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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한강 산문집

DidISay 2012. 10. 3. 05:43

 

 

한강 선생님이 첫 장편소설을 낸 98년 여름.

3개월간 아이오와 대학교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주로 제3세계에서 온 작가들과 보냈던 시간들의 기억.

 

그리고 프로그램 이후 한달정도의 여행 경험을 통해 느꼈던 단상들을

책 설명에 나와있듯이, 크로키처럼 짧게 짧게 풀어낸 산문집이다. 

 

잘 알려지진 않은. 꽤 오래전의 책인데 워낙 편애하는 작가라 구입한 책이다.

이 사람의 소설 외에도, 산문집에서 느껴지는 평소 생각이나 감정의 선이 궁금했던.

 

 

내 친구는 배수아와 한강, 오정희를 동시에 사랑하는 나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했지만. 어찌되었든 난 세 사람 다 좋은걸 :)

 

 

 

아래의 글은 내 생각이랑 너무 비슷한 것들이 많아서 읽으면서 흠칫 했었는데,

요즘 한강선생님이 바라셨던 소설낭송 방송이 꽤 많아져서

새벽에 들으시면 행복하시겠다 싶었다.

 

KBS 낭독의 발견과 함께, 내가 좋아했던 것은 이것.

라디오 방송이라 다시 듣기가 가능하다.

http://www.kbs.co.kr/radio/1radio/culture/greatest/index,1,list,14.html

 

낭송하는 책의 목록들이 꽤 맘에 들었었다.

 

다만 성우의 전문적인 목소리가 거슬려서,

좀더 나직한 목소리의 일반인이나 작가 본인이 읽어주면 더 좋겠다 싶었는데

팟캐스트들이 생김 ㅎㅎ

 

 

 

시낭송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유안진 시인의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http://www.mariasarang.net/bbs/bbs_view.asp?col=1&curLevel=0&curRef=1458&curStep=0&index=maria2000_poetry&no=1458&page=13&sort=DESC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틀어주셔서 들었다가 반해서 한동안 거듭해서 들었었다.

하늘이 굉장히 높은 늦가을이었는데, 

낙엽향 나는 바람 솔솔 부는 강의실에서 듣는 이 시가 어찌나 좋았는지.

 

요즘도 가을만 되면, 춘천만 떠올리면 유안진 시인의 저 낭송시가 귓가에서 맴돈다.

 

 

 

 

 

 

 

 

 

 

 

 

소설 낭송

 

 

 

 

 

그렇게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정신이

허공에서 에너지로 만나는 순간,

텍스트와 목소리, 감정과 표정이 한덩어리가 되는 순간을,

그 시절 그 숱한 낭송회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나, 실현 가능하지는 않으나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겁기 때문에 꿈꿔보는 일들이 한두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나에게도 그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서점을 하나 여는 것이다. 생각해둔 장소는 인사동, 경인미술관 골목이다. 골목 깊이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반드시 1층이어야 한다. 규모는 보통 동네 서점의 두 배에서 세 배쯤이면 적당하겠다. 무학, 예술, 인문서적들을 주로 진열하고 중고등 학교 참고서는 팔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아이들과 엄마들을 위한 코너를 갖출 것이다.

 

    어떤 색의 책장을 맞춰 어떻게 진열할 것인지, 간단한 차와 케이크, 떡과 한과를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어떻게 그 서점만의 베스트 20을 만들어 주마다 갱신할 것인지, 멤버십 카드와 뉴스 레터를 어떻게 제작해 운용할 것인지.....하는 사소한 계획들을 나는 노트 가득 적어놓고, 도면까지 완성해놓았다. 물론 서점의 이름도 지어뒀다. 몇 시에 서점 문을 열고 닫을 것인지, 아르바이트생을 몇 시부터 몇시까지 고용하고 시급은 얼마를 줄 것인지, 나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할 것인지, 그 시시콜콜한 항목들이 나의 상상을 현장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매주 금요일 밤 8시 30분부터 열리는 소설과 시 낭송회다.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으니, 책장와 책장 사이의 가운데 공간에 접이의자 40석만 놓을 것이다. 낭송이라면 을 시 낭송을 떠올리지만, 시보다 오히려 흡인력 있는 것이 소설 낭송이다. 시인을 위해 30분, 소설가를 위해 30분을 공평하게 배분하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질의응답 시간을 붙인다.

