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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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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DidISay 2012. 9. 30. 08:06

 

 

 

 

 

 

네 자신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위녕,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하는 너는 어쩌면 이런 날씨가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꽃들은 화사하고.....오늘도 가끔 창밖을 보고 있니? 그래 가끔 눈을 들어 창밖을 보고 이 날씨를 만끽해라. 왜냐하면 오늘이 너에게 주어진 전부의 시간이니까. 오늘만이 네 것이다. 어제에 관해 너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하나도 고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것은 이미 너의 것은 아니고, 내일 또한 너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단다. 그러니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네가 사는 삶의 전부, 그러니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라.

 

  너는 어제 어처구니 없이 당한 오해와 공격에 대해 엄마에게 오래도록 이야기했었다. 그래, 생각 같아서는 너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에게 쫓아가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항의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일단 엄마는 여기서 한 박자 쉬기로 했어. 대신 네게 이런 편지를 쓰고 싶었단다. 그 순간, 네가 하지도 않은 일로 그가 너를 오해하고 사람들 앞에서 너를 망신당하게 했을 때, 그때 네 마음이 피 흘리며 아팠을 때, '정말, 정말, 너를 상처 입힌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하는 편지 말이야.

 

  너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엄마도 책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란다. 책을 읽는 이유는 인생의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 한 가지 이유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가끔 엄마는 좋은 책의 어떤 구절에서 인생이 방향을 바꾸는 소리를 듣곤 한단다. 바로 이 구절도 그랬지. 약한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마음이 찡했던 거야


  '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이 말은 엄마가 안셀름 그륀이라는 신부님의 책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에서 읽은 구절이었어. 그 신부님은 성폭력의 상처를 가진 여성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어떤 위로도 이 여성들을 다 위로하고 치유할 수 없지. 어린 시절의 성폭력은 그 여자들이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초래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역사에 희생당한 사람들,테러에 희생당해 불행을 겪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성폭력이나, 광기의 역사나, 테러에 희생당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와중에 그것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거나 나는 오직 희생양이라고 말하기 전에 조금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도 있다는 이갸기이기도해. 그륀 신부는 이 여성들과의 면담을 통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 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녕, 너는 이 이상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니? 이 무서운 진리를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다. 가끔 엄마는 생각해. 진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그 고통에서 그들이 헤어나올 방법을 함께 모색해 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단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여기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나 한 걸까? 하고 말이야. 가끔 그건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개는 그 고통이 가해지는 틀을 깨 버려야 할 때가 많으니까. 그건 미지(未知)이고 그것은 고통보다 더 두려운 거지.


  그리고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것은 비단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상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되지.그는 그것을 이렇게 써놓았단다.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석에 앉혀 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늘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 자리에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피고석에 우리 자신을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엄마가 많이 힘들던 어느 날,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과 엄마가 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다르다고 느끼는 날 엄마는 이 구절을 읽었고, 책이 아니라 가슴에 붉은 밑줄이 손톱자구거럼 북북 그어지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엄마의 녹슬어 가던 인생은 끼이익하고 각도를 트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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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토록 중요한 내 인생의 판결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에 맡기려고 하다니....그날은 마침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 날이었는데 엄마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지인들과 술을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

 

  "나는 이제 피고석을 떠나겠어! 오늘부터 내 배심원들 다 해고야..."

 

  있잖아 위녕, 어떻게 그런 말을 술 마시고 반복했는지 모르지만 태어나서 술 마시고 얼결에 한 말 중에 제일 나은 것 같아. 그 순간 엄마의 마음 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찾아왔단다. 해방감은 공포를 수반했지만, 적어도 나를 비난하기만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변명하고 있는 짓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만은 확실했고, 엄마는 그 어리석음이라는 확실함을 붙들고 일단 확실한 그것을 발길로 뻥 차 버림으로써 거기서 한 발짝 벗어나기 시작했단다. 아직도 그 순간의 감격을 기억해.

 

...사람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사건에 대한 표상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음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이 끔찍한 것이고 깨어진 꽃병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과 꽃병을 동일시하여 꽃병이 깨어져서는 안 돈다고 생각하고 온 마음으로 꽃병에 집착하는 것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이 ㅂ히는 것이 아니라. 돈은 꼭 필요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상처를 입힌다.

....인간은 자유를 원할 때에만 자유로워진다. 다른 사람은 우리가 자신을 해치고 상처낼 때에만 우리에게 상처 입힐 수 있다.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믿음, 선입견....즉 표상이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관하여 만들어 낸 생각에 일치하게끔 그 사람을 체험한다. 어느 한 사람을 열광적으로 찬탄한다면, 우리는 그가 저지른 가장 정신 나간 일도 황홀하게 바라보고, 유일하며 비범한 것으로 해석한다. 화난 안경이나 실망한 안경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를 마음에 안 들고 불쾌하고 허약하며 아주 간사하고 부정직한 등등의 사람으로 체험하게 된다.

 

  위녕, 무엇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너의 배후는 무엇이니? 네 속에 없는 것을 네가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네 속에 미움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미움을 줄 것이고,네 속에 사랑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사랑을 줄 것이다. 네 속에 상처가 있다면 너는 남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네 속에 비꼬임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비꼬임을 줄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의미든 너와 닮은 사람일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된 것일 테니까. 만일 네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너와 어떤 의미이든 닮은 사람일 것이다. 네 속에 없는 것을 그에게서 알아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네가 남에게 사랑을 주든, 미움을 주든, 어떤 마음을 주든 사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네 것이 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말 한마디 시선 하나가 두려워진다. 정말 두려워져.

 

  위녕, 우리는 가끔 어처구니 없는 가시덤불에 걸리기도 하고, 모욕의 골짜기에 떨어지기도 하지. 너의 선의와는 아무 상관없이 너는 매를 맞을 수도 있고, 창피를 당할 수도 있어.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그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일을 마음속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있다는 거야. 그건 우리에게 달린 일이거든, 그리고 우리에게 달릴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해.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 모욕에 오늘 하루를 내줄 것인가, 생명이 약동하는 이 오월의 아름다움에 네 마음을 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너 자신이지. 그것은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너의 선택이라는 거야.

 

  이 시간의 주인이 되어라. 네가 자신에게 선의와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궁극적으로 너를 아프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성적이 어떻든, 네 성격이 어떻든, 네 체중이 어떻든 너는 이 시간의 주인이고 우주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라는 생명이다.

 ....

  그러나 위녕, 사실을 말하면 엄마는 네가 이 시기를 좀 잘못 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되, 너는 아직 젊고 또 많은 기회가 있을 거야. 이 한해로 너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도 안 되고...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엄마의 미안한 사랑을 보낸다.

 

  왠지 오늘은 수영장이 임시 휴일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자, 오늘도 좋은 하루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中, 공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