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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앙드레 고르

DidISay 2013. 5. 4. 13:07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결혼식에서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하고,

연애시절엔 너와 함께 죽을 때까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죽음 그 직전까지 애정이 변치 않는 커플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이런 책은 좀 낯간지러운 느낌이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 책 'D에게 보낸 편지'가 특별했던 이유는

작가가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자 20여년간 간호한 충실한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쓰여진 마감된 시점은 2006년인데, 이듬해 아내의 병이 더 악화되자

그는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하였다.

 

이 책은 앙드레 고르가 말년에 부인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연애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르트르와 보봐르, 이반 일리치와 더불어 지냈던 지식인 답게

단순한 연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는 과정을 그려낸 일대기와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다.

 

 

초반부에서는 부인에 대한 사랑이 참 절절해서 어쩜 이럴 수 있지 싶었는데,

계속 읽다보니 그에게 부인은 단순한 연인이 아닌 말 그대로 삶의 동반자였다.

 

부인은 그저 오스트리아계 가난한 유대인이었던 그와는 달리

다수의 남자들이 매혹되었을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자 대인관계가 활발한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이 둘은 동일한 기억. 가족을 상실하고 불안했던 그 경험 때문에 서로에게 끌릴 수 있었다.

 

게다가  사상적인 지식만 있었지 삶을 꾸려나가는 경제적인 기반은 참 미약했던  그를

부인이 폐지 줍는 일까지 하면서 거의 먹여살리다시피 했고,

자신이 언론사에서 기반을 잡을 때, 그녀의 조언과 업무적인 도움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부인이 없었다면  앙드레 고르가 이룬 사상적 성취는 결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책 자체는 크게 대단한 것이 없지만, 이 부부의 실제 삶의 무게 덕분에

아주 얇은 책이 굉장히 묵직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당신을 알기 전에 나는 여자와 두 시간만 같이 있어도 지루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상대도 내가 지루해한다는 걸 결국 눈치 채고 말더군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당신이 나를 다른 세상에 이르게 해준다는 사실에 난 사로잡혔습니다. 내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가치들이 그 다른 세상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그 세상에 난 매혹되었습니다. 그 세상에 들어서면 나는 아무 의무도 소속도 없이 도망칠 수 있었습ㄴ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다른 곳에' , 내게 낯선 곳에 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 부족함을 메워주는 타자성他者性의 차원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정체성이란 것을 늘 거부하면서도 결국 내 것이 아닌 정체성들만 하나하나 덧붙이며 살아온 나를 말입니다. 당신에게 말을 하면서 나는 '당신의'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껏 나는 당신에게 영어로 말해왔습니다. 심지어 당신이 프랑스어로 대답할 때도 나는 영어로 말했지요. 당신을 통해 그리고 책을 통해 주로 알게 된 영어는 처음부터 내게는 사적인 언어였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사회적 규범이 끼어들지 못하게 우리의 내밀함을 지켜준 사적인 언어. 나는 우리가 보호하고 또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세계를 당신과 함께 쌓아올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