 

   연령과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낭송자들을 선정할 것이고, 낭송료는 그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가는 것으로 할 것이다. 물론, 여유가 된다면 개인적인 선물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책을 팔아보자는 것도 아니고, 입장료를 받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시간을 향유하는 것만이 행사의 목적이다. 내 꿈속에서 그 금요일 밤의 정경은 어두운 거리, 불 켜진 서점의 유리문과 그 안에서 낭송하는 사람, 진지하게 몰입해 있는 청중들의 이미지로 빛난다.

 

  간혹 내 꿈은 부풀어서, 작은 라디오 방송국을 여는데까지 뻗어가기도 한다. 녹음실과 성우, 진행자 몇만 있으면 되는,새벽부터 밤까지 문학작품을 읽어주는 라디오 채널이다. 국내 작품뿐 아니라 외국 작품들-영미, 유럽뿐 아니라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작품들을 골고루-도 함께 읽을 것이다. 시와 소설뿐 아니라 희곡, 동화-동화는 상당히 청취율이 높을 수도 있다-까지 포괄하고, 고전부터 현대물까지 여러 시대의 창작물들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편성할 것이다. 상상해본다. 막히는 차 안에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시간은 답답하지도, 아깝거나 지루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 꿈은 단순하다. 굳이 내가 그 서점을 가질 필요가 없고, 굳이 그 라디오 방송국을 가질 필요도 없다-물론, 그럴 만한 재력도 없다- 그러니 누군가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내 꿈들을 실현시켜주어도 좋겠다.(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꿈을 꾸지 않을까?) 그런 서점, 그런 라디오 채널이 있다면 숨쉬고 살아가기가 훨씬 편안하겠다는 마음뿐이다.

 

 

 

 

  아이오와 시절, 한 달에 대여섯 차례씩 돌아오던 낭송회들을 기억한다. 강당이나 서점에 빼곡히 들어찬, 시와 소설 낭송을 듣기 위해 찾아온 학생들과 일반인들, 드라마틱하기보다는 진지한 낭송, 몰입한 청중들, 그 고요한 긴장, 목소리의 떨림,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가능했으면 하는 생각을 그때 했다. 대단한 볼거리가 아니어도 좋다고, 시인과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낭송하고, 독자가 그것으 생생한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면, 어떤 장소라도 좋을 거라고.

 

  서점 '초원의 빛'에서 내 소설을 읽던 날을 기억한다.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이었는데, 그야말로 직접적인 독자의 반응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떨리는 일인지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영어로 읽기 전에 한국말로 한부분을 읽었었는데, 그 순간 놀랄 만큼 고요해진 객석에서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무대공연의 생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강연과는 달랐다. 전혀 다른 느낌의 소통이었다. 읽기가 끝난 뒤 에란디스는 나에게, 자신의 옆좌석에 앉았던 여자가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늦은 가을 어느 날, 이제는 이름을 잊은 한 여성 시인의 시 낭송회가 강당에서 열렸던 것을 기억한다. 빈 자리가 없어 출구로 나오고 있었는데, 복도 끝에 꼿꼿이 선 채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에란디스를 보았다. 그 거대한 여자의 얼굴에 어린 빛, 은은한 미소, 강단에선 시인보다 더 강하게 전해져 오던 그녀의 존재감을 나는 기어간다.

 

  그렇게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정신이 허공에서 에너지로 만나는 순간, 텍스트와 목소리, 감정과 표정이 한 덩어리가 되는 순간을, 그 시절 그 숱한 낭송회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 작은 도시에서, 서툰 영어로, 연고도 전혀 없던 내가 그 생활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화적으로 풍부한 공기-지금의 서울보다 숨쉬기 편안한- 때문이었다는 것을 결국 나는 부인하지 못하겠다.

 

 

 

 

덧)

1.새로 산 노트북의 키감이 예전 노트북과 달라서 아직 적응이 잘 안되는.

단문은 괜찮은데, 장문은 중간중간 예기치않게 오타가 발생한다.

 

 

2. 표지에서 제목을 흐릿하게 처리한 것이 독특했는데,

말그대로 스치는 생각들을 써놓은 것이라 꽤 잘 어울려 보인다.

실제 표지색은 저 사진보다 더 흐린, 산호빛 혹은 봉선화빛 핑크색에 가깝다.

 

 

3. 이 책에서 문단바뀜을 표시할 때 사용하는 들여쓰기를,

스페이스바를 5,6번은 친 것처럼 아주 깊숙이 해놨는데

학교 다닐 때 교수님 중 한분이 들여쓰기 애매한 걸 굉장히 싫어하셔서

항상 이렇게 하길 강조하셨던 것이 생각나 잠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