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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한강

DidISay 2013. 6. 12. 02:58

오페라 라보엠의 아리아와 동명인 이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우연히  주인공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 작가 H의 서술로 이루어지는 외화.

그리고 주인공  '장운형'의 1인칭 시점인 내화로 짜여져 있다.  

내화는 장운형의 유년기 /L과 E 두 여성과 장운형의 관계.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한강의 작품엔 예술가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덕분에 작품을 읽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고,

마치 오랫동안 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처럼 소설의 감정을 계속해서 되씹어보게 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각가'이다.

그는 주로 여성들의 손이나 인체를 석고로 떠서, 뜯거나 긁어 변형을 시키는 작품을 만든다.

 

보통 어떤 작품이나 사람에 끌리는 이유는,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지점을

대상이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아름답고 매끄러운 그리스의 조각들과는 달리, H는 조각을 통해

어머니의 염습과 병석에 누운 이모의 일그러진 반쪽 얼굴을 떠올린다.

작품들은 '불타버린 거인의 유해가 남긴 한조각의 뼈와 살 덩어리'같은 인상으로

모델이었던 L이나 E는 모두 불안정하고 상처받은 인물들이었다. 

 

 

내 사라진 손가락의 희미한 흔적....그것이 전부인가? 내가 감추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처음에는 손가락을 감추려고 했지, 그 다음엔 손가락을 감춘다는 것을 또다시 은폐해야 했고...네가 날 뜨고 싶다고 했을 때, 마치 내 가죽을 벗겨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지. 네가 만든 껍데기들....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난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내 껍데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그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 어쩌면...어쩌면 말이야. 이 껍질들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어. 끝까지 벗겨낸다 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 네가 혼란을 느꼈다면, 진짜 나를 알고 싶었다면, 이제 알아둬. 내 화장, 내 몸놀림, 내 표정...그래, 네가 뜨고 싶어했던 내 얼굴, 이게 나야.

 

 

L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다란 육체 때문에 언제나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였으며,

E는 사회촌동네의 육손이로 태어나 놀림 받고 조롱받는 유년기를 보냈다. 

 

L은 다이어트에 성공해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과 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컴플렉스와 체중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폭식과 거식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E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 된 뒤에도,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를 갖는다.

 

너덜너덜한 조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텅빈 공간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껍데기가 있다한들 그 어둠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껍데기를 바꾸어보아도 내면의 나까지 바뀌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이 조각들을 만든 장운형은 도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여성의 몸을 떠서, 그 껍데기로 관을 삼고 싶어하는 장운형.

한겹의 껍데기가 생기면 자신의 껍데기는 벗어던질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가 대중적인 아름다움이나 일반적인 육체에 끌리지 않고,

비틀어지고 어둠을 숨기고 있는듯한 존재만 찾아다니게 된 근원에는

그의 가족들이 있다.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소화해내야만 하며-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진실을 믿기 때문에 깊이 상처 입으며 쉽게 회복되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 그들의 삶은 나에게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나로 말하자면, 착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똑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그의 외삼촌은 불구가 된 손가락을 언제나 은폐했다.

겉으로는 언제나 할 말 다 하는 것 같은 거침없는 삶을 살았지만,

실상은 인생의 낙오자에 가까웠고 망나니였으며

불구가 된 신체를 당당히 내보이지 못하는 약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한결 같은 미소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의 감정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매우 의식한다.

아버지 역시 별반 다르진 않아서 감정노출이 거의 없이 사람 좋은 모습이나,

실제로는 자신의 옛여자와 아이를 버리고, 돈과 성공이 보장되는 결혼을 선택한 냉혈한이었다.

 

 

 

 

 

가족들의 가면을 언젠가부터 눈치채게 된 장운형은,

어느새 자신도 이와 비슷한 껍질을 자신의 얼굴에 쓰게 되며 

가장 좋아하던 어린 누이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태로 변해버렸다.

진실을 믿기 때문에 깊이 상처 입으며 쉽게 회복되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을 조롱하지만

사실은 그가 저런 유형의 사람이었던 것.

(읽는 내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떠올랐다 -_-;;)

 

이후 그는 모든 대상에 대해 열정도 고통도 없는.

그저 객관화를 하며 관찰할 뿐인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그가 처음으로 몰두하기 시작한 대상은, 자신의 내면이 가장 드러나지 않는 '손'이었다.

 

진실을 감춘듯한. 하지만 곧 탄로나버릴 불안한 탈.

하지만 이건 역설적이게도 장운형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신체를 떠도 계속해서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내 작품들에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배어 있었다. 최대한 절제하여 숨겼음에도 드러나는 나의 감정, 노력, 나의 개인사를 나는 읽었다. 그것은 마치 내 발치에 누운 내 시체를 똑똑히 내려다보는 악몽과도 같았다. 누군가 그 손들을 일일이 펼쳐 내 손금을 읽을 것 같았다. 내 삶의 텅 빈 중심을 들여다보고 말 것 같았다.

 

...

그러나, 가리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것인가? 침묵하면 그만 아닌가. 손을 멈추고 있으면 그만 아닌가. 보여주면서도 집요하게 숨기고자 한다는 것은 어떤 모순인가.

 

...

 

그 동안 내가 혼을 불어넣어 빚어냈다고 믿어왔던 어떤 형상들보다 강렬하게 그 손은 실재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을, 숨결을 훔쳐 감쪽 같이 내 것으로 만든 듯한 전율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 속에는 혈관도 근육도 뼈도 없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그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섬뜩했고, 차가웠으며, 비인간적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이런 형상들을 제작하고,

어딘가 상처 입은 것 같고, 무엇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대상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길 바라는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숨겨놓은. 숨기고 싶은. 추악할지도 모르는 진실을

누군가가 비판이나 판단 없이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

 

 

 

이런 감정들 때문에 그는 마땅한 이유도 없이 L을 돌보며

E가 숨기고 있는 상처를 알아내고 싶어한다.

그는 그녀들을 걱정했고. 그녀들의 진실을 궁금해했지만

사실 그건 자신 안에 숨겨진 또다른 자신을 파헤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게 되었을 때, 이해받고 이해할수 있었을 때,

진실에 대한 환멸을 느끼던 순간 깨졌던 그의 '안경',

그의 세계는 이번에도 다시 한번 금이 간다.

그들의 차가웠던 손도 따뜻하고 피가 흐르는 육체로 변화하였고.

 

드디어 다른 세계로 가게 된 그들은

이제는 행복할까.

 

 

 

 

+ 책 내용과 무관하게, 좋았던 구절 하나.

 

  "돼지 같은 행복이었죠. 모두들 날 혐오하는데, 나 혼자 그러려니 포기하구 있었던거죠.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어."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들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한테는 타인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들 없이 내가 살 수있어요?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문득 나는 다소 장난스러운 마음이 되어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봐. 네가 태어나면서 이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잖니. 네가 죽으면, 다 끝난다는 거지."

  그녀는 볼멘 목소리를 높여 투덜거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내가 죽어두,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갈거잖아요."

  "그러니까, 너 없이 돌아갈 그 세상이라는게 너한테 무슨 의미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