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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우리였던 이야기 1. 아주 오래 전의 이메일.

DidISay 2012. 11. 16. 04:31

 

 

 

 

잠을 자기 전 확인할 것이 있어서, 아주 오랜만에 한메일에 들어갔다가 뜻밖의 것을 확인했다.

 

그건 바로 20대 초반의 내가 보낸 메세지..였다.짧막한 글과 함께 약속을 알리는 알람메일. 그 메일에 의하면 난 내년 11월 혜화역에 가야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건 순전히 이 이메일 때문이었다.

 

 

아마 이 때에도 11월 초에 첫눈이 내렸을 것이다.

 

 

그때의 눈이 어땠는지 기억하니?

 

 

 

 

 

언젠가 "그래.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라는 나의 의례적인 말에,

"그럼 무슨 요일날 볼래?" 라고 되물어 날 당황시켰던 게 만남의 시작이었을거야.

그전까지 우린 그저 적당히 인사나 나누는 친구였지.

 

 

 

 

겨울로 성큼성큼 다가가던 어느 날 네가 전화 했었잖아.

네가 했던 작은 부탁에 대한 답례를 하겠다며 선물을 고르라고 했고,

난 아마 항상 손이 차갑다면서 장갑이랑 손난로 같은게 좋겠다고 말한 것 같아.

 

 

 

그리고 눈이 올 즈음에 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넌 정말 첫눈이 내리는 그순간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말했어.

 

난 괜히 통통거리고 싶은 마음에

"에이 이 눈은 그런데 금방 진눈깨비로 변해버릴 것 같아. 눈이 아니라 비 아냐? " 라고 말했지만

넌 "그럼 더 빨리 만나야겠네. 비로 변해버리기 전에. 지금 네 학교 앞이야" 라고 나를 놀래켰지.

 

 

 

교정에 나갔을 때 눈은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어.

그리고 난 아마 "자국눈이란 말이 있대. 혹시 그 말 들어봤어?"라고 질문했던 것 같아.

 

자국눈은 말야. '겨우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눈'이야.

겨울 초입에 내리는 눈들은 대개 발자국만 겨우 남길정도의 적은 양이라서,

조금만 늦게 나가거나 늦장을 부리면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

 

아마 그날도 우리가 조금만 늦게 연락했더라면, 눈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이것이 첫눈일까. 아닐까'를 고민하다가 그냥 그렇게 시간이 지났을지도

그날의 일들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밥을 먹었고, 넌 장갑과 손난로를 함께 선물해줬어.

"하나만 고르라니까..미안하잖아" 라고 말하는 나에게

"아냐 둘다 예뻐서 뭘 골라야할지 모르겠더라"라고 넌 말했고

우린 잠시 수줍게 웃고 침묵했던 것 같아.

난 네가 선물한 장갑을 끼고 잠시 그렇게 있었다.

 

밖에는 다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

카페엔 우풍이 있어서 춥고 미세하게 창문이 덜컹거렸지.

그런데 말야. 그 날은 왜 천장의 아련한 빛만으로도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졌는지 몰라.

 

잠시 더 이어진 침묵과 물마시기.

너의 내뱉는듯한 숨찬 고백과 마침내 터져버린 나의 웃음.

그리고 우린 연인이 되었지.

 

돌아오는 길. 나의 장갑 위를 덮은 너의 손은 따듯했고,

그래 너의 첫연애는 그렇게 순진하고 어설프게 시작되었어.

 

사실 말야. 이제야 고백하지만 난 그날 네가 할 말들을

미리 조금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넌 그 해 너희 학교보다 우리학교로 오는 날이 더 많아졌고,

너의 동네보다 우리 동네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지.

나에게 전화가 오면, 네가 혼자 피실피실 웃으며

학교 복도나 강의실을 뛰어다닌다는 네 친구들의 야유들을 들었어.

 

너의 지인들은 나의 지인들이 되었고,

우리는 거의 모든 일상을 공유하며 서로를 배워나갔어.

넌 내 손은 차가운 것이 아니라 청량한 것이라 말해줬고,

나의..너의 모든 단점들은 장점이 되어 서로에게 인식되었다.

 

우리의 한달한달은 마치 1년의 시간과도 같이 밀도가 촘촘하게 느껴졌었지.

네가 온 세상이 별사탕으로 변한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래 사랑에 빠진 세상은 톡톡 튀는 별사탕이었어.

 

 

 

 

 

해가 성큼 짧아졌을 때 너는 거리를 걷다가 문득

나에게 첫눈이 올 무렵 만나자고 말했어.

난 낭만적인 약속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러자고 했지.

 

우리는 영원히 오래오래 갈거라 생각했으니까.

설사 헤어지더라도 좋은 친구로 곁에 계속 남을거라고 믿었으니까.

 

우리는 혹시라도 이 약속을 잊을까봐, 특정한 일자를 설정하고

메일로 알람을 맞춰놓고 약속직전이 되었을때 메일이 도착하게 설정해놨지.

낭만적인 약속에, 다소 딱딱한 방법이었지.

어쩌면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헤어짐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시간이 많이많이 흘러. 우리가 다시 침묵을 거듭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첫눈이 내리던 그 날의 설렘이나 떨림이 아니었어.

그건 그저 무겁고 지리하고 숨막힐 것 같은 단절이었지.

우리는 그렇게 다시 타인이. 이방인이 되어 멀어져갔어.

각자 펑펑 울기도 하고. 안타까워도 해보았지만

서로 너무 지쳐서 돌이킬 수가 없었어.

 

 

 

 

 

헤어진 첫 해엔 커다란 함박눈이 내렸어.

넌 그 사이 나에게 술에 잔뜩 취한 전화 한통을 남기고 갑작스런 입대를 했고,

난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터라 그저 담담했지.

 

그리고 난 그 함박눈을 보면서, 아 이 눈이 모든 어지러운 것들을 덮는구나 하며 감탄했던 것 같아.

그저 하얀 눈밭인 세상은 참 아름다웠거든.

사락사락 눈 밟는 소리며. 고요한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

그래 그 때 이미 난 네 생각을 지워나간 것 같아.

 

세상은 조용해졌고, 모든 것은 하얀 풍경이었고

그 해 겨울 내 어설픈 청춘의 시간은 흘러가버렸지.

 

 

 

 

 

 

올해의 첫눈은 말야. 자국눈이었어.

발자국만 겨우 남기고 사라지는 눈.

 

네가 언젠가 그랬지? 우리가 함께 한 반지며 편지들을 다 어떻게 했냐고.

사실 난 아직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너에게 말하기 싫어서

헤어졌을 때 모두 처분했다고 말했어.

넌 아직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며 조금 섭섭해하는 것 같았지.

 

그런데 그거 알아?..

물건들이나 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거.

흔적처럼 눈이 사라지더라도,

그 하얀 공간에 첫 발자국을 내가 찍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마치 자국눈처럼 시간이 흘러도, 더 이상 이메일이 오지 않더라도

그렇게 우린 서로의 기억 한켠에 남아있을거야.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에 문득문득 스쳐가며 이를 담담하게 회상하겠지.

 

 

 

 

 

심장이 터질듯이 가슴 떨렸던.

팝콘 같은 웃음을 터트리게 했던

그 많은 좋은 순간들을 경험하게 해줘서 고마워.

별사탕 같은 사랑을 알려줘서 고마워.

 

더이상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다시는 결코 마주치지 않을지라도

삶의 한 모퉁이에서 서로를 기억하는 날.

내 삶의 좋은 기억으로 너를 떠올리는 날

그것이 나에겐 첫눈이 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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