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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 본문

그들 각자의 무대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

DidISay 2012. 12. 27. 05:52

 

남들은 저를 무척 바쁜 사람으로 봅니다. 늘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해대며 허덕거리기 때문입니다. 밥 먹을 때나 화장실 갈 때는 꼭 신문이나 책 , 잡지를 들고 가고, 걸어 다닐 때도 어학 강의든 오디오북이든 음악이든 무언가를 들으려 노력했습니다. 집을 나설 때면 꼭 책을 들고 가고, 손에 책이 없으면 근처 서점이나 편의점에 들러 결국 읽지도 않을 책이나 잡지를 삽니다.

 

 ....저는 제가 가진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가 '몰입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지속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그렇지, 단기 집중력은 탁월한 편이라고 자평하곤 했습니다. 하지만제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런 단기적 몰입마저 지적, 감정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워 나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에 한했던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흥미가 떨어지면 몰입은 커녕,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내던져버렸습니다. 오히려 제 집중력, 몰입력은 아주 안좋은 편입니다...저의 이런 단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마음 내키는 대로 즐거운 것만 좇으며 산 결과, 더 이상 내게 자극을 줄 수 없는, 그래서 지루하다 느껴지는 일상의 시간에까지 꼭 자극이 될 만한 흥밋거리를 곁들이는 습관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정보연, 행복을 미루지 않기를 바람 中 

 

 

 

 

크리스마스 때 씨네큐브에서 '심플 라이프'와 함께 본 영화.

무척 평이 좋았어서 꽤 예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마침 상영 중이길래 반가운 마음에 바로 티켓을 끊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볼 수 있어서,

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할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이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복된 성탄제였다.

 

 

 

 

마고와 루는 결혼 5년차 부부이다.

 

다소 낡아보이지만 색감과 햇빛이 예쁜 집에, 이들을 사랑해주는 가족들.

게다가 남편 루는 언제나 애교스러운 장난과 넘치는 사랑표현으로 마고를 아껴준다.

 

마고는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루는 닭과 관련된 요리책을 쓰고 있는 요리사이다.

(그래서 이 부부는 매일 루가 만든 각종 닭요리로 식사를 한다!)

 

때문에 (도대체 생활을 유지할만한 돈은 어떻게 나오는지 의문이지만)

이 부부의 삶은 전체적으로 시간이 펑펑 남아도는 것처럼 보이며

사랑을 나누거나 애정표현을 할 여유도 아주 많다.

 

 

 

하지만 이들의 불행은  

루는 안정적이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일반적이고 가정적인 남자였고,

마고는 삶을 아주 예민하고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자였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마고는 삶의 작은 공백이나 불안정한 감정을 참아내질 못한다.

비행기를 탈 때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에 의존해 휠체어를 타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뭔가의 사이에 끼어 붕 떠 있는 느낌. 두려움을 공포스러워 한다.

 

 

 

흔히 결단을 빨리 내리고 행동하는 것을 성숙하다고 표현하지만,

불편한 것을 참고, 그 어색한 순간을 잠시 두고보는 것 역시 어른스러운 태도이다.

 

이런 잣대에서 본다면 마고는 어른이라기 보다는 사춘기소녀와 같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애정을 구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맨발로 거리를 걷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물론 영화에서는 어느 누구도 악역처럼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인물들 하나하나를 아주 섬세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내고 있지만.

(표정과 감정을 일상적이면서도 세밀하게 묘사한 덕에,

어처구니 없는 선택조차 꽤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출장지에서 만난 대니얼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에 끼어든 이 균열을 참아내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감정을 100% 만족시키지 못하는 루의 모습도 갑자기 극대화되어 다가온다.

 

 

벽을 가득 채운 온갖 추억과 가족들의 사랑도 이제 그녀에겐 낡은 것일 뿐이다.

남편에게 스릴 넘치고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보려 애정표현을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패턴의 장난과 익숙한 멘트들.

너무나 일상적인 담담하고 친숙한. 그래서 권태스러운 고요함이다.

 

그에 비해 대니얼은 마고에게도 관객에게도 끝까지 그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매일 닭요리만 해대는 루에 비해, 인력거를 끌며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대니얼은

경제적으로는 분명 불안정하기 짝이 없을 게 분명하나

온갖 새로운 장난과 예측하지 못할 단어들로 그녀를 즐겁게 한다.

