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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우리였던 이야기 2. 그날의 포옹

DidISay 2012. 11. 17. 03:06

 

 

지금도 아주 많은 나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빈틈이 없고

계획이 꽉 짜인 일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연이은 시험때조차 새벽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말끔한 모습으로 등교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정해진 식단에 정해진 운동을 했고,

일주일. 한달 단위의 크고 작은 일정들은

대부분 미리 정해져 있었다.

 

 

 

너와 만나기 전에는.

 

 

 

 

 

있잖아. 미리 고백하자면, 너의 첫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어

넌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보이고, 때론 너무나 거침없어 보였거든.

 

그래 그 당당함 속에서 얼핏 비치는 부드러운 모습들이 너와의 관계를 이어가게 해줬지만,

너와 내가 오래 사귈수 있을지. 혹은 사귀기 시작할지의 여부는

꽤 오랜 시간 곰곰히 고민할 정도로 의심스러웠지.

 

사실 우리가 우연히 거듭 마주쳤을 때, 그리고 네가 나에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을 때

난 너에게 이미 끌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때문에 넌 경계대상이었어.

몇차례 연애를 해왔지만 그렇게 멈칫할 정도로 강렬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그래. 너도 나도 그랬지.

 

 

 

 

난 말야. 어쩌면 무서웠을지도 몰라.

넌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너의 그 자신감이 때로는 날 두렵게 만들었거든.

 

언젠가 네가 난 왜 항상 그렇게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지

산책마저 미리 내 일정에 들어가야 맘 편하게 할 수 있는지

왜 휴일엔 그저 느긋하게 아무 생각 없이 쉬지 않는지 궁금해했었잖아.

 

그때는 그냥 "난 태어날 때부터 완벽주의자였나봐 " 라고 농담처럼 대답했지만,

사실 그것만은 아니었어.

 

 

 

 

내가 아직 어린 학생이었을 때. 아직 꿈을 꾸고 있었는데

엄마가 날 급하게 흔들어 깨웠어.

 

난 그날 개교기념일이라 전날 늦은 밤까지 아빠와 영화를 보면서 수다를 떨었고

그래서 그날의 늦잠은 너무나 당연한거였어.

그런데 엄마가 날 왜 이렇게 이른 아침에 깨우는건가

신경질을 막 낼락말락 하는데,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어.

 

안방으로 갔는데, 아빠는 움직이지 않았어.

그냥 가만히 누워계셔서, 혹시 주말이면 매번 그랬던 것처럼

또 장난을 치나 해서 아빠가 가장 간지러워하는 발을 만져봤는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

 

엄마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친척들의 쏟아지는 듯한 비명소리와 통곡.

나와 엄마는 마치 통속드라마처럼 몇차례 실신 했고,

그 다음엔 기진맥진한 상태로 장례식을 멍하게 지켜봤던 것 같아.

울음이 계속 되면, 눈물도 메말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

 

 

 

그 이후로 난 문득문득 원인을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었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어느순간 무너질 수도 있구나를 실감했던 것 같아.

세세한 것에 하나하나 계획을 세우고,

아무 일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나간건 아마 그 즈음부터였을거야.

 

그래 이 이야긴.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도 결코 한 적이 없는 이야기였어.

왜냐하면 그즈음까진 난 그날 아빠의 발을 떠올리기만 해도 왈칵 눈물이 났거든.

눈물이 흘러넘칠까봐 겁이 나서, 혹시나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할까봐서

밖에서는 생각 하지도,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날이 늘어나고, 어느날 나는 너에게 "왜 매 주말마다 보자고 해?"라고 물었지.

이 즈음의 난 중요한 시기였고 괜한 감정소모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어.

어쩌면 내가 상처받을 것만 같은 너와의 관계를 어서 끝내고 싶은 마음에

저런 말을 꺼내는지도 몰라. 

 

그 날 고백을 받은 그 순간까지도 난 너와 시작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계속해서 결정하지 못했어.

