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심플 라이프 (桃姐, A Simple Life, 2011) 본문

그들 각자의 무대

심플 라이프 (桃姐, A Simple Life, 2011)

DidISay 2012. 12. 26. 01:43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본 영화 '심플라이프'

'우리도 사랑일까'도 함께 봤는데 두 작품 모두 상영관이 많지 않아서

일부러 씨네큐브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동화 중 '토미 드 파올라'의 '오른발, 왼발'이란 책이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보브는 어린 손자 보비에게

 '오른발,왼발'을 맞춰가며 한발한발 천천히 걸음마를 가르친다.

 

그리고 어느날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시 블록을 쌓거나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

보비는 어릴적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줬던 것처럼

'오른발, 왼발'을 외치며 한걸음한걸음 걸음마를 보브와 함께 내딪게 된다.  

 

이 동화를 볼 때마다, 어릴 적 나에게 코끼리 그림을 그려주던 할아버지나

뜨개질을 가르쳐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나서 괜히 마음이 찡해지곤 한다.

그리고 오늘 '심플라이프'를 보면서 내내 이 동화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고아로 태어나 4대째 한 가족을 위해 일한 가정부 아타오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고 있다.

 

60년 넘게 아이들을 돌보고, 또 그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과 손자들을 돌보면서 지낸 아타오는

로저의 가족에게 이미 단순한 가사노동자가 아니다. 

 

그녀는 고조할머니부터 지금의 손자들까지 모든 집안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산증인이었고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상태에서 홀로 남아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된 로저를 마치 어린 소년을 보살피듯

살뜰하게 돌본 가족 모두의 어머니였다.

 

 

 

 

 

유독 사이다를 좋아했던 로저에게 남몰래 콜라를 가져다줬던 그 옛날 유년시절처럼

로저에 대한 아타오의 애정은 각별하며,

아타오에 대한 로저의 마음 역시 마치 어머니를 따르는 듯하다.

 

그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을 때,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할머니가 중풍으로 고생했을 때 그 곁을 지키며 보살핀 것은 바로 아타오였고

이제는 그들의 가족들이 그녀를 보살피게 된다.

 

이들은 아타오를 위해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인간적이고 따뜻한 방법으로

마음을 다해 그녀의 노후를 지켜주려 한다.

 

 

 

 

 

폐를 끼치기 싫어 굳이 요양병원으로 옮긴 아타오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로지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해외에서도 안부를 물으며 전화를 걸고.

집안행사 때는 중앙의 자리에서 일가의 어른으로 환영해준다.

 

어릴 적 아타오가 차려준 간식을 먹으며 놀았던 로저의 친구들 역시 

그녀에게 짖궂은 노래를 불러주며 추억을 되씹는다.

 

60년에 걸쳐 부엌에서 물기 마를 새 없이 일했던 그녀의 삶은,

그녀의 음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혀와 머리 속에서 회상된다.

덕분에 제비집이나 소혀요리와 같은 꽤 다양한 음식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찡했던 장면은

로저가 그녀를 양어머니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이 만든 영화의 시사회장에 데려가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립스틱을 바르고 마치 데이트 하듯 로저를 기다리는 아타오과

이제는 작고 주름진 그녀를 다정하고 짠하게 바라보는 로저의 관계는

피를 나눈 가족 그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함이 있었다.

 

고령화 사회의 쓸쓸하고 어두운 면들이, 요양병원 곳곳에서 느껴지긴 하지만

이런 모습들 덕분에 영화 전체의 분위기는 담담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진다.

 

 

 

 

 

 

이 이야기는 '황비홍' '천녀유혼' 등을 만든 '로저 리'의 실화라고 하는데,

만약 그것을 몰랐다면 인물들 모두  굉장히 영화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저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한 상류층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다정한 멋이 있다. 일단 등장하는 배경 자체가 그리 화려한 모습이 아니다.

 

 

성공한 영화제작자지만 에어컨기사로 오해받을만큼 털털한 차림에 배낭하나 메고 다니는 로저의 모습과

제비집 요리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핀잔에 쑥스러워 하며 증손자의 탄생을 알리는 그의 어머니.

예전 마마님에게 선물받은 아타오의 반지와 목걸이를 물려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모두 따뜻하고 푸근한 광경을 연출한다.

 

진정한 가족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다정하고 착한, 인간미 넘치는 영화이다. 근사한 이야기다.

 

 

 

 

 

영화 마지막 즈음에 한 노인이 시를 읊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자리에  옮겨본다.

 

 

만남이 쉽지 않듯 헤어지기도 어려워라
봄바람이 힘을 잃자 꽃들이 시드네
봄눈에 죽음이 이르자 실이 끊기고
촛불은 재가 되고 굳은 눈물만 남았네
새벽에 거울보며 흰머리에 시름 일고
한밤에 달 앞에 서서 문득 처량함을 느끼네
봉래산을 가보려 해도 길을 모르겠으니
파랑새 나를 위해 한소식 전해주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