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는 1938년 5월 25일 오리곤 주 클라츠카니에서 제재소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 아카타에 있는 훔볼트 주립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1963년과64년에 아이오아 대학에서 연구했다. 최근에 단편소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카버의 주요작품으로는 <제발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Will You Please Be Quiet,Please?>(1976),<사랑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1981),그리고 <대성당Cathedral>(1983)등이 있다. 또한 그는 <불꽃:에세이,시, 단편소설Fires:Essays,Poems,Stories>(1984)의 저자이기도 하며, 최근에는 <물이 합류하는 곳Where Water Comes Together with Other Water>(1985)과 <감청색Ultramarine>(1986)이라는 두권의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밀드레드와 해롤드 스트라우스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산타 크루즈대학, 버클리 대학, 아이오아 대학과 시라큐스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현재 카버는 워싱턴의 포트 앤젤레스와 뉴욕주 시라큐스에서 작가인 테스 갤라허와 함께 살고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뉴욕주 시라큐스에 있는 한 조용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목재지붕을 얹은 커다란 이층집에 살고 있다. 집 앞쪽의 정원은 보도 쪽으로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고 있고, 차도엔 새로 뽑은 메르세데스 자동차가 놓여 있으며, 거리에는 가사용 차인 낡은 폴크스바겐이 주차되어 있다. 휘장이 쳐져 있는 커다란 현관을 거쳐 집안으로 들어서면, 별다른 특징없는 평범한 가구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카버와 함께 살고 있는 갤러허가 집안 여기저기 놓인 꽃병에 공작깃털을 꽂아두었는데, 이 정도가 집안을 장식하려 한 가장 눈에 띄는 시도인 것 같았다. 우리의 이러한 추측은 카버의 말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에 의하면, 집안 가구가 전부 단 하루만에 구입되고 배달되었다고 한다. 작업이 한참 바쁠 경우에는, 갤러허가 나무 널판지로 만든 <방문객 사절>이라는 표지판을 현관 문 위에 걸어두곤한다. 때때로 그들은 전화코드까지 뽑아 버린 채 표지판을 며칠동안 계속해서 문 위에 매달아 놓기도 한다. 카버는 이층의 커다란 방에서 작업을 한다. 참나무로 만든 길다란 책상의 표면은 깨끗했고, 그의 타자기가 측면에 놓여져 있을 뿐, 장식물이나 장난감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때때로 책상 위에는 마닐라 종이 끼우개가 하나 놓여지는데, 거기에는 현재 교정중인 작품의 원고뭉치가 들어 있다. 그의 서류철들은 항상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필요한 이야기 및 그 이야기에 대한 여러 번안들을 짧은 시간 안에 뽑아 볼 수가 있었다. 이 서재의 벽은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장식품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책상 윗쪽으로 난 직사각형 모양의 높은 창문을 통하여, 마치 높은 교회의 창문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햇빛이 비스듬히 경사진 빛줄기를 방안으로 통과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카버는 몸집이 큰 편으로, 플란넬 셔츠나 블루진으로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는 자신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똑같이 살아가고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커다란 체구에 비해 목소리가 매우 낮고 불명료했다. 우리는 종종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듣기 위해 귀를 더 가까이 대거나, "방금 뭐라고 하셨죠?"라고 어쩔 수 없이 묻곤 했다. 이 인터뷰의 일부는 1981년에서 82년에 걸쳐 우편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카버를 방문했을 때는 <방문객 사절>이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지 않았으며,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을 동안 시라큐스 대학4학년에 재학 중인 그의 아들을 포함한 학생 몇몇이 잠깐 들렀다 갔다. 점심식사로 카버는 우리에게 자신이 직접 워싱턴 해변에서 잡은 연어를 곁들여 만든 샌드위치를 대접했다. 그와 갤러허는 둘 다 워싱턴 출신인데, 이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해서 그들은 매년 포트 앤젤레스에 얼마간 묵을 작정으로 집 한채를 새로 짓고 있었다. 우리는 카버에게 그 집이 가정같은 분위기를 현재 이 집보다 많이 풍기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 아니요. 난 내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다 좋습니다. 이곳도 좋아요."
대담자: 카버씨의 어릴적 생활은 어떠했었나요?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카버:나는 워싱턴 동쪽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야키마Yakima라고 불리우는 곳이지요. 아버님은 그곳 제재소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톱에 줄질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셨고, 통나무를 자르고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톱들을 손질하는 일도 도와주곤 하셨죠. 어머니는 조그만 가게의 점원으로 일했으며, 그렇지 않을 땐 집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떤 일에도 오랫동안 붙어있진 못하셨습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신경에 대해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던 소리들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부엌 싱크대 아래에 있던 상자에 신경안정제 한병을 놔두고, 매일 아침 두 스푼 가량을 복용하시곤 했지요. 아버지의 신경안정제는 위스키가 대신했는데, 그래서 아버지는 위스키 한병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싱크대 아래에 보관해 놓거나 아니면 집 바깥 쪽에 있는 헛간에 놔두곤 했었죠. 언젠가 한번 나는 그것을 몰래 꺼내 맛본 적이 있는데, 그 다음부턴 위스키라면 질색을 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것을 마실 수 있는지 이상했을 따름이었으니까요. 집은 자그마한 침대방 두개가 전부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여러번 이사를 했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자그마한 침대방 두개짜리 집이었습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첫번 쨰 집은 야키마의 시장 근처에 있던 것으로, 그때가 아마 1940년대 후반쯤이었을 겁니다. 내가 여덟살 내지 열살 정도 되었을 때니까요.나는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시길 기다리며, 종종 버스정류장에 나가 있곤 했습니다. 대개 아버지는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게 똑같은 버스를 타고 오셨지만, 이주일 정도마다 한번씩은 그 버스에 타고 있지 않을 때가 있었지요. 나는 그때마다 끈질기게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잇곤 했는데, 물론 나는 아버지가 다음 버스로도 오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늘 타고 오던 버스에 안 계신 것은 제재소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가셨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나 그리도 어린 동생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던 저녁 식탁에는 최후의 심판때와도 같은 절망적이고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나는 그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담자: 그런데, 당신에게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했던 것은 무었이었나요?
