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서울 이야기-정기용 본문

소리내어 책 읽기

서울 이야기-정기용

DidISay 2013. 7. 14. 04:12

오늘도 집을 나서서 출근을 한다. 마을 버스를 타고 골목골목을 지난다. 가끔 햇빛이 좋은 날. 바람이 유쾌한 날엔 일찍 나와 길을 걷기도 한다. 주택가를 지나면 나오는 빌딩숲. 넓직한 차도들. 한강변의 공원들과 나무들. 그리고 다시 나오는 크고 작은 아파트들.매일 오가는 식당가들, 도서관들. 커다란 학교건물들. 날이 더울 때면 종일이라도 머무는 카페촌. 차가운 강바람.

가끔은 창문을 크게 열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스크린을 내리고 집에 영화를 본다. 내 노트북은 방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고, 정면 창가 바로 아래엔 빨간색 소파가 놓여져 있다. 창문을 바라 보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사르륵 잎사귀 스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다. 요즘같은 장마철이면 유독 빗소리가 커다랗게 들리는 공간이다.

마음이 적적해질 때면 그에게 연락을 한다. 함께 동네와 공원을 걷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저녁이면 음악분수가 울려퍼져서 항상 그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하에 위치한 이마트에 들려 장을 볼 때도 있는데 몇년동안이나 돌아다닌 곳이라 동선이며 놓은 위치가 언제나 익숙하다. 주말 저녁에는 집이나 단골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늦은 새벽. 혹은 밤까지 밀린 일이나 공부를 하다 잠을 청한다. 한가로울 때는 팟캐스트나 라디오를 나직하게 켜놓고 책을 읽는다. 언제나 침대맡에 놓인 스탠드를 켜고 조금더 시간을 늦춰보려 애를 쓰다 까무룩 잠이 든다.

오늘처럼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반복되는 일상일게다. 몇가지가 조금 빠지고 더해지긴 하겠지만...  

 

 

내 하루의 흐름이다. 우리는 누구나 일종의 리듬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 그 주기가 매일 혹은 일주일이나 그 이상의 단위가 될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천재지변을 겪거나 여행지에서 깨지 않는 이상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가끔은 이 반복되는 리듬이 지겨워 일탈하는 마음으로 외도를 해보긴 하지만,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처럼 새로운 장소에서는 언제나 낯익은 저 공간을 그리워 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삶의 공간을 회수해버린다면 우리는 이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겠지. 하루하루의 삶은 우리 인생의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때문에 집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곧 나를 대표하고 정의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태준의 '돌다리'에서 병원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땅을 팔라고 설득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 돌다리처럼 단단한 신념을 보여준다. 저 곳은 내 아이들이 어릴 때 고기를 잡던 공간이며, 서울로 유학을 갈 때 떠나가던 땅이라고. 내 부모님 산소의 상돌을 옮긴 곳이며, 내가 어릴 적에 글을 읽으러 밟았던 곳. 그리고 나의 아내가 가마를 타고 왔으며, 내 가족이 죽으면 묻힐 그런 공간이라고 말한다. 땅은 천지만물의 공간이며 내 가족과 내 삶의 흔적이기 때문에 땅을 홀대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김소월은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과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라는 시구로 우리 민족의 머리속에 박혀있는 장소애를 보여주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 익숙한 경관. 그것은 우리 먼 조상에서부터 오늘날 투기업자까지 목마르게 추구해온 '배산임수'라는 집터다. 죽은 사람도, 산사람도, 고향 토박이도, 타향에 사는 사람도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 부른 공간. 그것이 아파트인지 기와집인지는 몰라도 산과 강 사이의 경계에 있는 집터의 경관만은 우리의 머리 속에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달래와 마늘의 향이 나는 한국인의 토모필리아이다. 우리의 윗세대들이 "엄마야 누나야"라고 부르던 고향의 원형이다.

 

장소애(場所愛), topophilia)는 인간의 안정된 삶을 보호하는 터전인 장소에 애착하는 심성이다. 근대 이전에는 땅과 집이 대표적인 장소애의 대상이었으나, 근대 이후 도시사회에서는 이들이 도구적 대상이나 교환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80년대생인 나와 그 아랫세대들에게 저 공간은 그리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제 우리 세대가 살고 싶어하는. 혹은 손쉽게 살 수 있는 곳은 차라리 남향 로얄층의 수도권 아파트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그 규모가 투기에 가까운 것이든 혹은 소소한 평수 늘리기든 부동산을 통해 재산증식을 꿈꿔왔다. 지금에야 하우스푸어니 부동산 거품이 빠지느니 하지만, 적어도 최근까지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윗세대들은 지방에서 올라와 치열한 서울살이를 하면서 자식들의 교육에 매진했고, 아파트에 입주하며 기뻐했다. 현재 김소월이 노래한 '강변'은 이미지로서의 '모국母國'이 되어버려 실체가 사라진 공간이 되었다. 결국 현재 우리 대부분은 '디아스포라'로서. 아스팔트의 길에서 울려퍼지는 구급차의 경보음처럼 외치며 경쟁하고 투쟁하고 땀 흘리며 살아가는 타자가 되어버렸다. 서울은 수많은 디아스포라의 이국땅이다.

 

 

 

집은 그저 투기의 대상. 재산증식의 대상으로 환산될 뿐이며, 이 계산에는 삶에 대한 어떤 추억이나 애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살아갈 인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그저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하지만 마치 잘 포장되어 나오는 마트 위의 상품처럼, 크기와 가격은 적절한지, 연식은 어떤지, 건설회사의 브랜드가치는 어떤지 집을 살피는 것은 이제는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불행하게도 바로 이 상식 때문에 우리들의 '삶' 역시 그저 상품처럼 변질되어 버렸다. 이제 '강변'은 돈으로 정의내려진다.

 

매일매일 공사 중인 도시의 풍경들. 도심의 풍경은 불과 1,2년만 지나도, 낡은 건물은 사라지고 새 건물들이 들어서거나 리모델링을 통해 거리의 모습이 변해버린다. 이런 사회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집에서 산다'기 보다는 화폐경제를 움직이는 존재로서 교환가치의 편리함을 나날이 증명한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기용이란 이름을 알게된 것은 '무주 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 을 통해서였고,그 뒤에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를 통해 다시 접하게 되었다. 정기용님의 작고 뒤에 열린 한 전시회를 통해서 이분이 쓴 글과 영상들을 다시 보게되었을 때, 이분의 철학도 참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글을 정말 잘 쓰는 건축가란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를 다녀온 뒤에는 기쁜 마음으로 정기용 님의 책을 몇 권 구입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서울 이야기'이다.

 

그간 정기용씨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발표한 글들을 모아놨는데, 90년대 초반의 글부터 2000년대 중후반의 글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이런 일도 있었지. 이때의 흐름은 이랬구나 싶어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글 역시 크게 어렵지 않고 술술 잘 읽혀서 비전공자인 내가 읽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주제는 매 챕터마다 다양했는데, 날카롭고 성찰이 담긴 글들이라 한 편 한편이 허투루 읽히지 않고 묵직한 느낌이다. 덕분에 책을 다 읽은지 한달즈음이 되었는데 계속 미루다가 이제야 평을 쓰게 되었다.

 

자신이 사는 공간. 내가 살아가는 도시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밌게 볼 수 있을만한 책. 이런 건축가가 이제 세상에 없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부디,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