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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달리기 본문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부른 것이라 어리둥절해하며 나갔더니 술친구가 필요하단다.
토요일 저녁. 그 많은 친구 중에 하필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나와 술을 마시고 싶어 한 이유를 처음엔 몰랐었다.
굳이 의례적이라고 할것까진 없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안부를 물은 다음 그 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길 하면서 눈물을 왈칵 쏟는다.
많이 좋아하는구나...싶었다. 문제는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시작할 수가 없다고 했다..
"왜? 뭣 땜에?"
두렵단다. 자기가 처음 좋아했던 사람이 짝사랑이었기 때문에 너무 아팠는데 또다시 짝사랑이 될 것만 같아 무섭단다.
심지어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연락을 끊겠다고 했다.
"하지만 왜 이 얘길 나에게...?"
그 애는 잠시 후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자신의 첫사랑이 바로 너였노라고.
네가 나를 받아주지 않아서 자긴 너무나 힘들었노라고.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그 친구에게 맨 처음 고통의 바통을 안격준 선행주자가 바로 나였다는 얘기다.
사랑이란게 또 이렇게 얄궃을 수 있을까.
내가 너 대신 택했던 사람은 나을 정말이지 참혹하리만치 괴롭혔는데 넌 나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다니.
결국 나의 그 사람은 날 힘들게 했고 나는 이 애를 힘들게 했으며, 이 애는 그 덕분에 지금 좋아하는 사람과 시작도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이어달리기가 아니고 뭔가.
이어달리기의 증거는 그밖에도 많았다.
그애는 나와 이루어지지 않은 다음 사귀게 된 사람에게 이유 없이 못되게 굴어 죄없이 착한 사람에게 분풀이를 했다 한다. 나 또한 나를 괴롭히던 '그 사람'과 헤어진 후 다음 사람을 사귀면서 그런 결심을 했었다. '잘 해줘야지. 얘한테는 자신이 평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정말 행복하게 해줘야지...'
사랑의 바통이란 정말이지 좀처럼 잃어버리거나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다니기가 힘든 것인가보다. 그 애는 눈물범벅이 되어 밤이 새도록 물었다.
"나...시작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이유도 말했다. "사랑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지. 그래도 난 네가 그 사람하고 뭔가를 시작했으면 좋겠어.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바보 같은 일은 없으니까."
웃긴다. 나를 찾아온 누군가에겐 어차피 헤어질 것 뭐 하러 사귀냐던 내가 남한테는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바보 같은 일은 없다' 고 말하고 있으니...
이 게임은 정말로 모순투성이의 이어달리기인가보다.
이석원 산문집 보통의 존재 中- 이어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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