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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000킬로미터-마누엘레 피오르

DidISay 2013. 6. 13. 04:52

"이곳에서 우린 영원한 이방인이야,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은 우릴 이방인으로 보겠지. 우린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우리는 유배자, 방황하는 영혼일 뿐이야"

 

 

"사람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면, 식물을 좋아하게 된단다. 스폴레부스크(치명적인 독초)보다 독한 사람에게 데고 나면 말이지."

 

첫사랑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책.  '초속 5000킬로미터'

바스티앙 비베스의 '염소의 맛'이 미처 이루어지지 못한 아릿한 사랑의 설렘을 보여준다면

이 작품은 나이들어가는 인물들의 쓸쓸함과

내 마음 속 중심이었던 사랑이 어느덧 추억이란 이름으로 덮여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시작은 아버지가 떠난 후 이탈리아의 소도시로 이사온 루치아를

그 맞은편에 살던 피에로와 그의 친구 니콜라가 훔쳐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잘 생긴 얼굴로 바람둥이 노릇을 하는 니콜라와 새초롬한 루치아.

그리고 머리가 좋지만 꿈이 없이 그저 평범한 피에로

이 세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지나 했더니, 

이야기는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훌쩍 점프해버린다.

 

 

입센을 전공하는 학생이 된 루치아는 4달간 노르웨이에 하숙을 하며 머물게 된다.

떠나오기 전부터 루치아와 피에로 커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갈등을 겪었고,

이별을 고하는 루치아의 편지를 끝으로 그녀는 하숙집 아들 스벤과 연애를 시작한다.

 

 

그 다음 장면은 이집트의 카이로.

고고학자가 된 피에로는 성마른 여친에게 시달리고 있다.

발굴장소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는 열에 달뜬 채 꿈을 꾸는데

루치아와 재회하는 꿈. 그리고 니콜라와 루치아가 그 몰래 바람을 피는 내용이다.

아마 그는 아직 루치아를 완전히 잊지는 못했나보다.

 

 

한편 노르웨이에 있던 루치아는 임신을 해서 스벤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느덧 이 두 사람은 열정과 대화가 모두 단절된 부부의 모습이다.

결국 피에로와 관련된 기사를 우연히 발견한 어느 날 아침.

이들의 관계는 언쟁 끝에 종결된다. 그리고 루치아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쯤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맺어지겠구나 했는데..

우리 마누엘레 피오르 아저씨가 주인공을 행복하게 둘리가 없지 -_-;

 

 

 

이집트에서 피에로는 애인에게 임신을 통보받고,

루치아에게 연락이 오지만

이들의 만남은 서로의 근황을 알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10년쯤의 세월이 흘러,

아름답던 루치아의 몸매는 이제 후덕해졌고,

피에로 역시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온 유부남이다.

 

오래된 술집에서 처음 재회한 이들은 술을 진탕 마시고

시시껄렁한 농담과 신세한탄을 주고 받는다.

어둑한 술집 화장실에서 정사도 시도했으나,

첫사랑의 기억을 훼손시키기 싫었던 루치아에 의해 이는 중단된다.

 

그 와중에 피에로는 찌질하게 시리-_- 항상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놀던 니콜라와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니냐고 캐묻지만

루치아는 그는 단지 단짝친구를 나에게 뺏기는게 싫었던 것 뿐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이후 장면에서 루치아는 니콜라와 연인 사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어릴 적 그 예쁘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고.

이미 아무 의미가 없어진 사람일지언정. 피에로의 기억 속에 풋풋한 사랑의 상대로 남고 싶은 마음에

현재 니콜라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 했을거라 생각한다.

저런 이유 때문에, 정사를 나눌 때 계속 피에로가 루치아의 얼굴을 보려하자

더이상 하지 못하고 중단했던 걸거고..

 

 

 

 

이별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나 5000킬로미터의 거리로 떠났던 그들은,

이제는 더 이상 떠나지 않고 한 사람. 한 곳에 정착할 것이다.

피에로는 그 가족에게. 루치아는 니콜라에게.

루치아는 지방공립학교의 문학선생으로 니콜라와 함께 아이를 양육할거고

피에로는 가족과  이집트에서 발굴조사를 계속하겠지.

 

한번도 제대로된 통보를 하지 않고,

지지부진한 미련과 추억을 이어왔던 이들의 관계도

이제서야 어설프게나마 매듭지어 졌다.

 

우리 다시 만날거냐는 피에로의 질문에

그래서 루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니까.

 

 

 

 

 

그리고 이 책의 끝은 다시 이 두사람의 과거로 회귀하며

첫사랑에 빠져있는 어린 연인들을 비춘다.

 

이 모든 과정을 보고 나니 이들의 사랑이 참 풋풋해서 마음이 초록색이 된 느낌이기도 했고,

제목처럼(노르웨와 이집트의 거리 5000킬로미터를 두고 통화할 때 생기는 시차 1초)

아주 미세한 간극을 두고 자꾸 어긋나는 이들의 마음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랑은 그저 잊고

현실에 맞춰 저렇게 살아가는거겠지 싶어서 괜시리 쓸쓸해지기도 하고.

 

철길 따라 늘어선
아무도 없는 객차에 앉아
창문 너머 멀뚱히 바라보니
현재가 과거를 부수고 있더군.
문득 내 얼굴도
지난여름처럼 변했지.
땅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은
그때 그 옷차림.

-페데리코 퓨마니, 엘레나(1984)의 가사 한 구절

 

 

매 장마다 바뀌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휙휙 변화하는 인물들의 감정이 좋았고

그에 맞춰서 색감이 잘 조절되어 있어서 같은 얼굴이어도 느낌이 많이 달랐다.

펜선 없이 그려진 수채화의 느낌이, 마치 햇빛이 종이 너머로 번져오는 느낌이라 인상적이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