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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차이와 사이-요네하라 마리

DidISay 2013. 6. 5. 14:40

 

저자만 보고 이 책은 무조건 사야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겐 이청준, 장영희, 알랭 드 보통,움베르트 에코,베르나르 베르베르, 신영복, 오정희, 한강..

정도의 작가가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 말하려고 하는 책을 쓴 '요네하라 마리' 역시 이름만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작가이다.

작가의 전작을 모두 소유하겠다고 마음 먹게 되는.

 

위에 나열한 작가들 중 가장 재밌고 가벼우면서도,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가를 뽑으라면 단연 '요네하라 마리'일 것이다.

읽는 내내 소소한 웃음을 짓게하는 재주가 있는 여성작가다.

 

 

 

출판사 '마음산책'의 요네하라 마리 시리즈들은, '유쾌한 지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각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와 주제는 모두 다양하고, 글의 무게 역시 제각각 다르다.

이 책의 경우 초반->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씩 글의 무게가 더해진다.

(목차는 사랑의 법칙-이해와 오해 사이-통역과 번역의 차이-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 사이.

작가가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라 그런지, 소통이나 문화, 언어와 관련된 글들이 많아서 재밌었다.)

 

'차이와 사이'는 난소암의 재발을 알게 된 후 투병생활을 하던 시기에

일반 청중들에게 했던 강연들을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유쾌하고 소통하고 싶어하는 밝은 여성이 떠오를 뿐

투병생활 중인 작가의 글이라는 기색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게다가 50세를 훌쩍 넘어 쓴 원고임에도, 고루하다거나 진부한 느낌 없이

반짝반짝 위트가 넘쳐서 작가가 젊은 시절에 쓴 글인가 싶은 착각에 빠진다.

죽는 그 순간까지 참 '소녀' 같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D

 

 

 

아래는 책의 초반부인 '사랑의 법칙'의 일부분.

 

책으로 연구한 '사랑의 법칙'

 

  내가 '사랑의 법칙'을 연구하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후반이었다. 이 분야에 상당히 흥미를 가지고 있어, 줄곧 섹스나 이성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당시는 텔레비전이 드물던 시절이라 관심사에 대한 정보를 제일 많이 모을 수 있는 수단이 책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기뻐하셨지만, 나는 그쪽으로만 흥미가 있던터라 '아라비안나이트' 13권을 전부 읽었고, 그 밖에 명작이란 명작은 거의 다 훑었다.

 

...

 

세계 명작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돼먹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문학소녀였달까. 명작들만 읽으며 자랐다. 그런데 세계적인 문학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불쾌해졌다. 왜 그랬을까?

  소설의 전성기는 19세기라서 내가 읽은 작품들은 19세기에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모리 오가이,나쓰메 소세키, 나가이 가후, 이반 쿠르게네프, 미하일 레르몬토프, 오노레 드 발자크,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의 소설을 읽고 왜 화가 났느냐 하면, 일단 주인공은 남자고, 대개 남자의 눈으로 본 세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추남이거나 속수무책에 구제불능인 남자 등 여러 타입의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반면 그들의 연애 상대, 즉 낭만적 감정의 대상이 되는 여자는 하나같이 젊고 아름답다. 젊은 추녀나 젊지 않은 여자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주 한정적이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으니 젊기야 했지만 그렇게 미녀는 아니라서 거울을 보며 '평생 사랑은 못하겠구나' 하고 확신했고, 사랑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무렵에는 사라의 경험이라고 해봤자 짝사랑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것은 소설에서밖에 체험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대체 왜 남자는 젊고 아름답다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부분만 보고 여자를 선택하는 거야. 정말이지 돼먹지 않았어'라고 생각했다.

  그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는 남자를 어떻게 선택할까? 여자는 남자가 일하는 모습이나 성실한 성격, 혹은 섹스를 잘한다 못한다 하는 식으로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여지를 남겨준다. 남자는 구제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소설의 경우 19세기 작품은 대개 그렇고, 20세기에도 후반이나 되어야 겨우 아름답지 않은 여자나 젊지 않은 여자도 연애를 하는, 이런저런 가능성이 나오기는 한다. 그래도 소설의  본류는 여전히 19세기라서 그 시기에 만들어진 틀을 완전히 깨기는 어렵다.