게다가 그는 마고가 다가오는 딱 그만큼의 애정만 보여주며,

그녀를 잡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한 채 모든 선택을 그녀에게 맡길 뿐이다.

 

 

 

 

이런 금기를 넘나드는 성적긴장감 때문에

이들이 카페에서 나누는 상상력을 동원한 언어로 사랑나누기는,

나중에 보여지는 이들의 실제의 섹스보다 훨씬 더 관능적이고 짜릿하다. 

 

그리고 결국 마고는 이 균열을 견뎌내거나 과감하게 끊지 못한다.

계속해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는 결국은 루를 버리고

새롭고 두근거리고 강렬하게 끌리는 대니얼을 선택하고야 만다.

마치 끊임없는 자극을 찾아 보채는 아기처럼.

 

 

 

마고가 수영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인데,

늘씬한 미녀의 나신에 익숙하던 관객들에게

노인과 중년층 여성들의 무너진 육체를 여과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늘어지고 주름진 모습들.

카메라컷에 의해 관능적으로 조작된 샤워씬이 아닌

생 날것의 목욕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상하게도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친숙했다.

 

가끔 새로운 것에 끌려오. 그것들은 눈부시게 빛나지요


새것도 곧 헌것이 돼요


그래요, 새것도 바래요. 헌 것도 원래는 새것이었으니까요

 

 

그들이 나눈 이런 대화들은, 그 나이든 육신들도 한 때는 빛나는 청춘이었음을.

이제는 다리털을 미는지조차 모르는 부부의 식은 애정도

한 때는 두근거림과 황홀한 색으로 가득차 있던 열정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마고와 대니얼의 애정도 곧 낡고 초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나누고, 여러 명의 상대도 섞어보지만

이들의 '사랑해'는 더 이상 본래의 의미가 아닌,

불안감과 권태를 억누르려는 수단.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해보려는 애처로움이 되고 만다.

 

 

마고는 오랜만에 만난 루와 그의 따뜻한 가족들을 보며

후회와 미련을 느끼지만

그것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일 뿐이다.

 

 

무슨 일이에요


바보 난 중독자잖아
평소 늘 이래 무슨일이냐니...무슨 질문이 그래?

그 질문은 내가 해야지 그냥 사라진 게 누군데?

자기 언젠간 그럴줄 알았어, 맘가는대로 살면 다 잘될 것 같지?
재밌긴 하겠지 신나고..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지금 그 표정은 뭐야? 나 때문에 창피해? 내가? 자기나 나나 별 다를바 없다고, 알아?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난 자기가 나보다 더 머저리인 것 같아
망친 사람은 너야, 마고. 길게 보면 말이야
인생엔 당연히 빈틈이 있게 마련이야.

그걸 미친 놈처럼 일일히 다 메울 순 없어.

 

 

 

 

 

빛이 반짝이는 동화 속 세상 같은 놀이기구가

불이 꺼지고 음악이 멈추면 초라하고 낡은 현실이 되어버렸듯이.

마약처럼 중독된 사랑에서 깨어나면

결국 나를 맞이하는 건 내가 실제로 살아가고 발붙이는 땅이다.

 

어쩌면  삶의 어느순간의 우리에겐 이 노래가사처럼,

걸음을 늦추고 아장거리는 발걸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불안함과 애매함을 안은 채 가만히 기다리며

내 초조함과 어색한 상황을 인내하는 어른스러움도 갖춰야 한다.

 

그래야 겨울이면 언제나 내리는 창밖의 눈이지만

그 성에 낀 새하얀 땅과 얼음에 싸여 반짝이는 낙엽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방인과 괴물로부터 나를 지켜준다고 약속했던,

이제는 익숙해진 내 곁의 누군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비로소 헤아릴 수 있을테니까..

 

 

 

 

 

국경에 이르렀으니 걸음을 늦춰요.
아장거리는 발걸음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세요. 성에 낀 땅과 그 밑의 낙엽들도요
잠에서 깨면 당신을 생각할게요.
나의 비밀들을 지켜줘요. 그린 마운틴 스테이트

 

땅에 발 딛고 세상을 품에 안고 싶어요.
이방인과 괴물에게서 당신을 지킬 수 있기를.
잠에서 깨면 당신을 생각할게요.
나의 비밀을 지켜줘요. 그린 마운틴 스테이트


잠에서 깨면 당신을 생각할게요.
잃어버린 시간을 지켜줘요. 그린 마운틴 스테이트
잠에서 깨면 당신을 생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