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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피나(Pina, 2011)

DidISay 2013. 1. 12. 10:53

어린 나이에 이중언어에 노출된 결과, 일상적인 대화는 2개 국어가 가능하지만

풍부하고 섬세한 어휘력은 갖추지 못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결국 그 아이는 사춘기가 되었을 때 복잡한 감정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고

언어로 표현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또렷하게 인식할 수도 없기에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고 했다.

 

이런 그릇된 조기교육의 희생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언어로 온전히.

그 느낌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 부족함을 채우고, 나의 느낌 그대로 소통하기 위해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거나 영상을 만든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피나는 춤을 선택했다.

 

 

 

 

 

 

피나 바우쉬Pina Bausch는 고전적이고 딱딱하게 정형화된 춤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즉흥적인 감정을 춤으로 표현하려고 한 무용가 중 한명이다.

 

한국에는 영화 '그녀에게'에서 사용된 '카페뮐러'와 '마주르카 포고'로 많이 알려져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녀에게'를 본 뒤에  '비탄의 황후Die Klage der Kaiserin'와

도미니크 메르시[각주:1]의 인터뷰가 실린 다큐멘터리를 찾아봤었다.

 

개인적인 인터뷰를 거친 후 마음에 들어야 해외공연을 했던 피나는

한국을 꽤 좋아했는지 여러차레의 내한공연[각주:2]을 했는데,

덕분에 나도 카네이션으로 가득찬 그녀의 무대를 관람할 수 있었다.

 

 

 

 

 

9월인가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3D로 개봉했는데 바빠서 보지 못했다가,

뜻밖에도 아직까지 상영 중이라 기쁜 마음으로 보고 왔다. :)

 

이 작품은 피나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제작자체가 무산될뻔 했지만,

빔 벤더스와 극단원들의 애정으로 결국 이렇게 완성되었다.

 

다큐멘터리긴 하지만 그녀의 삶과 작품관을 세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대표적인 공연들을 보여주고, 그 사이에 극단원들의 코멘트를 섞은 형식이다.

말 그대로 피나에 대한 애정어린 찬가라고 해야할까.

 

모든 인터뷰는 해당 인물들의 (말하지 않는) 표정을 보여주고,

그 위에 목소리를 덧씌우는 보이스오버로 처리되었다.

때문에 이 다큐에 등장하는 극단원들은 말하고 밥먹고 웃는 일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춤추기 위해 태어난. 모든 삶을 춤으로 메꾸어나가는 열정적인 피사체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는 그녀의 대표작 4편[각주:3]을 실었는데

피나는 생전에 자신의 공연을 무대에서 생생하게 보길 원해서, 

이를 비디오나 dvd로 내놓은적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시간상 편집된 공연 부분들이 참 아쉬웠기 때문에,

인터뷰로 흐름이 끊기지 않고 그녀의 공연들만 쭉 볼 수 있는 dvd가 출시되었으면 한다. 

사용된 음악들도 하나같이 참 좋아서 눈과 귀가 즐거운 영상물이다.

 

흙과 물과 나무들처럼 온갖 자연물이 사용된 그녀의 무대도 참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옷들과 하늘거리는 긴 드레스들,

발레리나처럼 깍아만든듯한 몸이 아닌 무용수들도 좋았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인형이 아닌,피와 땀이 흐르는 하나의 인간으로 다가온다.

 

피나는 미리 스토리를 짜놓고 그에 무용수들을 끼워맞추지 않았다.

그녀는 단원들과 매일매일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을 거쳐 그것을 토대로 무용을 짰다고 하는데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감정들이 폭발하는 공연이라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기도하고, 더 이상 보기 힘들만큼 갑갑하고 괴롭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힘.

비슷한 장난을 어렸을 때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춤에 활용했구나 :)

 

 

 

빔 벤더스는 영화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서,

인공적인 무대세트에서 이루어진 일반적인 공연과

자연과 일상적인 생활공간에서 이루어진 공연을 반복해서 보여줘 색다른 느낌을 준다.

 

또한 '콘탁트호프'는 2000년에는 노인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댄서들이,

2008년에는 평범한 10대 댄서들이 출연했는데 이를 오버랩시켜서

두 공연 모두를 상상해볼 수 있게 했다.

 

 

 

 

 


아래는 주요 공연 장면들.

 

 

해가 뜨고 풀이 움트고 잎이 지고 얼어붙는 과정을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표현해놨다.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한 순간 관계는 산산히 부서진다.

 

 

 

완벽하게 상대를 믿고 의지해야 가능한 것들.

 

이 영상 말고 야외에서 붉은 꽃잎이 그려진 긴 드레스를 입고

완전히 정면으로 무너지고 이를 받아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전혀 흐트러짐이나 망설임 없이 파트너를 향해 곧장 넘어지고 이를 받아주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1. 피나와 함께 탄츠테아터의 공동디렉터였다. 카페 뮐러에서 피나의 파트너르 등장한다. [본문으로]
  2. '카네이션', '마주르카 포고', '러프 컷', '네페스', '카페 뮐러' & '봄의 제전'/특히 '러프컷Rough Cut'은 한국을 배경으로 만든 탄츠테아터와 lg아트센터의 공동합작이다. [본문으로]
  3. '봄의 제전' 카페 뮐러' '콘탁트호프(매음굴)' '보름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