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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셰임 (Shame, 2011)

DidISay 2013. 5. 10. 01:47

오늘 일이 좀 꼬이는 바람에, 나와 K오빠만 어중간하게 시간이 떠서

기다리는 동안 영화를 보기로 했다.

 

둘다 이대 쪽에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트하우스 모모로 이동.

오빠가 나한테 영화를 고르라고 했는데, 다른 영화들은 이미 본데다가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시간이 안맞았다.

 

결국 지난주에 예고편을 봤었던 셰임이 기억나서 무작정 이걸보자고 하고 급하게 들어갔다.

상영시간이 촉박해서 스토리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로 입장;;

 

 

지난주에 셰임의 예고편으로 내가 얼핏 봤던 글자들은 아래가 끝.

 

7:30 샤워
10:00 회의 후 화장실
15:00 회사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
19:00 첼시의 핫 플레이스 바
22:00 허드슨 강변의 어두운 골목
24:00 침실의 노트북

 

난 별 생각없이 반복되는 현대인의 일상과 무료함이 주제인 줄 알았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있어서 내가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림(....)

 

 

 

왜냐하면 위의 저 글자들은, 섹스중독자인 주인공이 마스터베이션이나 실시간 음란물, 콜걸 등을 통해서

성적유희를 기계적으로 즐기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각주:1]

 

이 영화는 주인공이 주인공이니만큼 노출이나 성행위 장면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칠듯이 민망하다거나 난감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섹스중독자의 일상이 생각만큼 환상적이거나 격정적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먹는 밥은 지겹고, 매일 숨쉬는 공기가 특별하지 않듯이

주인공 브랜든의 '해피타임'은 전혀 해피해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말 그대로 끊어야지 끊어야지 이놈의 담배. 라고 하면서,

스트레스에 짓이겨 씁쓸하게 다시 한 개피 꺼내무는 흡연자의 모습이랄까;;

 

식사를 하는 순간에도 봐야하는 실시간 포르노나,

마치 매끼 챙기듯 벌어지는 자위행위는 전혀 자극적이지도 만족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섹스도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면, 브랜든이 누리는 섹스의 질은 아주 형편없어 보인다.

그저 허겁지겁 해치워버릴 뿐인, 패스트푸드 같은 영양가 없는 섹스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글의 중심인물은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뉴욕의 여피족 브랜든과

어느날 갑자기 그의 일상에 끼어든 브랜든의 동생 씨씨이다.

이 남매는 둘다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는 특징-_-을 가지고 있는데,

둘다 이 허한 감정을 성적인 행위를 통해 해소하려고 한다.

 

회사에서도 포르노그라피를 감상하며 화장실에서 해결하는 브랜든과

만난지 한시간도 안된 상태에서 유부남과 오빠의 집에서 성관계를 맺는 씨씨.

그리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두 남매의 관계는 얼핏 봐도 정상적이진 않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브랜든은 깊고 사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저 단발적인 섹스나 화면을 통한 성관계를 맺으며 허함을 해소한다면

씨씨는 성관계를 통해 상대방의 애정을 확인하려 하고 그에게 집착한다.

 

브랜든에게 섹스가 감정적으로 의지해야하는 관계에 대한 욕구를 막아준다면

씨씨는 섹스를 통해 타인과의 소통을 열려 한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인성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씨씨는 자신의 오빠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브랜든 역시 동생의 절망을 그대로 외면하지 못한다.

또한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문을 굳이 잡아,

노부인을 도와주는 착한 마음을 발휘하기도 한다.

 

 

"우린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상처받은 사람들일 뿐이야."

 

 

 

브랜든은 자괴감을 주는  반복적인 행위에서 벗어나고자 모든 음란물을 처분해보지만,

오히려 사랑하는 여자와는 성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신만 확인한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더 강한 자극. 더 일탈적인 섹스이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쓰리썸을 하는 브랜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남자들의 환상 1위를 차지한다는 그 장면 속에 있는 주인공의 표정이

왜 그리 허무하고 슬프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음악과 화면을 참 잘 구성했다는 것인데,

멀리서 동떨어지게 들리는 음향효과라든가

공허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섹스신들.

황폐해보이는 도시의 배경들은 자극적인 소재들을 무미건조하게 보여준다.

시기적절하게 사용된 음악들이 아주 일품. OST  꼭 사고 싶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건 우리 모두의 이야기.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

그 모두의 것이다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소통하지 못하고, 소통하고 싶어도 방법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

스트레스를 받거나 걱정이 있어도

그저 길거리를 뛰며 방황하거나, 돈을 이용해 풀 수 밖에 없는 현실..

 

 

주인공의 연기도 참 인상적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도 좋았던 영화.

 

 

 

듣기만 해도 외로움과 스산함이 밀려오던..

 

 

 

Chic의  ‘I want your love’

영화에서 워낙 강렬하게 들렸어서, 이렇게 들으니 오히려 그 맛이 덜하다. '-'

 

 

 

 

  1. 이런 식으로 아무 생각 없이 개봉 첫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 본 영화가 몇개 있었는데, 가족영화처럼 따뜻한 이야기라면 괜찮지만 예상과는 달리 파격적인 대사나 장면이 들어있다면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하녀'를 데면데면한 남자선배와 함께 본 1人 -_-)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