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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J 이야기-신경숙

DidISay 2012. 1. 23. 03:06

작은 소품같은 이야기들이 J라는 여성을 축으로 펼쳐진다

단편 소설 여러편을 읽는듯한 느낌인데,왠지 친숙한 이야기들이다.

큰언니의 일기장을 훔쳐보는듯한..그런 즐거움을 느끼게한다..

 

그녀를 J라 지칭해 놓고 그녀를 재구성해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여러번 웃었어요.이삿짐을 싸다가 사진첩을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기분이었습니다.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진짜 사진첩을 뒤적여보기도 했습니다.영양결핍에 걸린 사람처럼 글쓰기나 인간관계에 허기가 졌던 청춘 시절을 이렇게나마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방금 헤어지고 귀가해 날이 밝도록 전화질을 하며 마음을 소통시킬 수 있었던 친구들이 있어서였을 겁니다.J라는 익명의 존재에게 그때의 내 열망을 죄다 모아주는 작업을 하는 시간은 뜻밖에 즐거웠어요.엇나가고 비틀렸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아 한참을 몰두했습니다.

여기,J는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할 겁니다.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언제나 헤어질 수도 있는 그런 존재일 겁니다.당신이 지니고 있는 수첩 한귀퉁이에 아무렇게 적혀 있거나 지워졌거나 쓰다말았거나 잊혀진 이름의 대신이 되면 좋겠습니다.별로 특별하달 것도 없는 J의 나날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나를 웃게 했던 것처럼 당신을 웃게해줬으면 좋겠네요.욕심이겠지만 J가 당신을 얼마간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랍니다.그때면 여태 제 책상에 놓여 있다가 이제야 세상에 나가는 J는 저절로 사랑스러운 존재로 완성될테니까요.

                                                 -작가의 말 중에서..-

 

그녀는 예뻤다.(J가 전해들은 이야기 1)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그는 목발을 손질하고 있었다.융으로 만든 닦개에 왁스를 묻혀 막 목발 손잡이 부분을 닦으려고 할 때였다.

"저예요"

예감하고 있었으면서도,어쩌면 기다리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짐짓 모른 척했다.

"벌써 저를 잊으셨군요."

".........!"

그는 대답 대신 수화기를 든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햇살이 은빛으로 투명하게 쏟아지고 있었다.빌어먹을 놈의 햇살

그녀와 헤어지기로 작정하고 나서부터는 빛나는 것만 보면 마음이 밑바닥까지 아프다.마치 송곳 같은 것으로 긁힌 듯이 쓰라렸다.

"괴롭히려고 전화드린 거 아니에요.좋은 소식 알려드리려구요."

좋은 소식이라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동굴 속에서 새나오는 소리처럼 암울했다.

"...으응.뭔데?"

"저 결혼해요."

그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놓칠 뻔했다.결혼?그녀가 결혼을?그는 마치 아무 생각 없이 밤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사람처럼 멍해졌다.

"꼭 와주세요.축하받고 싶어요."

"........!"

그녀를 보낼 때는 그녀가 행복하라고 보낸게 아니던가?구체적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라,그런건 아니지만 먼저 헤어지자고 한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던가.그럴수는 없다고 한사코 못 떠나는 그녀를 팽개치듯이 방치해두고 만나주지 않은 세월이 벌써 2년째다.

그런데........그녀가 결혼한다는 말에 이렇게 충격을 받다니..

<중략>

"이해가 안가요 사랑하는데 왜 결혼은 안된다는거죠?"

그는 용기가 없었다.목발을 그녀의 부모에게 보일 용기.이 목발을 짚고 살아가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용기.어느 것에도 용기가 없었다.부딪히는 것보다는 피하는게 편하지 싶었다.우린 분명 서로 후회할거에요.그녀는 곁을 주지 않는 그를 향해 나지막히 말하고 갔다.그리고 2년이 흘렀다.

때때로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프게 맺혀왔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찾지않았다.자격지심?아니라고 해봐도 맞는 소리였다.내가 어떻게 그녀와 결혼을?그 자신을 안위하면서 변명을 찾아내면 있긴 있었다.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는,그녀가 왜 나같은 절름발이와 결혼을 해야한단 말인가?그녀는 행복해져야했다.내색안하고 전혀 주위의 이목에 개의치않고 나같은 놈과 2년이나 함꼐 있어준 착한 여자였다.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해져야했다.

 

"신랑입장"

행복해라.

그는 긴장이 되었다.뒤쪽에서부터 자꾸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은가.이게 무슨 소리지 뒤돌아보았다.그는 그만 일어서버렸다.바퀴는 자꾸 굴러오고 신랑은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중략>

그는 주저앉았다.신랑신부의 뒷모습이 눈물 속에서 아른거렸다.신랑신부가 뒤돌아섰다.휠체어에 앉은 신랑은 눈을 감고있었다.신랑도 울고있는 모양이었다.그년느 웃고있었다.하얀 이가 살짝 보였다.신랑신부가 하객에서 고개를 숙였다.박수소리는 환청처럼 들렸다.그들이 걸어나왔다.사람들이 일어섰고 휠체어와 그녀는 걸어나왔다.그는 눈앞에까지 다가온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축하해주세요"

행진이 끝나고 사진촬영을 위해 걸어나가던 그녀가 말했다.그녀는 웃고있었지만 눈 속에 물이 가득했다.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축하한다는 말을 그는 끝내 하지 못했다.식장을 걸어나오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 돌아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