고 피아노 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러져서 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화구들이 어지러웠고 게다가 집안의 전등은 현관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방가르드 요리편집장을 현관에 세워놓은 채 나는 사방에 쓰다가 던져놓은 타월과 티슈와 빈 미네랄 워터 병을 치웠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좀 지저분하죠. 청소는 이 주일에 한번씩 해요. 누군가를 초대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소파에 앉아 계시면 라면을 끓여드릴게요." 

  "음, 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이 소파에 앉으면서 그 위에 있던 신문들을 치우자 티슈에 싸여져 있던 사용한 콘돔이 카펫에 툭 떨어졌다. 사용한 지 몇 달이나 지나 완전히 말라붙어 있는 것이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의 눈과 내 눈이 동시에 그것을 향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고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무표정했다. 나는 발로 그것을 소파 아래로 밀어 넣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못 본 체했다. 나는 가스 불을 켜고 물을 올렸다. 양파와 고추를 볶고 라면이 익을 무렵이 되어 흰 된장을 아주 조금 풀어놓고 기다릴 때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이 내 뒤로 다가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긴장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것은 오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미안해요. 난 불감증이에요." 

  내가 말하자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이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뭐라고 할말을 잊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내 원피스를 걷어올리고 속옷을 벗겼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의 손이 내 엉덩이 사이 아래 부분 어디론가 들어올 때까지 나는 그와 관계를 가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정하지 못했다. 나는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아마 일생 동안 결정적인 순간에 순발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를 처음으로 만난 날이라는 사실에 나는 많이 머뭇거렸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안경을 벗어 조리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벨트를 풀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는 타이를 풀지도 않았고 목까지 잠근 셔츠 단추를 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살결은 놀랍도록 매끄러웠다. 냄비의 뚜껑을 밀어내면서 끓고 있던 라면의 국물이 넘쳤다. 나는 가스를 잠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 엉덩이 사이를 만지고 있었다. 창문도 열어놓지 않았고 바람 한 점 없는데 검은색 각 달린 현관의 전등이 부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그림자도 주방 앞 어두운 벽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몸 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팠다. 하지만 내 의지에 반해서 내가 젖어 가고 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나는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것은 심해 물고기처럼 검고 무표정했다. 

  "침대로 가요."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는 굳은 빵 조각처럼 말랐다.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그때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반쯤 열린 채 있는 침실 문을 통해서 흰 이불이 구겨져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저 침대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올라갔을까.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싫습니다." 

  그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나는 불편한 상태로 주방 조리대에 기대 서 있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는 계속해서 손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숨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몸을 기울여서 내 엉덩이와 축축한 허벅지 안쪽 부분을 깨물었다. 쾌락을 위해서 이빨을 쓴 것이 아니고 사정 보지 않고 있는 힘껏 깨물어버린 것이다. 나는 육체적인 고통을 별로 느껴보지 못하고 자랐다. 수술을 받아본 적도 없고 화상이나 살갗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은 적도 없다. 나는 그렇게 격렬한 고통을 피부에 직접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이에나가 미처 죽지 않은 짐승을 물어뜯을 때 짐승이 그렇게 느낄까. 고통이란, 더구나 성관계 중의 고통이란 그 상황상 묘하게 달콤한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신음을 참기 위해서 나는 뜨거운 냄비 뚜껑에 가슴을 갖다 댔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내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내 허벅지 사이에 몸을 가져다 대고 가볍게 스쳤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 몸에서 멀어져갔고 이윽고 사정했다. 나는 소파로 가서 주저앉아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눈물이 세 방울 정도 흘러내렸다. 소리 내지 않고 울기 위해서 조금 노력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집으로 들어오던 바로 얼마 전까지의 일상의 안정감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소파 위에 있던 신문지로 몸을 닦았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쓰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섹스에 대해 그동안 겪어서 알고 있던 모든 것과 달랐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과 나는 서로 너무 낯설었고 서로의 몸이 접촉했던 부분은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었고 입술이나 손길이 서로를 어루만지지도 않았으며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마음이 준비될 수 있는 여유도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성기 접촉도 전무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나는 눈물을 닦고 가스 불에 얹힌 냄비를 살펴보았다. 신기하게도 라면은 여전히 뜨거웠고 흰 된장의 향기도 여전했으며 면발은 아직도 탄력을 잃지 않았다. 나는 유리 그릇에 라면을 담고 가늘게 썬 치즈를 얹고 젓가락을 가져다 테이블에 놓았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바지를 입고 벨트를 한 다음 안경을 썼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와 앉았다. 그리고 먹기 시작했다. 그는 접시에 내가 먹을 수 있게 라면 약간을 덜어주기도 했다. 