카버: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아버지가 내게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남북전쟁때 참전한 경험을 갖고 있었지요. 그것도 남군과 북군의 양쪽을 왔다갔다하면서 말입니다. 이를테면, 변절자였던 셈이지요. 남부가 전쟁에서 패배할 조짐이 보이자, 그분은 북부로 건너가 북군 편에서 싸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지요. 아버지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취한 이러한 행동에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그때 아버지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내게 도덕적인 색채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진짜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지요. 이를테면, 숲속을 여기저기 방황하고 다닌 이야기, 그리고 말을 타고 철길을 달리면서 황소들을 감시해야 했던 이야기같은 것을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고,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귀기울이길 좋아했습니다. 때때로 아버지는 자신이 읽고 있던 책으로부터 내게 무언가를 읽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주로 제인 그레이Zane Grey의 서부소설들이었지요. 국민학교 교과서와 성경을 제외하면, 이것들이 내가 그때까지 보았던 최초의 진짜 책들이었습니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나는 아버지가 저녁에 침대에 누워 제인 그레이의 작품들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좀처럼 사적인 생활이 허용되지 않았던 우리 집과 우리 가족에 있어선, 매우 사적인 행위였던 것처럼 보였지요. 점차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내부에 이러한 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내가 이해하거나 알진 못하지만, 그러나 때때로 그와같은 독서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그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측면에 그리고 이러한 행위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가 읽고 있는 것을 내게 읽어달라고 조르곤 했지요. 그러면 아버지는 아무 데나 그 순간 자신이 읽고 있던 부분을 읽어줌으로써 내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시후 아버지는 "얘야, 이젠 가서 다른 걸 좀 하려므나"라고 말하곤 했지요. 물론, 다른 것도 할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샛강으로 낚시질을 하러 가곤 했었지요. 그리고 고지에 살고 있는 사냥감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낚시와 사냥 그 당시 나를 자극시킨 건 이 두가지였습니다. 바로 이 두가지가 내 감정의 영역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 놓았으며, 그리고 내가 그것들에 관해 작품을 쓰길 원했던 것들이었지요. 그 당시 내가 즐겨 읽었던 것은 , 가끔씩 읽곤 했던 역사 소설 또는 미키 스필레인Mickey Spilane의 미스테리 작품들을 제외하면 <들판에서의 스포츠Sports Afield>와 <야외 생활Outdoor Life> 그리고 <들판과 개울Field & Stream>같은 책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놓친 물고기 또는 잡은 물고기에 대해 좀 길다란 이야기를 썼고, 어머니에게 그것을 타이프로 쳐달라고 부탁했지요. 어머니는 원래 타이프를 전혀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꺼이 타자기를 빌려 오셨고, 나와 함께 엉망진창이나마 그럭저럭 그 이야기를 타이프로 쳐서 발송할 수 있었습니다. 야외생활 전문잡지의 발행인 난에 두개의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 우리는 그 이야기를 우리 집과 가장 가까웠던 콜로라도 주의 보울더에 있는 사무실로 보냈지요. 결국 그 원고는 다시 우리에게 반송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원고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으며, 따라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어머니 이외의 누군가에게 읽혀졌을 테니까요. 그 일이 있고 난 얼마 후, 나는 우연히 <작가 개요>에 실린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성공한 작가의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은 분명하게 <팔머 작가수련 협회>라 불리우는 단체의 우수성을 입증해주고 있었지요. 순간 바로 이것이 내게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선 회원이 매달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면, 매주 일정한 과제를 할당해준 후 그에 대한 개인적인 논평을 보내주었지요. 나는 몇달동안 열심히 이 일에 매달렸지만, 아마도 지겨웠던 탓인지 곧 그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당연히 부모님도 회비의 지불을 멈추었지요.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팔머 작가수련 협회>로부터 만약 내가 남은 회비를 전부 지불한다면 내게 수료증을 보내주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이 제안은 썩 괜찮아 보였습니다. 어쨌든 나는 부모님께 나머지 회비를 지불해줄 것을 요청했고, 얼마 후 수료증을 받아 그것을 내침실 벽 위에 걸어 놓았지요.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 내내 졸업한 다음 당연히 제재소에 가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가 하는 일과 똑같은 종류의 일을 하길 원했었고, 더구나 아버지는 내가 졸업한 후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이미 십장에게 요청해놓고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졸업 후 약 6개월 정도 나는 제재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제재소 일이 싫었습니다. 작업 첫날부터, 나는 나머지 일생동안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차 한대와 옷가지 몇벌을 살 돈을 저축할 만큼만 일을 한 후, 제재소에서 나와 결혼을 했습니다.
대담자: 어쨌든, 어떤 이유에서건, 당신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당신이 대학에 가길 원했던 사람은 당신의 아내였나요? 그녀가 이 일에 있어 당신을 격려한 사람이었습니까? 다시말해, 그녀 자신이 대학에 가길 원했고,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도록 만들었나요? 그 당시 당신의 나이는 얼마나 됐었습니까? 틀림없이 부인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어린 나이였을 것 같은데요.
카버: 그 당시 난 열여덟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열여섯 살이었고, 임신해 있는 상태였지요. 그녀는 워싱턴의 왈라왈라에 있는 성공회 계통의 사립 여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녀는 찻잔을 올바로 잡는 법을 배웠고, 종교적인 교훈을 습득했지요. 그러나, 또한 그녀는 물리학과 문학 그리고 라틴어도 배웠습니다. 나는 그녀가 라틴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 당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결혼했던 첫해 동안 대학에 가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지요.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요. 그것은 우리가 내내 무일푼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요. 그녀 집안도 별로 풍족한 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못마땅해했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래 아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구비를 받아 워싱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만 내가 그녀를 임신시켜 버리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우리는 결혼했고, 우리의 생활을 함께 시작했습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일곱이었고, 다음 해에 다시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우리는 이미 젊음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했던 부모의 역할을 맡아서 해야만 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마 그 이상이었을 거라고 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내는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으니까요. 우리가 결혼한지 십이년인가 십사년 만에 비로소 아내는 샌 호세 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대담자: 이 초기의 어려운 시절에도 당신은 글을 썼었나요?
카버: 난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우리는 늘 일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을 기르고 가계를 꾸려나가고자 열심히 일했습니다. 처음 몇년동안 그녀는 전화회사에서 근무했는데, 그녀가 근무하는 낮시간 동안 아이들은 파출부에게 맡겨졌지요. 마침내 나는 훔볼트 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게 되었고, 그러자 우린 차에 짐을 전부 꾸겨놓고 아이오아 시티로 갔습니다. 훔볼트 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닠 데이 교수가 내게 <아이오아 작가 워크샵>에 대해 말해줬기 때문이었지요. 데이 교수가 내 단편 하나와 시 서너편을 아이오아의 돈 저스티스 씨에게 보낸 적이 있었는데, 저스티스 씨로부터 내가 아이오아에 오면 책임지고 오백달러의 보조금을 받게 해주겠다는 연락이 왔었거든요.
대담자: 오백달러요?
카버: 오백 달러가 <아이오아 작가 워크샵>이 갖고 있던 보조금 전부였습니다. 그 당시의 내겐 그 정도의 금액도 많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 다음 해에도 계속 머물러 있는다는 조건으로 더 많은 액수의 돈을 제시했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시간당 일달러 내지 이달러를 받으면서 도서관에서 일했고, 아내는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학위를 받자면 앞으로도 일년이 더 걸릴 듯 싶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생활을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캘리포니아로 되돌아 갔습니다. 이번에 정착한 곳은 세크라멘트 였습니다. 나는 머시 병원에 야간 수위로 취직해서 삼년동안 근무했지요. 그것은 꽤 좋은 일자리였습니다. 야간에 두 세시간만 일을 하면, 주간의 여덟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일정한 양의 일을 반드시 끝마쳐야 했지만, 그러나 일단 작업량을 완료하고 나면 그때부턴 자유였습니다. 집에 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도 있었지요. 처음 일 이년 동안은 매일 저녁 집으로 가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글을 썼지요. 아이들은 파출부에게 맡겨져 있었고 아내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낮시간 전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동안은 이러한 상태로 잘 나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일이 끝난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술을 마시는 버릇이 생겼지요. 이때가 아마 967년인가 68년이었을 것입니다.
대담자:당신의 작품이 맨처음 출판된 것은 언제였나요?
