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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조금씩 물들어가는.

DidISay 2012. 10. 20. 09:53

 

 

 

 

 

지난주만 해도 거리의 잎들이 모두 파랬는데,

좀 추워졌다 싶으니 서서히 단풍이며 은행잎이 물들기 시작한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시나브로.라는 말을 평소에 거의 사용할 일이 없는데

줄 지어 늘어선 은행나무들을 보고 생각이 났다.

 

시나브로 물드는구나.

 

 

 

 

 

 

친구가 요즘 일이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서,

무언가 위로의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득 아르바이트를 할 때 타고 다녔던 버스 생각이 났다.

 

학교 다닐 때 과외 장소가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라

항상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선유도 공원을 지나서 가는 경로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나 은행잎이 한잎한잎 떨어지기 시작할 때면

차창 밖에 너무 예뻐서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나 들곤 했다.

 

아이들의 시험기간이나 내 시험기간은

언제나 벚꽃의 시기와 겹쳐서 제대로 벚꽃을 즐긴 적이 없었는데,

그 때 언제쯤 마음 편하게 이 꽃들을 볼 수 있을까 했던 생각이 났다.

 

여의도나 선유도가 정말 코앞일 정도로 가까웠는데도

몸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따로 시간을 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쁘다고 해도, 

원한다면 몇 번이고 벚꽃이나 단풍구경을 갈 수 있으니까

적어도 그만큼은 행복해진거라고 믿는다.

 

 

 

불행.이란 감정을 느꼈을 때 하고 싶었던 것들.

 

마음 내키면 언제나 예쁜 옷을 살 수 있다거나

신간을 얼마든지 구매해서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주말이면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함을

지금은 가지고 있으니까.

 

아주 하찮은 것들이라고 해도,

예전엔 이벤트처럼 했던 것들이

이제는 일상처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어느순간 이것들이 너무 당연해지면서

다시 평범함 속으로 함몰되어버려 잊혀진 것이다.

 

사실은 예전에 그렇게 원했던 행복한 일상을 이룬 것인데도.

'꿈의 실현'이나 '행복'이란 말의 거창함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것을 갖춘 것이 평범함이나 무난함이라면

우리 대부분은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물질적 결함이나 정서적인 부족함이 전혀 없는 삶은

(이 두가지가 동시에 충족되는 삶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실패나 부정적인 감정을 딛고 일어서는 경험'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한 단면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결핍된 삶이니까.

 

부족함과 외로움이 뒤섞인 순간순간들이 만나서 온전한 원을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삶이란 그림을 끝까지 그려볼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물들어가는 은행잎처럼

나의 삶도 로또처럼 삶을 뒤흔드는 거창한 행복보다는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로 서서히 물들어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