마음 한 구석에서 너의 그 자신만만한 모습이 계속 위험하게 느껴졌거든.

네가 자신감 아래 잘 숨겨놓은 약한 모습을 얼핏얼핏 보지 못했더라면,

난 아마 네가 결코 나의 곁에 오지 못하게 했을거야.

 

네가 알고 있는 나는 언제나 잘 정돈되고 안정된 상태였기에

내 약한 모습을 네가 눈치채고 언젠가 떠날 것 같았거든.

 

 

 

 

그 날 다소 싱거운 대화를 하며 나의 집 앞에 왔을 때

넌 고백에 대한 답을 언제쯤 해줄 수 있느냐 물었고,

난 왜 그랬는지 몰라도 아빠의 이야길 하기 시작했어.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저 이야길 한건,

널 두번 다시 보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 약한 모습을 모두 내보이고 끝내야겠다는 것이었을지도 몰라.

이상하고 논리는 뒤죽박죽이지만. 아무튼 그날의 난 그랬어.

 

난 꾹꾹 눌러참았지만, 조금은 흐느끼며 말을 끝냈던 것 같고

그날 집 앞의 벤치는 달이 넘치다 싶게 밝았다.

그리고 넌 한마디의 질문이나 응답도 없이 그 시간 내내 아주 고요했지.

 

 

 

 

그리고 이 사람과의 인연은 여기가 끝이다와 같은

홀가분하고 허전한 이상한 마음으로 눈물을 훔치며 일어났을 때

넌 예상치 못하게 나를 커다랗게 손을 벌려 안았어.

 

그 차가운 겨울날. 너의 품은 참 따뜻했다.

너와 나 둘다 친숙하지 않은 상태의 스킨십을 얼마나 꺼리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 포옹은 너무나 의외였어.

누군가의 체온이 그렇게 강한 온기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너는 그날 나에게 아주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깨달았어, 처음부터 널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너에게 반한 순간이었다.

나의 사랑은 딱 그날의 너의 체온만큼이었어.

 

묵묵하게 한참이나 다독여준 너의 그 위로가

이상하게도 나의 오래된 빈틈에 들어와 박혀 나가질 않더라.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 시간 속에서,

난 네가 내보이기 두려워하던 껍질 안의 여린 아이도

오늘의 너처럼 내가 잘 보살펴주겠다고 다짐했지.

 

 

 

 

 

 

 

얼마전 음악을 듣는데

친구가 '와 이거 네가 정말 좋아하던 노래잖아' 라고 말하더라.

 

그런데 말야 난 이상하게도 그 가수와 제목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어.

친구가 말하기 전까진, 묘하게 익숙한 노래네.라고 생각했을 뿐.

 

 

 

 

언젠가 너의 존재도 나에게 그렇게 느껴질까.

나 역시 너에게 기억조차 희미하게 사라지는 날이 올까?

 

우리는 다들 자신이 변하는 것은 감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길 원하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섭섭해하고 때로는 외면하게 되는 것 같아.

 

어느 새벽 탁하게 잠긴 목소리로 나를 떠올리면

너의 상처를 온통 헤집는 것 같아서.

기쁨과 슬픈 기억이 동시에 쏟아넘칠듯 몰려와서 힘들다고 했을 때

그래서 난 슬프면서도 기쁘고. 마음이 아프면서도 안도감이 들었어.

 

태연한척 했지만 말야.

나 역시 잊어야 하는데 잊을까봐 두렵고,

한편으로는 빨리 너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몸부림 치고 있었거든.

 

 

 

 

 

 

모든 것은 조금씩 흘러가고 조금씩 변화한다.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나마 남게 되고,

아주 잠시라도 그 시절의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는 건

네가 나에게 줬던 그 따뜻함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은 마음의 빛을 나눠서, 어둠 속에 있을 때도 서로를 지켜준다.

그날의 포옹은 나에게 그런 빛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쁨보다는 슬픔을 주는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네가 준 마음의 빛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온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