카버: 내가 훔볼트 대학에 재학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날 나는 한 잡지사로부터 내 단편소설 한편이, 그리고 다른 잡지사로부터 시 한편이 실리게 되리라는 소식을 받았지요. 그날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아마 내 생애의 최고의 날이었을 겁니다. 아내와 나는 온 시내를 휩쓸고 돌아다니면서 그 편지를 모든 친구들에게 보여주었지요. 그 사건은 우리의 삶에 우리가 대단히 필요로 했던 신념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대담자: 출판된 첫번째 단편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리고, 첫번째 시는 ?
카버: 그것은 <목가Pastoral>라는 단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웨스턴 휴매니스트 리뷰 Western Humanities Review>>에 실렸지요. 그 잡지는 당시에 꽤 좋은 문학잡지였으며, 지금도 유타 대학 출판부에서 여전히 발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원고료를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그런건 그때 전혀 문제가 안됐었습니다. 첫번째 출판된 시는 <놋쇠 반지The Brass Ring>라는 제목으로, 그것은 오늘날엔 폐간되고 말았지만 그 당시 아리조나에서 간행되었던 <<표적Targets>>이라는 잡지에 실렸습니다. 찰스 부코우스키Charles Bukowski의 시 한편도 그때 함께 게재되었는데, 나는 그와 똑같은 잡지에 나의 시가 실렸다는 사실에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그는 나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거든요.
대담자: 당신의 한 친구에 의하면, 당신이 그 잡지를 잠자리에 갖고 가서 소중하게 안고 잤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카버: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잡지가 아니라 일년에 한번씩 그 해의 뛰어난 단편소설들을 선별하여 수록한<<미국 우수 단편소설집>>입니다. 그 단편집에 실린 내 작품은 <제발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였습니다. 60년대 후반 당시에 이 책은 주로 마사 폴리Martha Foley가 편집을 맡고 있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 책을 흔히 <폴리의 모음집The Foley Collection>이라고 불렀지요. 여기에 실린 내 단편은 원래<십이월December>이라는 제목으로,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한 자그마한 잡지에 게재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미국 우수 단편 소설집>>이 우편으로 배달되었던 날, 나는 내 작품을 다시 한번 읽어볼 요량으로 그 책을 갖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여러분도 능히 짐작하시겠지만, 사실 난 너무 흥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 책을 읽기보다는 그저 쳐다보고 만져보고 또 쳐다보고 만져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고, 그 다음날 아침 나는 아내와 그리고 그 책과 함께 눈을 떴지요.
대담자: <<뉴욕 타임스 북 리뷰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에 실린 기사에서 당신이 장편소설 대신 단편소설을 택한 이유를 말해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여기서 털어놓기에는 너무 지루한"이야기라고 말했었는데 오늘 그 이유에 관해 좀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버: 그 이유는 이야기하기에 별로 유쾌하지 못한 많은 일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중 몇가지를 내가 <불꽃>이라는 에세이에서 털어놓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 책에서 나는 작가란 자신이 쓴 작품에 의해 평가받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창작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다른, 이를테면 비문학적인 성질을 띠고 있지요. 나에게 작가가 되라고 권유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갖가지 공과금을 납부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다른 한편으론 나 자신을 작가로 간주하면서 글쓰는 법을 차분히 배워야 한다는 것은 내게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몇년동안 별별 궂은 잡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작품을 쓰고자 애쓰면서, 나는 마침내 나에겐 빠른 시간안에 완성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작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내게 있어선 하나의 주제에 이삼년을 투자해야 하는 장편소설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와 단편소설에 매달렸습니다. 쓰고 싶은 좌절과 절망의 이야기는 항상 수레 한대분 만큼이나 쌓여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쓰기 위한 시간과 장소를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요. 나는 집밖에 주차된 차 속에 앉아 무릎 위에 받침대를 놓고, 그 위에 무언가를 써보고자 애쓰곤 했습니다. 이때 벌써 아이들은 열두어살쯤 되어 있었고 내 나이도 삼십줄에 들어서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뒷편에 파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매우 궁핍한 상태를 못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몇년동안 열심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는 낡은 차 한대와 전세로 살고 있는 작은 집 한 채, 그리고 새로 생긴 채권자들의 행렬만이 늘어서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정말 암담한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정신적으로 내 자신의 존재가 거의 소멸되어버린 듯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지요.그래서 나는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수건을 던져 항복을 표시하고, 대부분 술마시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털어놓기에는 너무 지루한" 일들에 대해 말을 해야 될 때 밝히는 이야기 중의 일부입니다.
대담자: 술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알콜 중독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작가들 중에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입니다.
카버: 아마 다른 전문적 분야의 종사자들보다 작가들이 특별히 술을 더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닐 겁니다. 물론 술에 따라다니는 신화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속으로 결코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빠졌던 건 술 그 자체였었죠. 내가 술을 심하게 마시기 시작한 것은 나 자신과 나의 창작과 나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원했던 것들이 성취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이후였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처음부터 파산자나 알콜중독자, 또는 사기꾼이나 도둑 아니면 거짓말쟁이가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자신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결국 실제로는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니까 말입니다.
대담자: 당신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말씀인가요?
카버: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엔 그랬습니다. 아니, 사실 지금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때때로 거짓말을 조금씩 하긴 하지요.
대담자: 술을 끊은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카버: 1977년 6월 2일부터입니다. 평생을 통해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술을 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알콜중독자였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테지만, 그러나 더 이상 다시 알콜에 중독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담자: 알콜중독은 어떤 점에서 얼마만큼이나 나쁜 영향을 끼치나요?
카버: 그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가지를 더 첨가하자면, 그것은 알콜중독이 심해지면 자신에게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구체적인 것들을 예로 들으라 한다면, 경찰과 비상 응급실과 법정 같은 것이 자신의 가까이에 있게 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대담자: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술을 끊게 되었습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나요?
카버: 내가 술을 마셨던 마지막 해인 1977년에, 나는 한번 병원 신세를 졌을 뿐만 아니라 두번 요양센터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샌 호세 근처에 있는 <디위트>라는 곳에서 며칠을 보냈지요. <디위트>는 정신이상 범죄자들을 위한 특별병원이었는데, 1970년대 후반 나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불랙아웃>상태로서, 말하자면 일정한 시간동안 자신이 말했거나, 행동한 것을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보통 사람처럼 차를 몰거나 수업을 하거나 어떤 사람과 함께 잠자리에 들 수도 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는 겁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자동 조종장치와도 같이 되어버리는 거죠. 심지어 알콜에 중독된나머지 이층에서 떨어져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순간에도, 한 손에 위스키 잔을 든 채 거실에 앉아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미친 짓이었지요! 이주일 후에 나는 요양센터로 되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의칼리스토가에 있는 <두피 요양소>라는 곳이었죠. 이런 식으로 나는 거의 일년 열두달 전부를 병원과 요양소 사이를 전전하며 보냈지요.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는 그 당시 죽음의 가장자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대담자: 당신으로 하여금 영원히 술을 끊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카버: 아마 1977년 5월 하순이었을 겁니다. 당시 나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샌프란시스코에 가야할 일이 생겼는데, 왜냐하면 맥그로힐에서 편집장으로 있던 프레드 힐스Fred Hills가 내게 장편소설을 쓸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연락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점심 식사 약속이 있기 전의 이틀동안 친구가 개최했던 파티에 참석해서 무리한 탓으로 엉망진창인 상태였습니다. 파티가 진행되는 도중에 포도주 한잔을 마셨는데, 그 순간 그만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일이 발생했었으니까요. 글자 그대로 <블랙아웃>상태에 빠졌던 거지요. 그러고도, 다음 날 아침 상점들이 문을 열었을 때나는 술을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의 파티는 더욱 꼴불견이었지요. 사람들이 서로 소리를 지르며 다퉜고, 제멋대로 식탁을 떠나 파티를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술에 취해 이틀밤을 지새고 난 상태로, 나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프레드 힐스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차를 몰아야 했었던 겁니다. 그 당시 나는 매우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머리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힐스를 차에 태우기 전에 다시 보드카를 마셨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힐스도 나와 함께 마셨습니다. 그는 사우살리토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길 원했는데, 교통정체가 매우 심해서 거기에 가는데만 꼬박 1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 둘다 차안에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차를 몰았던 거지요.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건, 여하튼 그는 내게 한편의 장편소설을 쓸 자금을 대여해 주었습니다.
