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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 11.어슴푸레한 담담함. 잔치국수

DidISay 2013. 1. 5. 15:53

 

 

둥실한 달이 떠오른 지 한참 지나고, 빛과 어둠이 묘하게 교차하는 밤.

티비에서 통속극들이 흘러나오는 시간.

 

한창 출출해질 이즈음 집집마다 치킨이나 피자처럼 즐겨먹는 음식이 있겠지만,

우리집은 마치 매일 이루어지는 성실한 의식처럼 한밤에만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잔치국수.

 

 

 

 

 

아빠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거의 늦게 오는 일이 없는 편이셔서,

저녁시간엔 다같이 모여서 책을 보거나 수다를 떨었고

그도 아니면 앉은뱅이 상을 펴놓고 낮에 한 숙제를 검사받곤 했다.

 

책상이나 식탁이 있었음에도, 아빠가 공부를 봐주거나 야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동그란 모양에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는 앉은뱅이 상이 등장했다.

 

상에 마주앉아 아빠가 물어보는 구구단이며 영어단어들을 머리를 쥐어짜가며 읇조리고 있으면

나를 해방시켜주는 말이 언제쯤 나오려나,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리곤 했다.

그건 바로 엄마가 외치는 '여보. 배고프지 않아?' .

그것이 내겐 메시아요. 구원의 소리였다.

 

그러면 언제나 아빠는 '우리 국수 먹자'로 응답했고,

엄마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냄비를 꺼내고 육수를 우려내기 시작하면

곧 나의 시련의 시간은 끝을 알렸다.

 

 

 

 

 

도로록 종이가 말려져 있는 빨간펜이며, 학습지들이 사라진 앉은뱅이 상엔

내가 닦은 행주가 지나가 다시 윤기가 흘렀고

그 자리에 큼직한 접시에 담긴 김치와 수저, 젓가락이 놓였다.

 

국수를 삶고 있는 엄마는 수증기에 휩싸여 신성해보이기 까지 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든든해 보여서 살포시 치맛단을 흔들었다.

엄마는 '우리 비빔국수도 좀 해먹을까? 김치 맛있는데'라고 기분좋게 말하셨고

난 '응 엄마!'하면서 신나게 대답하곤 했다.

그런 날은 커다란 잔치국수 옆에, 입맛을 다실만큼의 비빔국수도 놓였다.

 

 

김치와 침기름을 넣고 만든 비빔국수는 아주 일상적인 재료가 들어갔음에도

듬뿍 들어간 깨만큼이나 매콤하고 고소한 향이 온집안에 퍼져 코를 킁킁거리게 했다.

그리고 잔치국수는 언제나 중앙의 자리에서 희끄무레한 국물에, 김과 계란을 얌전히 풀고

하얗고 매끄러운 면을 품은 채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밀을 사용해서 엄마가 직접 만든 칼국수는 언제나 살짝 투박하고 슴슴한 맛이 났다.

하지만 소면은, 기계가 늘씬하게 뽑아낸 면이라,

점하나 없이 매끈하고 새하얀 자태를 자랑했다.

 

그 면이 술술 혀와 목구멍을 거쳐 아래로 내려갈 때는

마치 걸림돌 하나 없는 열차가 미끈하게 행진해나가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하는 말 중 '입속의 혀처럼 군다'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첨을 잘 한다는 뜻이겠지만

난 언제나 이 국수가 마치 입속의 혀처럼 부들부들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곤 했다.

 

 

 

 

 

잔칫날이라고 하면 잔치국수가 아닌 뷔페가 떠오르는 나는 

주로 야식으로만 잔치국수를 접했기 때문에

'잔치국수'란 말을 들으면 언제나 새벽녁이나 저녁 무렵의 풍경이 떠오른다. 

 

주변이 모두 검은빛으로 둘러싸인 컴컴함 속에서

국수는 더 짙고 강렬한 냄새를 발산하고

음식에서 솟아오르는 김은 더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게다가 새까만 한밤에 홀로 켜있는 브라운관tv가 묘한 느낌을 주듯이

빛과 어둠이 뒤섞인 분위기 속에서 먹는 국수는 묘하게 신성한 느낌마저 풍겼다.

소박하고 담담한 맛이지만 말없이 우리를 치유해주는.

 

낮 동안 각자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한 그 피로함을 모두 내려놓고

따뜻하고 매끈한 이 음식을 통해서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잔치국수를 먹을 때면, 우리 가족은 언제까지나 함께겠구나 하는 든든함을 갖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어른이 되었고

이제 나는 잔치국수를 식구들 모두와 둘러앉아 마주하기보다는,

혼자 후루룩 끓여먹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제는 우리 가족의 야식타임이 아닌,

내 마음이 어딘가 스산할 때 국수를 먹게 되었는데

마음이 많이 아플 때, 펑펑 울며 먹은 음식도 잔치국수였고

기분이 좋지 않거나 가족이 그리울 때도 역시 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내 아픈 마음의 빈틈을, 

어릴적 국수를 감싸고 있던  어슴푸레한 빛과 어둠들이 채워줄 것 같았다.

부드럽고 슴슴한 그 맛으로 내 상처를 매끄럽게 치유해 주길 기도했다.

 

과연 그것이 국수의 신험한 효력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후루룩 면발을 넘긴 뒤 시간이 좀 지나면

내 마음의 생채기들은 가라앉거나 잊혀졌고

또 그렇게 하루하루의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마 나 역시 미래에 내 아이들이  한글이나 구구단을 배울 나이가 되었을 때,

남편이 배가 고프다고 슬쩍 이야기를 꺼낼 때,

언제나 앉은뱅이 상을 펴기 시작할 것이다.

 

커다란 그릇 속에 또아리 튼 면들을 담고,

가슴 속을 온통 뜨끈하게 할 육수를 부을 것이다.

 

반짝거리는 냄비에 새하얗고 딱딱한 면들이 보드레하게 변해나가는 것을 보며,

언제나 우리의 이 평온한 행복이 계속되기를 빌어보겠지.

 

 

 

 

 

국수- 이재무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 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 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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