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기차는 7시에 떠나네-신경숙 본문
내 안에서 떠도는 목소리,한장의 사진,몇개의 전화번호...
기억 속의 거리 건물들을 따라가보려고 해요,당신을 만나기 전,내가 잃어버렸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생각합니다.
두렵고 얼마간은 긴장이 되는군요.이 길의 끝에서 왜 내게는 이 세상이 그저 단편적으로만 보이는지,사랑 앞에서는 왜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이 흐트러져버리는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생각합니다만.
나를 이해해 달라고 말할 면목이 없습니다.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당신의 청혼을 받았을 때 그렇게 당황했던 건 아닙니다.당신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헤어지기가 싫었습니다.그때면 제 마음속에 일렁이는 말은 오직 한마디였어요.조금만 더 있어요.조금만...그리고 조금만 더.
그런데도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할 만큼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이따금 나는 내 삶이 필름이 들어있지 않은 카메라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이 결락감이 무엇인지를 당신께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뭐라고 말해야 하나요.언젠가 무슨 일로인가 지독하게 헤어지기 싫은 무엇과 억지로 헤어져서 여기로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해도 될까요.너무나 피투성이로 헤어져서 아직도 그 피가 마르지를 않은 것 같다고.당신의 청혼은 그 헤어짐을 상기시켰어요.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를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직도 그의 수첩에 나의 이름을 적어가지고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이렇게 생생하게 간직한 채 당신과 결혼을 할 수는 없다는 게 내 마음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는 지난날의 몇 개의 조각들만 가지고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르지요.더 단편적이 되고 더 종잡을 수 없게 될지도.. 허나 나는 여전히 당신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몹시 흔들립니다.늘 당신과 닿아있고 싶은 내 마음은 여전합니다.당신을 믿고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은 사실입니다.당신과 닿아있지 않으면 너무 막막해서 고아같은 기분조차 듭니다.나는 무슨 일로인가 어느 부분이 훼손된 인간이에요. 그런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나약함을 어떻게 설명할까요.당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순간들은 늘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내가 그토록 끈질기게 당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건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서 무슨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나의 행복이었습니다.내 부친이 가평에서 사향노루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었어요.생각으로라도 그렇게 당신과 닿아있지 않은 순간엔 늘 우리들의 관계가 곧 사라져버릴 것 같은 염려가 들곤 했습니다.지금도 당신과 나의 자취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끔찍하게 합니다. 꼭 붙들고 놓지 않으면 소멸을 막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내가 돌아왔을 때 당신은 휘장 속을 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과 나를 연결짓던 사물들,느낌들이 벌써 저만큼 흩어지고 있는 것만 같군요.가족관계로 이어지지 않는 남녀관계의 과정이란 으레 이런 식이겠지요.만나고 헤어지고 잊혀지고.그렇다면 어느 순간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나를 알았던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이런 일이 내게 무슨 뜻인지 저로 모르겠습니다.이 거스름이 제게 무얼 가져다줄 건지도.
제가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지요?늘 마음에 밀알처럼 품고 있던 말입니다.사랑합니다.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다행입니다. 당신이 내게 있을 때는 내게 세상은 친숙하고 걱정 없어 보였습니다. 다시 편지 쓰겠습니다
1997년 7월 18일
하진 씀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아프고 아렸다...
이들은..
하진은 윤은 미란은...
각자 어떤 모습으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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