대담자: 당신은 그 소설을 썼습니까?
카버: 아직 쓰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가까스로 샌프란시스코를 빠져나와 내가 살고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계속해서 하도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나는 집에 와서도 이주일 이상을 취한 상태로 있었지요. 그런 다음 겨우 술이 깨었는데, 그때의 기분은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나빴습니다. 그러나, 난 그날 아침 아무 것도 마시지 않고, 즉 술을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참았습니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괴로웠지만, 나는 삼일동안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삼일째가 되니까 비로소 조금씩 몸이 괜찮아지기 시작하더군요. 나는 계속 버텼습니다. 차츰 나는 술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상태로 일주일 그리고 이주일이 지났지요. 그럭저럭,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내가 한달 동안이나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때는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었지요. 그러나, 비록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내 몸이 차츰 좋아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담자: 그 당시 AA(음주 단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됐었습니까?
카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술을 끊기로 작정한 처음 한달동안, 나는 하루에 최소한 한번씩 그리고 때로는 두번씩 AA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대담자: 혹시 알콜이 어떤 식으로든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까?<<에스콰이어>>誌에 실린 당신의 <보드카Vodka>라는 시가 생각나서 해보는 말입니다.
카버: 전혀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 점을 분명히 했으면 싶은데요. 치버Cheever는 언젠가 자신이 어느 누구의 작품에서건 어떤 부분이 알콜의 힘을 빌어 쓴 것인지를 항상 가려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통해 그가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단언할 순 없지만, 그러나 대강의 뜻만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치버와 나는 1973년 가을 학기에 함께<아이오아 작가 워크샾>에서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술만 마셨습니다. 수업은 그냥 되는대로 대강대강 넘어가고, 우리는 캠퍼스 안에 있던 <아이오아 하우스>라는 호텔에서 온종일 빈둥거리며 보냈지요. 아마 우리는 둘다 타자기의 덮개조차 한번도 벗겨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했던 일이라곤 내 차를 타고 일주일에 두번씩 규칙적으로 상점에 갔던 것이 전부였지요.
대담자: 그건 술을 사기 위해서 였나요?
카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곳 상점들은 아침 열시가 되어야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열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지요. 나는 담배를 필 양으로 약속시간보다 좀 일찍 내려왔는데, 그때 치버는 이미 로비를 왔다갔다하고 있었습니다.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실내화차림으로 말이에요. 어쨌든, 우리는 좀 일찍 호텔을 나섰습니다. 상점가에 도착해보니, 그때서야 겨우 점원이 문을 열고 있더군요. 치버는 내가 제대로 차를 주차시키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갔으며, 내가 상점안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반 갈론의 스카치를 가지고 계산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치버와 나는 같은 호텔의 사층과 이층에 각각 묵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방은 구조가 매우 흡사했는데, 심지어는 벽에 걸려 있는 장식까지 동일한 그린의 복사본이었지요. 그러나 함께 술을 마실 때는 치버가 이층으로 내려오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항상 치버의 방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거의 매일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다시피, 아이오아 시티를 떠난 후 얼마되지 않아 치버는 치료센터에서 술을 끊게 되었고, 그 후로는 항상 맑은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담자:당신은 AA모임에서 사람들이 고백한 내용들이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십니까?
카버:AA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모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일어선 자세로 약 50분 가량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비교하여 자기고백을 하는 모임이 잇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참석한 사람들 전부가 말할 기회를 갖는 모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든, 내가 그 모임들에 참석하여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본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담자: 그럼, 당신의 이야기들은 주로 어디에서 나오나요? 이 질문은 당신의 작품들 중에서 술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몇편 생각나서 드리는 겁니다.
카버: 내가 관심을 갖고 잇는 픽션은 현실세계와 관련을 갖고 있는 겁니다. 물론, 내가 쓴 이야기들 중의 그 어느것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내가 들었던 또는 내가 목격했던 무엇인가가 항상 출발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언젠가 나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그것이 우리 때문에 당신이 망쳐버릴 마지막 크리스마스예요."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훨씬 나중에, 내가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을 때, 나는 상상력을 가동시켜 그 말과 부합되면서 실제로 일어났음직한 여러가지 사건들을 꾸미고 배합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지한 이야기A Serious Talk>라는 작품이 나오게 된 과정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픽션은, 그것이 톨스토이의 작품이건 체홉의 작품이건 리처드 포드의 작품이건 헤밍웨이의 작품이건간에, 어느 정도 자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최소한 작가의 현실적인 경험세계에 근거해 있는 픽션입니다.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장편이냐 단편이냐에 상관없이, 현실세계를 떠나서는 생성될 수 없는 법이거든요.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치버와 함께 참석했던 어떤 좌담회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우리는 그 당시 아이오아 시티에서 다른 몇몇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했었는데, 그때 치버가 지나가는 말로 어느날 밤 자기집에서벌어졌던 일화 한토막을 얘기했습니다. 전날밤 부인과 다투고 난 후,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보니 화장실 거울 위에 딸 아이가 "아빠, 제발 우리 곁을 떠나지 말아요"라고 써놓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더니,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들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그 일은 당신의 작품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자, 치버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아마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쓴 작품은 모두 자서전적이니까요." 물론 치버의 말이 액면 그대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쓴 모든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건 자서전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지요. 이것이 바로 내가 자서전적 픽션에 대해 꺼림찍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입니다.<알렉산드리아 사중주 The Alexandria Quartet>에서 우리는 작가인 로렌스 더렐Lawrence Durrel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고, 닉 애담스Nick Adams이야기를 통해서는 헤밍웨이의 많은 부분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요근래에 철저하게 자서전적인 픽션을 쓰고 있는 작가로는 아마 클라크 블레이스Clark Blaise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픽션으로 꾸밀 때, 작가가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러한 작업을 시도하는 작가는 태도가 대담해야 하며 기술적으로 능숙해야 하고 상상력 또한 풍부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철저할 정도로 정직해야 합니다. 자서전적인 소설을 쓰기에는 우리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들 자신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우리가 더 잘 알수 있는 것이 과연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론, 특별한 종류의 작가 즉 매우 재능있는 작가가 아니라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여러 편의 작품을 쓰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위험, 또는 최소한 커다란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픽션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자서전적이 되기 쉬우니까요. 내 생각에는 약간의 자서전적 요소와 풍부한 상상력이 결합될 때, 가장 좋은 작품이 나올듯 싶습니다.
대담자: 당신의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자 시도하는 편인가요?