커피는 인스턴트밖에 없어요. 괜찮겠어요?" 

  라면을 후후 불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나는 다시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그때 나는 내 그림이 들어 있는 봉투가 현관에 놓여진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와 <붉은 손 클럽>을 제외한 다른 그림을 꺼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붉은 손 클럽>만을 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백에서 열쇠를 꺼냈다. 나에게는 집의 스페어 열쇠가 있었다. 그것을 <붉은 손 클럽>이 들어 있는 봉투에 넣었다.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고 반사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몸을 돌리고 아방가르드 편집장이 거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무엇을 한 겁니까?"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차분하게 물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신경질이 묻어 있었다. 그는 원래 아주 날카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 그림을 꺼냈어요. 당신이 사지 않을 그림 말예요." 

  "음." 

  "<붉은 손 클럽>만 들어 있죠." 

  아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태연하게 조리대로 걸어가 커피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비틀거렸다. 통증 때문이다. 

  "아픈가요?"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커피가 든 도자기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면서 물었다. 

  "견딜 수 있어요." 

  "상처를 좀 볼 수 있습니까?" 

  나는 원피스를 걷고 상처를 보여주었다. 여덟 개의 둥그런 이빨 자국이 엉덩이에 한 개, 허벅지에 두 개 나 있었다. 피부는 찢겨지기 일보 직전에 멈춰 있었다. 상처는 붉은 보랏빛이고 피멍이 들어 있었다. 이빨 자국을 중심으로 빨갛게 피가 맺혀 있었고 반경이 인치 정도 멍이 번져 있었다. 특히 왼쪽 허벅지 안쪽이 심했다. 이빨에 의한 직접적인 상처 외에도 석션이 심했기 때문인지 마치 흡입기로 빨아올린 듯이 참혹한 꼴이었다. 

  "피가 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요." 

  "그렇군요. 항생제를 먹을 필요까지는 없겠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아팠겠군요." 

  "참을 수 있었어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습니까? 어린 시절에." 

  "서울에서 보통의 가정이었어요. 부르조아는 아니었죠.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였어요." 

  "아."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인내심이 대단해서.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으니까요." 

  현관문으로 조간 신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수요일이 시작된 것이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네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빈 커피 잔을 싱크에 담갔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이 웃옷을 찾아 입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놀랐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올 곳은 없었고 그럴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은 옷을 입다 말고 나에게 전화를 받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전화벨이 세 번쯤 울렸을 때 나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에서는 음악 소리만 들렸다. 자동차에서 틀어놓은 듯한 음악 소리였다. 멀리서 들리는 클랙슨 소리, 완전히 시동이 꺼지지 않은 자동차에서 나는 희미한 엔진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내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조심성 없이 킥킥 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잠깐 들렸을 뿐이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을 때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숨막히는 여름밤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손 클럽>그림이 들어 있는 봉투도 없었다. 나는 유리창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방가르드 요리 편집장의 검은 SM이 거리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그리고 곧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몰랐다. 

  설거지를 마친 다음 나는 손톱이 하나 부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파에 앉아 손톱을 깎았다. 그리고 조금 생각하다가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상처는 살아 있었다. 나는 약간 안심했다. 현관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조금 걷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어둡지만 산책을 하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보니 우편함에는 우편물이 쌓여 있었다. 우편함을 열어본 지가 일주일도 넘었다. 대부분이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 세금과 광고에 대한 것들이다. 나는 겉봉만 읽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뜯어봐야 할 것은 세 개 정도였다. 나는 희미한 전등이 켜진 복도에 서서 그것을 읽었다. 두 개의 봉투는 내 가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소개서를 보냈던 회사였다. 정중한 거절의 회신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 편지를 읽었다. 

 

 

 

 

 

 

유월 마지막 수요일 저녁 열 시. 

이반의 집. 흰옷을 입고 올 것. 

붉은 손 클럽. 

 

 

 

 

  붉은 손 클럽 모임을 알리는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