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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잊혀진 꿈의 동굴 3D(Cave Of Forgotten Dreams, 2010)

DidISay 2013. 2. 2. 23:56

 

 

예전부터 나는 동굴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어릴 적 읽었던 '15소년 표류기'에서, 라마 같은 생소한 동물들의 이름과 함께 나를 사로잡은건

프렌치뎅이라는 이국적인 이름의 동굴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갈등과 모험이었다.

어두침침하고 좁지만, 아주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

끝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번쩍번쩍 으리으리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곳.

 

이런 동굴에 대한 이미지는 스티븐슨의 '보물섬'이나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내가 애타게 갈구해도, 주변에  동굴이 흔하게 퍼져있을리는 만무했고

동굴은 어느덧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곳.

온갖 종유석과 신비로운 빛의 물웅덩이들이 있는 곳.

일상에서 벗어나는 멋진 모험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동굴에 얽힌 이런저런 모험담들은 모두 잊혀져 갔고,

그저 관광상품으로나 한 번 가볼까 고민하게 되는 공간이 되었다.

 

가끔 책을 통해 동굴의 사진들이나 제주도에서 새로 발견된 용천동굴의 소식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저 작은 사진으로 접하는 평면적인 모습들은 아름답고 신기하긴 했어도,

직접적인 이미지로 다가오진 않았고 어릴적의 그런 감동이나 흥분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잊혀진 꿈의 동굴'이란 다큐멘터리가 3D로 개봉했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아 이건 바로 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용유석이 가득찬 동굴을. 그것도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암굴화가 있는 쇼베동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니 너무 기뻤다 :)

 

 

 

쇼베동굴은 학자들의 탐사 도중 우연하게 발견된 곳으로, 입구가 커다란 암석에 의해 봉쇄되는 바람에

3만 2천년동안 그 모습이 바로 어제의 것처럼 생생하게 보존된 문화유산이다.

 

약 300여점의 원시예술벽화며 몇만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종유석과 석순, 석주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동굴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실감나게 담아냈다.

 

그저 사진으로 봤을 때와 영상으로 봤을 때 느낌이 너무 달랐는데,

빛에 따라 변화하는 원시벽화가 그렇게 역동적이고 활기 넘치게 느껴진 것도,

동굴의 모습이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게 다가온 것도 처음이었다.

 

 

 

 

1970년대까지 구석기인들처럼 살았던 호주의 원주민들은

벽화가 어느 정도 벗겨지면 그 위에 덧칠을 하곤 했다.

 

그것을 본 민속학자가 손상된 그림을 그리는 원주민에게 "왜 이 그림을 그리냐?"고 묻자,

그는 "이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게 아니다. 영혼이 내 손을 빌려서 그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내용은 잔잔하며, 학자들의 코멘트와 반복되는 동굴의 모습이 이어진다.

보다보면 프랑스의 문화재 보호에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_<

외부인이 침입 못하도록, 동굴 앞을 은행금고와 같은 문으로 막았고

촬영할 때도 보호를 위해 일정시간, 일정인원, 일정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게 통제한;

 

덕분에 촬영팀이 시야에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촬영범위 역시 한정되어 있는데

이런 화면 때문에 함께 탐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굴 내부에서는 마치 마음에 드는 미술품을 훑듯이,

원경-근경, 빛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 등을 세세하게 보여주며,

동굴 밖에서는 이 곳에 암굴화를 남겼을 원시인들의 생활상이나 주변환경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졌다.

 

자극적인 영상이 아닌데다가 빛과 어둠이 아주 예민하게 포착되는 환경이다 보니,

세밀한 소리까지 아주 잘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는데

계속되는 첼로소리, 의도적으로 삽입된 심장박동소리, 동굴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미세한 바람소리가

너무나 섬세하게 들려서 동굴 한복판에 실제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저 동굴을 보고 있는게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이 영화 끝에는 론 강에 위치한 프랑스 최대의 원자력 발전소를 보여준다.

쇼베동굴과 30km밖에 떨어지지 않는 이 발전소에서 근방엔 온실이 있다. 

발전소에서 나온 뜨거운 물로 열대림이 형성된 것이다. 

그 중에는 차갑고 무표정해 보이는 백색 변종 악어도 있다.

 

벽화가 생성되었을 당시엔 2,700미터 높이의 빙하가 있던 자리가

이제는 악어들이 헤엄을 치는 열대 기후가 된 것이다.

 

감독은 우리에게 이 악어가 3만 2천년 전의 쇼베 동굴 벽화를 바라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물었다.

 

혹시 현재의 우리 역시 돌연변이 악어가 아닐까?

어느새 사라져버린 동심처럼,

구석기 시대 인간의 마음과 꿈과 신화와 별을 모두 잃어버린 변종 인간은 아닐까?
정말 중요한 것보다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좇느라 온통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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