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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러스트 앤 본 (Rust & Bone, 2012)

DidISay 2013. 5. 10. 01:21

씨네큐브에서 훌쩍 보고 온 러스트 앤 본

'예언자'를 만든 감독인데다가, 마리옹 꼬띠아르 주연이길래 망설임 없이 예매 :D

 

영화 제목이 다소 난해해서 아주 철학적인 영화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예상보다 더 편안하게. 그리고 인상깊게 보고 왔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여러모로 결핍된 사람들이다.

남주인공 알리는 3류 길거리 복서로, 어느날 아들을 떠맡게 된 막장인생이고

여주인공 스테파니 역시 자신이 사랑하던 직업 때문에 다리를 잃게 된 범고래 조련사이다.

 

둘의 사랑 이야기는 그리 달달하거나 핑크빛이지 못하다.

스테파니의 사고 이후 알리는 그녀와 종종 연락을 하며 교류하게 되지만,

그것은 어떤 계획이나 약속, 책임을 전제한 관계라고 보기 힘들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사고 이후 막막함+자격지심으로 인해

지인이 아닌 생판 남에 가깝던 알리에게 연락한 것으로 보이고

알리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를 돌봐주지만, 그 기한이 언제까지일지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저 그녀가 청하면 올 뿐. 어떤 미래도 말하지 않는다.

 

알리의 삶은 자신의 아들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고,

그저 당장의 배고픔. 당장의 성욕에 끌리는대로 살아가는 동물에 가깝게 보인다.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땡기면 상대 안가리고 섹스를 하며, 배고프면 주워먹는다(..)

또한 그의 자아실현은 격투라는. 직접 몸에 와닿고 땀을 흘리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화에서는 그다지 불쾌하지 않게 표현되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만약 내 여동생이 사귄다고 하면 두손 들고 말리고 싶은 남자다. -_-

 

하지만 오히려 이 가벼운 점이 스테파니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

그저 툭 하고 '수영할래요?' '섹스 해보면 되죠'하고 대사를 던질 때는

괜시리 내가 멍.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

 

 

 

 

 

어찌되었든, 스테파니는 좌절에 빠져있던 사고 후의 삶을

알리와의 관계를 통해 다시 햇빛도 쬐고 수영도 하며 일상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게 되었고,

알리 역시 길거리 복서로 이름을 날리며 서서히 자리 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테파니가 무릎까지만 남은 다리로 수영하는 모습이나,

알리와 성관계를 맺는 모습은 처음 보는 장면인데도 굉장히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는데

어찌보면 굉장히 민감하고 불편할 수 있는 소재를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예쁜 언니는 다리를 잃어도 참 예쁘구나 싶었;; =ㅁ=)

 

 

 

 

하지만 모든 관계가 언제까지 그렇게 물 흐르듯.

아무런 책임도 감정도 없이 흘러지나갈 순 없는 법.

 

그리고 이 과정들을 해결하거나 풀어나가는 방법 역시

이 영화에서는 밀도 있거나 촘촘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실제 삶과 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의 사건들은 좀더 느슨하고 엉망진창으로 흘러갈 때가 많으니까.

 

 

 

 

모든 것을 재만 남기는 폐허와 같은 상실의 경험은

스테파니의 아름답던 두 다리를 앗아가기도 했지만,

알리가 아들을 상실할 뻔한 경험은 이 두 사람을 다시 잇게 해주는 교량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범고래를 다시 찾아가,

예전과 같은 교감을 꿈꾸고 그 공간과 시간을 그리워 한다.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아닌,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삶을 살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재'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더 강해진 뼈를 가지고

좀더 밀도가 촘촘한 인생을 살아갈거라 믿는다.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아픈 과정을 거쳐 얻게 된 사람인지.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문득문득 기억하면서...

 

 

사람 손 하나엔 27 개의 뼈가 있다.

뼈가 더 많은 영장류도 있는데,

고릴라는 32 개이다.

인간은 27 개이다


팔이나 다리 뼈가 부러지면, 석회화가 되면서 뼈가 자라난다
팔 다리는 골절 후 더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손이 골절되면 제대로 붙지 않는다
주먹이나 손을 쓸 때마다 의식이 될  것이고 조심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통증이 찾아올 것이다
마치 바늘처럼
마치 유리 조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