카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도한다는 것과 성공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입니다. 살다보면, 그들이 하는 일에서 항상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 속으로 찬탄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고자 시도하는 일에서, 그것이 굉장하건 보잘 것 없든 간에, 여하튼 그들이 가장 하기를 원했던 일에서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내 경험의 대부분이 ,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작품에 나오는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행동이 뭔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길 바라지만, 그러나 결국 그들은-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행동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때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조차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일들이 나중에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종종 있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똑바르게 만들어 놓길 원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며, 또한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할 수 있게 되지요.
대담자: 최근에 발표된 당신의 단편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인<왜 당신은 춤을 추지 않습니까?Why Don't You Dance?>에 대해 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착상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카버:1970년대 중반에 미수라에 살고 있는 몇몇 친한 작가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빙 둘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린다Linda라는 여급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날 밤 그녀는 남자친구와 술울 마신 뒤에, 불현듯 침실에 있는 가구들을 모두 뒷마당으로 옮길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그들은 카페트, 침대용 램프, 그리고 책상 등을 전부 옮겼다는 거예요. 그 당시 그곳에는 다섯명 정도가 둘러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누구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볼 사람이 있어?" 그때 모여있던 사람들 중 나 이외에도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 사람이 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 들었던 이야기를 단편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지로 그렇게 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지요. 아마 약 사,오년쯤 지나서 였을 겁니다. 물론 나는 내가 들었던 이야기에 다른 요소들을 가미시켜 약간 변형을 시켰지요. 흥미로운 것은, 그 단편이 내가 술을 끊은 후에 썼던 최초의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담자: 당신이 글을 쓸 때의 습관은 어떤지요?
카버: 일단 펜을 들면 매일 작업을 합니다. 그럴 때면, 정말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시간이 물흐르듯이 지나가기 때문에, 간혹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모를 경우가 있습니다. 존 애쉬베리John Ashbery의 표현을 빌면, "기선의 외륜과도 같은 날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지금처럼 글을 쓰지 않고 있을 때나 아니면 지난 얼마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강의에 매달려 있어야 할 때에는, 내가 평생 글이라고는 단 한줄도 쓰지 않았거나 또는 쓰고 싶은 욕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종종 나쁜 습관에 빠지지요. 밤 늦게까지 빈둥대다가 늦잠자기 일쑤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차츰 인내심을 배웠고, 이제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내 경우엔 좀 더 일찍 인내심을 배웠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만약 내가 별자리를 믿는다면, 나는 내 별자리가 거북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발작적으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거든요. 일단 쓰기 시작하면, 나는 한번에 열시간 이상씩 책상에 앉아 있곤 합니다.그것도 며칠을 계속해서 말입니다. 나는 그러한 시간들을 사랑합니다. 내 작업시간의 대부분은 이미 쓴 이야기를 고치고 다시 쓰는 데 사용되는 편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내 곁에 둔 채 여러 번 거듭해서 고친 이야기를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작품을 쓴 후에 곧바로 출판하려고 서두르는 성격이 아닙니다. 때때로 나는 초고를 놓고 이렇게 저렇게 첨가했다 생략했다 하면서, 몇달동안 계속 간직하고 있는 적도 있습니다. 내 경우에, 초고를 완성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대개는 앉은 자리에서 끝내버리지요. 그러나, 초고를 가지고 여러번 수정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스무번 내지는 서른번까지 고친 적도 많으니까요. 아무리 적어도 열번 이상은 다시 봅니다. 이런 점에서, 위대한 작가들의 여러번 교정된 초고는 내게 교훈을 줌과 동시에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여러번 고쳐쓰기 좋아했던 작가로는 특히 톨스토이를 들 수 있는데, 그의 교정용 원고를 찍은 사진들은 정말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톨스토이가 고쳐쓰기를 마음 속으로 좋아했는지의 여부는 잘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는 무척이나 많이 고쳐 썼습니다. 심지어는 조판과정에서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 문구가 있으면 서슴지않고 손을 댔으니까요. 그는 매우 철저했던 작가로,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만 하더라도 여덟번이나 고쳐 썼습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사례는 나처럼 초고가 엉망진창인 모든 작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대담자: 작품쓰는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카버: 아까 말했던 것처럼, 초고는 매우 신속하게 쓰는 편입니다.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우선 페이지 수를 채웁니다.대부분은 보통의 필기방식을 이용하는데, 때로는 나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속기로 노트를 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살펴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몇몇 장면들은 대충 적어놓거나 아니면 아예 쓰지 않은 채 남겨두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두세번 수정할 때까지도 그대로 남겨놓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장면들을 올바로 처리하자면 초고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초고를 쓸때에는 작품의 윤곽을 대강 잡아두고, 그런 다음 몇번씩 고쳐가면서 나머지 세세한 부분을 완성하는 방법을 택하지요. 이와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는 일단 그때까지 완성된 작품을 타이프로 칩니다. 타이프로 치게 되면, 대개 원래 손으로 썼던 원고와는 뭔가 다른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타이프로 치는 도중에 부분부분 첨가하거나 생략하는 과정을 되풀이하지요. 그러나 진짜 작업은 이와같은 방식으로 최소한 서너번 이상 초고를 수정하고 난 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시의 경우에는 사십번 내지는 오십번 정도 거듭 손을 봅니다. 도날드 홀Donald Hall같은 사람은 자신의 시를 백번 정도 손본다고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약과인 셈이지요.
대담자: 그 이후 당신의 작품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카버:<사랑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에 실린 이야기들은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책은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의 진행이 대단히 의도적이며 치밀하게 계산되었다는 의미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자의식적인 작품입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한권의 책으로 완성되기 전에, 이전의 어떤 다른 이야기들보다 더 여러번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한권으로 묶어져 출판업자의 손에 넘어가자, 나는 육개월동안 전혀 아무것도 쓸 수가 없을 정도였지요. 그러한 휴지기를 거쳐 쓴 첫번째 이야기가 바로 <대성당>인데, 나는 이작품 또한 여러가지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대단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내 글쓰는 방식에 뿐만 아니라 내 생활방식에 일어난 변화를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방향과 반대가 되는 방향을 택했고, 가능한 한 멀리까지 그 새로운 방향을 탐색했습니다. 모든 것을 과감하게 잘라내 버림으로써, 단순히 살을 도려내고 뼈만 남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뼈의 심장 속까지 파헤쳐 들어가고자 했던 거지요.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면, 가파른 벼랑끝에 다다르게 되는 그런 지점까지 말입니다.이 책을 평하면서 누군가 나를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로서 분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일종의 찬사로 그런 용어를 사용했겠지만, 그러나 나는<미니멀리스트>라는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용어에는 암암리에 작가의 비젼과 솜씨가 규모면에서는 작다는 냄새를 풍기는 면이 있거든요. 그러나 <대성당>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 새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십팔개월이라는 기간에 쓰여졌으며, 내가 이해하는 <미니멀리스>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면을 갖고 있습니다.
