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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만나는 시간

조선 시대의 셀카: 자화상-강세황

DidISay 2012. 1. 22. 17:56

 



한국화는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로 보면 감흥이 잘 안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림에 한자라도 쓰여있으면 해독하는 것부터 막막해지기 시작하면서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인물화의 경우엔,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당시 화풍이 어떠했는지를 알지못하면 그림의 가치를 알기란 쉽지 않다.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화 중에 하나이다.

 

 

 

이 그림엔 머리와 수염이 하얀 노인이 앉아 있다.

머리에는 관복을에 맞추어 쓰는 오사모를 썼고, 몸에는 평상복인 푸르름한 옥색의 도포를 입었다.

배경은 모두 생략되어 있어서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얼굴은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 얼굴의 7,80%정도가 나타나는 모습인 7,8분면상이다.

 

 

 

자세나 구성,도상들은 모두 전통적으로 애용된 것들인데,

얼굴을 자세히 보면, 움푹 들어간 눈이라든가 깊이 파인 뺨, 미간의 세로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명암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명암표현한 위치가..여자들이 색조메이크업 하는 위치와 대략 일치한다-ㅁ-;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실제 그림을 보면 뺨 양옆이 마치 미용화보에서 볼터치(...) 하는 것을 설명할 때 쓰는 그림처럼 

짙게 음영표현을 해놓았는데, 이런 표현법은 서양화풍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적용한 것이라 한다.

 

이 작품은 강세황이 70세 때 그린 자화상으로 노년기의 선비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직접 그린 것이다.

서양의 경우 유명한 화가들은 흔히 자화상을 반복하여 그렸다.

특히 렘브란트의 경우엔 자화상을 100점 정도 남겼는데,많은 정성을 들여야하는 그림이 이정도 였으니...;;

요즘에 태어났다면 싸이홈피를 사진으로 가득 채우는 셀카쟁이가 되었을 것 같다... -_-;

 

 

 

그러나 조선시대동안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거의 없다. 조선 후기에도 윤두서와 강세황 정도를 손꼽을 수 있을 뿐이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강렬한 자의식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다.

보통 셀카에 허세가 담긴 글들이 기본 양념처럼 들어가는 것도 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전체적인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던 유학적 가치관 아래에서 자화상은 등장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조선시대 내내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윤두서와 강세황은 조선 후기 활동하면서 서양화풍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자화상에도 입체감을 강조하는 수법을 시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그림의 포인트는 다른 데에 있다.

그림을 다시 살펴 보면, 머리에 쓴 오사모는 관복을 입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세황은 평소에 입는 도포를 입고 있다.  양복 상의에 츄리닝을 입은거나 다름없는데..왜 이런 모습을 굳이 그린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강세황은 이 상황에 대해 자신이 배경에 쓴 글을 통해 해명하였다.

 

 

 

 

그림의 위쪽에 좌우로 나뉘어 명필의 해서체로 쓴 강세황의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머리에 오사포를 쓰고 야인의 옷을 입었네.

 

여기에서 볼 수 있다네.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이 조정에 오른 것을. 

가슴에는 많은 서적을 간직하고 필력은 오악을 흔들었네.

 

세상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늙은이의 나이는 일흔이고 그 호는 노죽이라네.

그 진은 자신이 그린 것이고, 그 찬문도 자신이 지은 것이라네. 때는 현익섭제격이라.'

 

 

 

강세황은 이즈음 늦게 발탁되어 공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60대가 넘도록 야인생활을 했던 그로서는 공직에서 벗어나 다시금 자유롭게 살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앞뒤가 안맞는 모습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보이는 모습 뿐 아니라 심상까지도 전달하는 의미인 전신傳神은 조선시대 영정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직업화가가 지체 높은 사대부인 강세황을 그렸다면 이렇게 예법에 어긋난 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직접 그린 강세황은 아주 참신한 방식으로 자신의 내면을 담아내었다.

요즘에 봐도 새롭고 기발한 방법인데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선비라고 하면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고관이 떠오르곤 하는데, 이런 실험정신이나 진취성은 참 새로운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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