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그 청년은 어느 아파트 2층에서 조용히 살 고 있었다. 옆집과는 전혀 교제가 없었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다.
식품이나 술 등은 일주일에 한 번 몽땅 사고, 나머지 시간에는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고 지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한 생활이었으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개월 전까지만 하여도 이 청년은 모범적인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회사에 근무하였고 근무태도 또한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뭔가에 씌었는지 어느 날 청년은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다. 출장을 수금한 돈의 일부를 올라오는 길에 써버린 것이다. 술을 마시다 기분이 좋아진 김에 계산을 그 돈으로 한 것이다.
술이 깬 후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거액은 아니더라도 공금을 써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메꾸면 되지만 그에게는 그런 붙가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이미 여러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빌릴 수 있는 곳이 더 이상 없었다.
상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월급에서 조금씩 갚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돈을 맡길 수 없다고 여겨지면 승진 가능성도 없어진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거액이 아니라도 유용한 사실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청년은 결심하였다. 즉 수금한 돈을 전부 챙겨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은행에 들러 수표 등을 현금으로 바꾸었다. 꽤 큰 금액이었다. 아무 일도 안하고도 3년은 살 수 있었다.
그는 그 길을 택했다. 하지만 시골 산속에 숨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 많은 도시에 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값을 선불로 내고 이 아파트에 방을 하나 빌렸다. 이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짐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사 주소를 엉뚱하게 알렸으므로 이곳에 있는 것을 들킬 염려는 없다.
...
마음 편한 생활이었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조금씩 심심해졌다. 사람들과 대화라는 것을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이 방에는 전화도 없었다. 어디에 걸 필요도 없고 걸려 올 일도 없었다. 서류가 올 일도 없다. 그가 여기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배달되는 것은 신문뿐이다. 이곳은 사회에서 분리된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요즘 청년은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람과 관계가 없는 생활이 이렇게 계속되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창가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는 습관이 몸에 뱄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바쁘게 일하겠구나. 사람 눈을 피하지 않고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부러울 뿐이었다.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던 청년이 갑자기 "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학창시절의 친구를 찾는 것이다. 집에서 나와 뒤를 따랐다. 저 녀석은 믿을 수 있다. 내 이런 사정을 알고 난 후에도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뛰면서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겨우 따라잡고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야!"
"누구세요?"
상대방은 뒤돌아보며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학창시절에 함께 지내던...."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대고 그 외에 생각나게 할 일들을 두 세개 이야기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 학교를 다닌 것은 확실한데 당신의 얼굴은 기억나질 않네요. 이름도 모르겠군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해 봐. 같이 놀았잖아. 나를 잊어버리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잘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접니다. 저를 자세히 보세요. 사람을 잘못 보신 거 맞죠? 저는 친구를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에요."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황하는 청년을 뒤로하고 그 남자는 사라졌다. 그놈은 확실히 친구가 맞다. 이건 어떻게 된것일까. 우정의 표시일까. 교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목격하면 연락을 달라고 미리 경찰에서 통지가 가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만나도 모른 척하는 것이 우정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황이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기 위해 취한 행동일까.
청년은 집에 돌아가 여러가지로 생각해 봤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만난 친구에게서 그런 배려의 마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 녀석은 정말 날 모르는 것이다. 그런 표정이었고 말투도 그랬다. 그는 기분이 안좋아졌다.
내 인상이 바뀐 것일까. 이런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생각에 거울을 쳐다봤지만 운동부족으로 약간 살이 찐 것을 뺴곤 전과 다름없었다.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해 청년은 밖에 나가 자기가 다녔던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조금 전에 만났던 친구의 이름을 물어보니 확실하게 그 학교에 다녔고 졸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런 사람은 명단에 없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
청년은 집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하였다. 나는 외아들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아껴주셨다. 그러나 중학교 때 아버지가 일을 하시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지만 보상금이 꽤 나왔고, 작은아버지가 도와주신 것도 있어서 어찌어찌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는 정말 슬펐다.
이런 내 과거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청년은 몸을 떨었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나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니...
넓은 평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걸어도 걸어도 누구를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외로움이 더욱 밀려왔다.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래, 회사로 가보자. 돈을 가지고 도망간 일로 처벌을 당할 것이고 승진도 포기해야겠지만 그곳에는 나를 인정할 사람들이 있다. 나쁜 사람 취급을 받더라도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다.
....
그러나 모두 이상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참을 수 없었던 청년은 회사에서 뛰쳐나왔다. 누가 어떤 버릇이 있고 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아는데, 그 당사자들은 나를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경찰뿐이다. 청년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나쁜 일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체포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자수하는 것이 처벌도 가벼워지고요. 그런데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회사 돈을 횡령했습니다."
상대는 자리를 비우고 다시 돌아와서는 말했다.
"그런 신고는 접수된 적이 없는데요."
"대외적인 신용을 고려해 내부적으로 처리한 것 같군요. 하지만 저는 실제로 수금한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갔습니다.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요."
청년은 유치장에 감금되고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돈을 수금했다는 가게에 물어봤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고 당신이 전에 살았다는 아파트에도 물어봤지만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하는군요. 말할 것도 없이 회사에 가서 장부를 조사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잘 들어요. 당신이 말하는 본적지에도 문의를 했어요. 그 호적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재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 일이...."
"너무 일에 매달려서 죄책감에 시달린 것이겠죠.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당신을 더 이상 여기에 둘 수는 없어요.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
"기억상실은 아니에요. 당신은 잘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상한 것일까요?"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당신한테는 그렇겠네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증상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좋잖아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그런 차가운 지인들은 당신이 먼저 인연을 끊어버리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새로운 지인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어떻게요?"
"제 친구 중에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뉴스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죠. 거기에 출연해 보지 않겠어요? 잘되면 당신의 옛 지인들이 연락을 줄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을 이용하면 상황이 좋게 변하지 않을까요?"
"그러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사의 권유로 청년은 텔레비전에 출연하였다. 프로그램 사회자는 이렇게 소개했다.
"오늘은 신기한 분을 모셨습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다른 세상에서 오셨다는 말씀인데요. 자, 말씀 좀 해보세요."
사회자의 재촉에 청년은 카메라를 향하여 말했다.
"누구 저를 아는 사람은 없나요....?"
청년은 그 말을 반복하기만 하였다. 진실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랬다. 누구라도 좋았다. 아는 사람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목소리에는 마음을 흔드는 뭔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방송국에 전화를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반응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어느 광고에이전시에 다니는 사람이 우연히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인걸. 하지만 잘만 하면 쓸 수 있겠어, 저 사람의 말투....마음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어."
바로 청년에게 광고출연을 제의했다. 청년은 그것을 승낙하였다. 기억하는 사람이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신제품 광고였다. 제품을 앞에 두고 청년이 말한다.
"누구 저를 아는 분은 없나요....?"
청년은 필사적이었다. 진지함이 담겨져 있는 그의 말투는 상당한 광고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저런 목소리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순식간에 그 청년은 유명해지고 광고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그곳 사람들도 환영해 준다.
"어서 오세요! 어머, 광고에 나오시는 분 맞으시죠? 잘 보고 있습니다. 자, 이쪽으로...."
레스토랑에서뿐이 아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언제나 보고 있어요. 앞으로도 자주 오세요."
어디를 가도 그렇다. 물건을 사러 가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누군가가 말을 건다. 모두 청년의 얼굴을 안다.
지금에 와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람인 것이다. 모두가 미소를 지어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고 친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청년은 전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