대담자: 독자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업다아크Updike 같은 작가는 자신의 이상적인 독자를 중서부의 작은 마을에 살면서 책꽂이에 자신의 책 한권쯤 갖고 있는 어린 소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카버: 업다이크의 이상화된 독자를 생각하면 즐거운 기분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초기의 단편들을 제외한다면, 업다이크의 작품을 읽는 사람이 중서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센타우르스The Centaur>,<커플들Couples>,<달려라, 토끼Rabbit, Run> 또는 <반란 The Coup>같은 소설들을 이 어린 소년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잇겠습니까? 나는 업다이크가 치버에 의해 상정된 독자와 똑같은 종류의 독자, 즉 어디에 살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지적이고 성숙한 남녀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작가라면 누구든지 자신이 쓸 수 있는 만큼 잘 그리고 진실되게 작품을 쓰며, 따라서 가능한 한 인식력을 갖춘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읽어주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자면, 작가들은 일정한 한도내에선 다른 작가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그들의 작품을 즐겨 읽는 현재의 작가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들에 찬탄을 보내는 과거의 작가들을 다 포함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다른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다른 "지적이고 성숙한 남녀들"도 그 작품을 좋아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지로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는, 업다이크가 말하는 소년이나 또는 어떤 다른 독자의 모습도 의식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담자: 작품이 완성될 단계에 이르면, 당신은 처음에 썼던 분량 중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생략되는 편인가요?
카버: 많은 부분을 없애게 됩니다. 만약 어떤 작품의 초고가 사십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라면, 내가 마무리할 쯤 되면 대개 절반 정도의 분량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무작정 초고의 내용을 삭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집어넣으면서 작품의 길이를 줄여나갑니다. 이렇게 단어를 집어넣었다 빼내었다 하는 것을 난 즐기는 편입니다.
대담자: 그렇게 여러번 교정을 하시는 것은 당신의 이야기들이 단편으로서는 좀 길고 너무 풍성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가요?
카버: 풍성하기 때문이냐고요? 그렇습니다. 정말 아주 적절한 표현을 해주신 것 같군요. 그러나 다른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타이피스트가 한명 있는데, 그녀는 오늘날 우주시대에 알맞는 타자기인 워드 프로세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저분하게 이것저것 표시되어 있는 원고를 넘겨주면, 그녀는 그것을 깨끗하게 타이프쳐서 나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면 다시 내게 돌아온 깨끗한 원고에 내가 하고 싶은 만큼 이것저것 표시를 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건네주면, 어김없이 다음날 저번과 똑같이 깨끗한 원고를 돌려받습니다. 그러면 또 나는 그 원고에 하고 싶은만큼 마음껏 표시를 하고, 그리고는 다시 다음날 깨끗하게 타이프쳐진 원고를 되돌려 받지요. 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매우 사랑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타이피스트와 그녀의 워드 프로세서가 말이에요.
대담자: 당신은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까?
카버: 일년정도 그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일년동안에 <제발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에 실린 이야기의 대부분을 썼습니다. 그때가 아마 1970년인가 71년이었을 겁니다.나는 팔로 알토에 있는 한 교과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지요. 그것은 세크라맨트의 병원에서 야간 수위로 근무했던 바로 직후의 일로서, 내가 얻는 첫번째 화이트칼라 직업이었습니다. 나는 편집자로서 묵묵히 일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회사가 전폭적인 임원개편의 결정을 내렸지요. 나는 그만둘 것을 작정하고 막 사직서를 쓰려는 찰나에 해고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서 작별파티를 열었지요. 일년동안 난 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먹고 살 만큼은 퇴직 수당을 받았거든요. 내 아내가 학위를 딴 것도 그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그때가 일종의 전환점이었던 셈이지요.
대담자: 당신은 종교적인 셈인가요?
카버: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기적과 부활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대해선 추호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낍니다. 그것이 내가 일찍 일어나기를 좋아하는 이유지요. 내게 술마시는 습관이 붙어 있었을 때에는, 대개 정오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곤 했었으며 일어나서도 오한에 시달릴 때가 많았습니다.
대담자: 당신은 과거에 잘못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는 편입니까?
카버: 후회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후회나 하고 있을 여유도 없습니다. 과거의 생활은 이제 먼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으며, 나는 그것이 사라져버린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살아야만 하니까요. 과거의 삶은 너무나 까마득히 멀어져 가서,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19세기 소설 속의 어떤 등장인물에게 일어났었던 일처럼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아마 난 과거를 추억하는 데 한달에 오분 이상을 투자한 적도 별로 없을 겁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에게는 과거가 낯선 나라, 즉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인 것처럼 생각되니까요. 나는 정말로 내가 두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 살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대담자: 문학적인 측면에서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몇사람 언급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카버: 우선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들 수 있겠습니다. 특히 그의 초기 단편들은 아주 좋습니다. <두개의 심장을 가진 거대한 강Big Two-Hearted River>,<빗 속의 고양이Cat in the Rain>,<삼일간의 도망The Three-Day Blow> 그리고<병사의 고향Soldier's Home>등을 손꼽을 수 있지요. 내가 가장 찬야하는 작가는 체홉인데, 그러나 사실 체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때 내가 좋아하는 체홉은 극작가로서의 체홉이 아니라 단편작가로서의 체홉입니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있지요. 그의 단편들과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를 난 즐겨읽는 편입니다.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행속도가 너무 완만하거든요. 그의 재능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은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ch>, <주인과 하인Master and Man>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많은 땅을 필요로 하는가How Much Land Does a Man Need?>입니다. 아이삭 바벨Isaac Babel,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프랑크 오코너Frank O'Connor같은 작가들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존 치버,<마담 보봐리Madame Bovary>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담 보봐리>같은 경우엔, 플로베르Flaubert가 그 작품을 집필하고 읽는 동안에 썼던 편지들이 수록된 새로운 번역판으로 작년에 다시 읽었습니다. 또한 콘래드Conrad, 업다이크의 <너무 멀어 갈 수 없는 곳Too Far to Go>도 좋은 작품입니다. 이밖에도, 작년과 재작년에 내가 우연히 발견한 뛰어난 작가들이 몇사람 있는데, 우선 토비야스 울프Tobias Wolff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북 아메리카 순교자들의 정원에서In the Garden of the North American Martyrs>라는 단편 소설집은 아주 탁월한 작품이지요. 맥스 쇼트Max Schott 그리고 보비 앤 메이슨Bobbie Ann Mason도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데, 가만 있자, 내가 아까 그녀를 벌써 언급했었던가요? 하여간 그녀는 두번씩 언급해도 괜찮을 정도로 훌륭한 작가입니다. 헤롤드 핀터Harold Pinter와 프리췌트V.S.Pritschett도 짚고 넘어가야 할 작가지요. 이중에서 나에게 가장 커다란 인상을 준 글은 몇년 전에 읽은 체홉의 한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는 체홉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다음과 같은 충고를 담고 있었습니다. "친구여, 자네는 비범한 위업을 성취한 비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써야 할 필요가 없다네." 그 당시 나는 대학에 재학하면서 왕자들과 귀족들 그리고 왕국의 전복 등을 다룬 희곡들이나 실제의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거대한 영웅들을 형상화하고자 했던 소설들을 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 체홉이 친구에게 제공한 충고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나는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각도를 달리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나는 막심 고르키Maxim Gorky의 희곡 하나와 단편 몇개를 읽었는데 막심고르키 또한 체홉이 말했던 것처럼 작품 속에서 똑같이 표현해주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좋은 작가로는 리챠드 포드를 들 수 있는데,그는 내 친구이기도 합니다. 원래 그는 소설가이지만, 단편과 수필도 좋은 작품을 여러편 썼지요.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중 몇몇은 리챠드 포드처럼 동시에 좋은 작가이기도 합니다.
대담자: 만약 친구들 중에서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발표한다면, 당신은 그런 경우엔 어떻게 합니까?