 

 

이성 취향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대체 왜 그렇게 됐을까. 왜 그런 불합리한 일이 버젓이 통할까 생각해 보았다. 당시는 어렸던터라 얕은 생각해서, 여자는 생활이나 섹스를 남자에게 의존했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남자의 성실함을 보고 선택했지만, 남자는 여자로 인해 인생이 좌우되는 비율이 낮기 때문에-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하게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런데 이 취향이란 것이 상당히 미덥지 못하다. 나는 이런 타입이 좋다. 이런 타입이 이상형이다 하는 식으로 각자 취향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한 시대, 한 사회의 일정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취향을 보면 상당히 뚜렷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그 안에 있으면 자각하지 못하지만 다른 시대 혹은 외국이나 다른 민족, 다른 계층의 사람이 보면 취향에는  어떤 집단적인 경향이 발견된다.

 

... 

 

  나는 개 세 마리, 고양이 다섯 마리와 같이 살고 있다.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라는 책도 썼듯이, 늘 고양이에 둘러싸여 있어서 인간 수컷보다는 고양이 암컷과 수컷을 관찰할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암컷 고양이는 취향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인간처럼 계산을 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아무튼 아주 냉정하고 냉혹하다. 이런저런 수컷들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가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냐아~냐아~"하고 가차 없이 쫓아버린다. 그 행동이 아주 냉혹하고 무정해서 쫓기는 수컷이 안쓰러울 정도. 반대로, 마음에 드는 수컷에게는 암컷이 먼저 살랑거리며 다가간다. 대개 그런 수컷은 인간인 내 눈으로 봐도 괜찮다.

 

 

이성을 본능적으로 분류하면 세 종류

 

  방금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 여자도 지극히 솔직하고 천진무구한 사람들은 고양이처럼 행동한다. 마음에 안드는 남자에게는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반면, 호감이 가는 남자에게는 먼저 다가간다.

  보통은 인간 사회에 사는 이상 자신의 취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나도 속으로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누구에게든 무난하게 대응한다. 적당히 인사하고 적당히 인간관계를 맺지만, 마음의 소리에 솔직히 귀 기울이면 세상 남자를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여러분 가운데 열에 아홉은 나와 같을 것이다.

  A는 꼭 자고 싶은 남자, B는 자도 괜찮을 것 같은 남자, 그리고 C는 절대 자고 싶지 않은 남자, 돈을 준다고 해도 싫다. 절대 싫다. 모두들 사실은 그렇지 않을까? 대개 맞선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남자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여자가 더 까다롭다. 대부분의 남자가 C로, 나의 경우에도 90%가 넘는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남자와 자고 싶지 않다. 매춘부였다면 파산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적자다.

  지금 내 나이가 쉰다섯이니까 이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지, 젊었을 때는 속으로 이렇게 분류하면서도 '아아, 이런 식으로 남자를 차별하고 선별해도 될까, 아니, 이건 아냐'하고 죄악감을 느껴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18세기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법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지향한 시민운동으로, 부르주아 혁명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부르주아는 자본가가 아닌 상인계급을 말한다. 시민계급과 상인계급이 법 앞에서의 평등을 주장한 것이다. 또 1917년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인간의 법적 평등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지향했다. 아쉽게도 실패로 끝났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이 사회적, 법적, 경제적으로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가 찾아오는 날이 만에 하나 온다고 해도 이러한 성애性愛에 있어서의 불평등은 여전하지 않을까? 인기 많은 남자와 전혀 인기 없는 남자, 성격이 좋지 않은데 인기 있는 여자와 성격이 매우 좋지만 인기 없는 여자,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불평등은 여전히 남지 않을까? 그래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처럼 '후루'주아지와 '후라레'타리아(일본어로 후루는 '퇴짜놓다', '후라레루'는 '퇴짜맞다'란 의미로, 각각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에 빗댐) 사이에 메우려야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은 도저히 어떻게 안 될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