카버: 나는 그 친구가 나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지 않는 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심 그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어쩔 수 없이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우정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해야만 하겠지요. 당신 역시 당신의 친구들이 가능한 한 좋은 작품을 쓰길 원할테지만, 그러나 간혹 그들의 작품에 실망할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있어 모든 일이 잘 되어나가기를 소망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항상 자리잡고 있으며, 사실 그럴 경우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대담자: 도덕적 픽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십중팔구 존 가드너John Gardner와 당신에 대한 그의 영향이라는 문제로 확대되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예전에 훔볼트 주립대학에서 직접 그의 지도를 받은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카버: 그것은 사실입니다.나는 우리의 관계에 대한 글을 잡지에 한번 기고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소설가가 되는 것에 관하여On Becoming a Novelist>라는 가드너의 유고 작품에 게재된 나의 서문은 바로 그 글을 좀더 자세하게 고쳐쓴 것입니다. 나는 그의 <도덕적 픽션에 관하여On Moral Fiction>를 매우 탁월한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책에서 제시된 모든 내용에 다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주장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내가 동의하는 것은 물론 현존하는 작가들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평가라기 보다는 그 책이 전체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도덕적 픽션에 관하여>는 삶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취급하려 하지 않고 삶의 긍정하고자 한 작품입니다. 도덕성에 대한 가드너의 개념 정의는 삶에 대한 긍정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가 좋은 픽션이 도덕적 픽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지요. 그것은, 만약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한번쯤 논의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어쨌든, 뛰어난 작품이니까요. 그러나 나는 가드너가 <소설가가 되는 것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자신의 주장을 훨씬 더 잘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 책에서는 그가 <도덕적 픽션에 관하여>에서 했던 것처럼, 다른 작가들을 추종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가 <도덕적 픽션에 관하여>를 출판한 이래로 몇년동안 우리가 서로 접촉한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의 영향, 즉 내가 학생이었을 때 그가 나의 삶에 불어넣어 주었던 것들은 여전히 매우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나는 오랫동안 그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요 몇년동안 써왔던 것이 혹시 비도덕적인 것으로 판명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지요.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거의 이십년 가까이 서로를 보지 못했으며, 내가 시라큐스로 이사하고 가드너가 70마일 정도 떨어진 빙햄턴에 정착한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우정을 다시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이 출판되었을 때, 그 책뿐만 아니라 가드너에 대해 많은 분노의 화살이 퍼부어졌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 책은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렸으니까요. 여하튼, 그 책이 탁월한 저서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대담자: 그 책을 읽은 후에, 당신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자신이 "도덕적"인 이야기를 썼다고 여기셨나요, 아니면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썼다고 여기셨나요?
카버: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을 갖고 잇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가드너 자신으로부터 그가 내 작품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히, 내가 최근에 발표한 작품들을 말입니다. 그 말은 나를 매우 기쁘게 했습니다. <소설가가 되는 것에 관하여>를 한번 읽어 보십시오.
대담자: 지금도 여전히 시를 쓰시고 있습니까?
카버: 충분치는 않지만, 가끔가다 몇편씩 쓰는 편입니다. 더 많은 시를 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만약 시를 한편도 쓰지 못한 채 너무 오랜 시간, 예를 들어 육개월 가량이 지나가면, 나는 신경질적이 되어버립니다. 혹시나 내가 시인이 되는 것을 그만두지나 않았을까 또는 이젠 시를 쓰지 못하게 된거나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나는 내년 봄에 출판하게 될 작품집<불꽃>에 내가 지금까지 썼던 시중에서 남겨두고 싶은 작품들을 골라 수록할 계획입니다.
대담자: 픽션을 쓰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나요?
카버: 그 두가지는 내게 있어 더 이상 대등한 관계에서 영향을 끼치진 않습니다. 과거 오랫동안 나는 시를 쓰는 것과 픽션을 쓰는 것에 동등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잡지를 볼 때면, 으례이 소설을 읽기 전에 먼저 시를 훑어보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두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햇고, 결국 픽션 쪽을 택했습니다. 나에게는 올바른 선택이었지요. 나는 "타고난" 시인은 못되거든요. 내가 "타고난"것이 있다면, 내가 미국 백인 남성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나에게 시는 부수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이에요. 가끔씩밖에 시인이 될 수 없는 것도 전혀 시인이 아닌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대담자: 명성이 당신을 바꾸어 놓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카버: 명성이라는 말은 불편한 느낌을 줍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애당초 별다른 기대를 갖지 않은 채 창작을 시작했었으니까요. 내 말은 단편 소설이나 끄적거려서는 요새 세상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리라고 내가 처음부터 생각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 때문에 나는 자기 존중 같은 것을 별반 갖고 있지 않았지요. 그래서, 오늘날 막상 많은 독자들로부터 이처럼 커다란 호응을 받고 보니, 끊임없는 놀라움만을 느낄 따름입니다. <사랑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이 좋은 반응을 얻은 이후로, 나는 그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확신을 갖게 되었지요. 그 작품을 기점으로 그 이후 일어난 모든 즐거운 일들이 나로 하여금 더 좋은 작품을 많이 쓰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내겐 좋은 자극이었습니다. 때마침 이러한 자극은 내가 내 인생을 통틀어 그 이전 어느 때보다 왕성항 창작력을 갖게 되었을 때 주어졌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들도 아시겠지요?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보다 강렬하고 보다 확실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명성- 아니, 이 새롭게 발견된 주목과 관심-은 나에게 좋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내가 확신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잇던 때에 나에게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으니까요.
대담자: 당신의 작품을 제일 먼저 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카버: 테스 갤러허입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그녀 스스로도 시인이자 단편작가이지요. 편지를 제외하고는 내가 썼던 모든 것을 난 그녀에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편지들조차 보여줄 때가 가끔 있지요. 그녀는 놀랄만한 감식력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작품을 쓰는 당시에 느꼈던 기분을 그녀 자신 속에 재창조해내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창작 중인 작품을 내 스스로 가능한만큼 충분히 점검할 때까지는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보통 네번째 내지는 다섯번째 원고가 되지요. 그러면, 그때부터 그녀가 그 이후 교정되는 내 원고를 전부 읽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세권의 책을 그녀에게 헌정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녀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표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나의 깊은 존경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준 도움과 영감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대담자: 고든 리쉬Gordon Lish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당신 작품의 편집자로서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아는데요.
카버: 고든 리쉬는 1970년대 초반 <에스콰이어>에 내가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작품의 편집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1967년인가 6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그는 내가 일했던 회사의 길 건너편에 있던 교과서 출판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지요. 나를 해고시켰던 바로 그 출판회사에서 말입니다. 그는 정상적인 근무시간에 얽매어 있지 않았습니다. 작업의 대부분을 집에서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정도 나를 자기 집의 점심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래놓고, 나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한 다음, 자신은 먹지도 않은 채 식당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지요. 여러분도 상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은 내 신경을 꽤 자극시켰습니다. 나는 항상 접시에다 음식을 조금씩 남기곤 했었는데, 그러면 항상 그가 그것을 깨끗이 먹어치우곤 했지요. 자기가 어렸을 때 그런 식으로 컸기 때문에 그런다나요.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 당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가면, 자기 몫으로는 음료수 한잔만 주문해 놓고 내가 먹다 남긴 음식을 깨끗이 해치웁니다. <러시안 티 룸>에 갔을 때도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저녁식사를 하러 네 사람이 갔었는데, 예전과 마찬가지로 세 사람 몫만 주문을 한 다음 그는 우리가 먹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접시에 음식을 남기자, 즉시 남은 음식을 혼자서 모조리 처리했지요. 대단히 우습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이런 괴상한 짓을 제외하면, 그는 원고 일에 있어선 모든 점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편집자이지요. 아마 위대한 편집자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나의 친구이자 편집자라는 사실이며, 그 사실에 나는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대담자: 영화대본 일을 더 하시는 것에 대해서 고려해보신 적이 있나요?
카버: 만약 내가 마이클 시미노Michael Cimino와 함께 끝마쳤던 도스토예프스키 Dostoyevsky의 생애같은 흥미로운 일거리가 있다면, 물론 더 해볼 생각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별로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틀림없이 해보고 싶을 것 입니다.
대담자: 거기에는 돈문제도 관련되어 있습니까?
카버: 그렇습니다.
대담자: 메르세데스를 구입하신 것과 관련이 있겠군요.
카버: 바로 맞히셨습니다.
대담자: <뉴욕커The New Yorker>는 어떻습니까? 당신이 처음 작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 당신의 작품을 보내신 적은 없었습니까?
카버: 예, 그런 적은 없습니다. 당시 나는 <뉴욕커>를 구독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내 작품들을 작은 잡지사에 보냈으며, 어쩌다 한번씩 그중 하나가 뽑히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무척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비록 내가 그들중 어느 누구와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나에게는 특정한 부류의 독자가 있었습니다.
대담자: 당신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카버: 편지와 테이프는 물론이거니와 때때로 사진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카세트를 보내준 사람도 있었는데, 거기엔 내 이야기들을 가지고 만든 노래가 실려 있었습니다.
대담자: 여기 동부와 워싱턴의 바깥쪽에 위치한 <웨스트 코스트> 두 곳 중에서 당신이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이 질문은 곧 당신의 작품에 있어서 특정한 지역의 의미가 얼마만한 중요성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되겠습니다.
카버: 한때는 나 자신을 어떤 특정한 지역의 작가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다시말해, 나에게 있어선 서부 출신의 작가가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많은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정신적으로 어떤 특정한 지역에 확고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만약 내가 내작품 속에서 의식적으로 어떤 특정한 지역과 시기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면, 특히 내 첫번째 작품에 해당되는 경우인데, 그 지역은 퍼시픽 노쓰웨스트The Pacific Northwest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지역에 대한 감각이 작품 속에 잘 구현된 작가로는 짐 웰치Jim Welch, 월러스 스테그너Wallace Stegner, 존 키블John Keeble, 월리암 이스트 레이크William Eastlake 그리고 월리암 키트렛지William Kittredge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다른 많은 작가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내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떤 특정한 지역을 무대로 해서 전개되진 않습니다. 내 작품 속에 제시되는 행동들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지요. 여기 시라큐스에서도, 또한 투손이나 세크라멘트, 샌 호세,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에서도, 또는 포트 앤젤레스나 워싱턴에서도 다 가능한 일들입니다.
대담자: 집에서 작업을 할 때 잘 사용하는 어떤 특별한 장소라도 있습니까?
카버: 예. 이층에 있는 내 서재를 잘 이용하는 편입니다. 역시 자신의 공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전화기 플러그를 빼어놓고 "방문객 사절"이라는 게시판을 걸어놓은 채로 여러 날이 지나가는 경우도 흔합니다. 과거 몇십년 동안 나는 주로 부엌 식탁이나 도서관 개인 열람실 또는 차 속에서 작업을 했었습니다. 나만이 소유하고 있는 이 방은 그때에 비하면 사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작업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입니다.
대담자: 여전히 사냥과 낚시를 즐기시는 편인가요?
카버: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워싱턴에 거주하고 있을 때면, 아직도 여름에 기끔씩 연어 낚시를 하러 가곤 합니다. 반면에, 사냥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나를 안내해서 데리고 가줄 누군가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해보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친구인 리챠드 포드는 사냥꾼입니다. 그가 1981년 봄에 작품 낭독회를 하기 위해 이곳에 있었을 때, 거기서 나온 수익금으로 내게 엽총 한자루를 사준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요! 그리고 그는 그 엽총에다`1981년 4월, 리챠드가 레이먼드에게'라고 서명까지 해주었지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리챠드는 사냥꾼입니다. 아마 그때 나를 격려해주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대담자: 당신은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얼마큼이나 바라고 계십니까? 당신의 이야기들이 누군가를 변화시킬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카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심오한 의미에서의 변화는 일으키진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결국, 예술은 일종의 오락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 둘다에게 있어서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예술이 당구를 치는 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 또는 보울링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면이 있긴 하지요. 예술은 보다 고급한 형태의 오락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정신적인 자양분이 있다고는 생가하지 않습니다. 물론, 있을 수도 있겠지요. 베에토벤의 음악을 듣거나 반 고호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 또는 블레이크Blake의 시를 읽는 것은 브릿지 게임이나 보울링에 의해선 전혀 얻을 수 없는 차원의 심오한 경험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또한 일종의 고급 오락이기도 합니다.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십대의 내게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이 기억나는 군요. 그 당시 나는 스트린트베르크Strindberg의 희곡과 막스 프리쉬Max Frisch의 소설 그리고 릴케Rilke의 시를 읽었고, 밤새도록 바르토크Bartok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으며, 텔레비젼에서 방영했던 시스틴 성당과 미켈란젤로에 대한 특별방송을 시청했으며, 이 각각의 경우에서 나는 내 인생이 바뀌어져야만 한다고 느꼈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경험들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뒤 곧 나는 내 인생이 결국 엄청나게 변화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결과, 나는 예술이란 시간이 있거나 여유가 있을 때 추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지요. 예술은 일종의 사치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 나는 예술이란 아무것도 실제로 일어나게 만들지 못한다는 확고한 깨달음에 이르렀던 거지요. 나는 단 한순간도 쉘리Shelley처럼 시인들을 `이 세계의 인정받지 못한 입법자'라고 일컫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입니까! 아이삭 디세넨Isak Denesen은 자신이 자신이 별다른 희망이나 절망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도 그렇습니다. 소설이나 희곡 또는 시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또는 심지어 그들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들을 바꾸어놓을 수 있었던 시대는, 설령 그런 시대가 과거에 실제로 있었다 할지라도, 이젠 지나갔습니다. 물론, 특정한 종류의 삶을 살고 있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 관해 픽션을 쓰는 것이 삶의 어떤 양상들을 이전보다 조금 더 잘 이해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내 경우에 있어선, 이와같은 소박한 기대가 내 작품의 영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시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테스는 그녀의 시를 읽은 독자들로부터 수없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그녀의 시가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던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다고 쓴 사람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픽션과는 다른 경우입니다. 좋은 픽션은 부분적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소식을 전달해주는 일종의 매개체와 같으며,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픽션을 통해서 사태를 변화시킨다는 것, 고래나 삼나무의 생명을 구한다는 것 등은 다 부질없는 소리입니다. 만약 당신이 의미하는 변화가 이런 것들이라면,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나는 픽션이 반드시 이러한 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픽션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취할 수 있는 즐거움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그 자체로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속적이면서 지속적인 무엇인가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뭔가 다른 종류의 즐거움말입니다.이러한 불꽃들을, 아무리 희미하다 할지라도 지속적이고 견실한 광채들을 던져주는 무엇인가를 읽음으로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