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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움베르트 에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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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움베르트 에코

DidISay 2012. 1. 23. 03:07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내 보기에 그분은, 진리에의 갈증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어떤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쫓기면서 유럽을 주유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그게 도대체 무슨 풀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사부님은 웃으면서,
참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맛보게 해달라고 조르는 나에게 사부님은,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 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울 리는 없다. 라 했다.


우주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양한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일된 가운데에서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지금 이런 게 없다고 과히 상심 말 일이다.
지금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내가 이러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뜻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어디어디까지가 하느님 뜻이라고
우리가 울타리를 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암흑시대에,
현자라고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네 무리들과
서로 모순되는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온당하다.


귀한 덕성을 고루 갖춘 분도,
자기의 명민한 통찰력을 과시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더러 허영심의 유혹에도 기꺼이 굴복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말 주인은 마사(馬事)의 권위자들이 훌륭한 말의 조건으로
내세운 조항을 모두 자기 말에서 보는 법이다.
선학(先學)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은 왕왕 보편적인 사상(事象)을
특수한 것으로 오인하고 곧잘 그릇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법이다.

드러내는데 명민하시되 덮어두는 데 분별이 있어야 한다.

진리라고 해서 모든 귀에 다 유익한 것은 아니고,
허위하고 해서 모든 눈에 다 거슬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현명하다면 그것은 엄격할 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상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성직자들의 문학이 아니던가?

하느님이시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다 자비를 베푸시는 게 아닙니다.
동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쁨보다 유효한 게 딱 하나 더 있지요.
바로 고통이랍니다.
고문을 당하면, 조사관이 알고 싶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사관을 기쁘게 할 만한 것까지 모조리 말하게 됩니다.

내게는 사악한 자들의 약점을 조사해낼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알고 보니 사악한 자들의 약점은
도덕 높은 분들의 약점과 같더란 말입니다.

지적 허영...
지적 허영을 잠재우고
주님게서 입으신 상처를 보고 우는 법을 배우게.

하느님은 역시 참 좋으신 분이지요,
자연을 낳으셨으니...

사랑할 줄 모르면 두려워할 줄이나 알아야지.

하지만 들을 말은 들어야겠지요.
들어보고 생각해봐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게 아니겠어요?

죽음은 나그네의 휴식... 모든 수고의 끝.

우베르티노는,
자기 손으로 화형대로 보낸 이단자들과 똑같은 자가 될 수도 있었고, 신성로마교회의 추기경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다.
이단자의 악덕과 추기경의 악덕 또한
고루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나는 우베르티노와 노닥거리면서
지옥이 다른 각도에서 본 천국이라는 인상을 받았구나.

겨울의 마른가지에서도 봄이면 다시 피어날 잎을 봅니다.

유사한 것일수록 사실은 상이한 것이고.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독과 약은 종이 한 장 차입니다.

이 궤변의 너울은,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아니면 이땅의 산 한 덩어리를 짊어진 듯한 무게로
나를 내리누른다.
허나 나는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
이 고통은 하느님이 내리신 벌인데 내 죄목인즉,
내 허영심, 내 육체를 쾌락의 거처로 믿은 허물,
남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 죄,
내 상상 속에 둥지를 틀고 있던 괴이한 형상을 즐겼다는 것이다.

나에게 고해를 청하지 말라.
네 입을 여는 것으로 내 입을 봉하려 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네 입을 열게 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네가 기어이 입을 열지 않으면
내 스스로 그 방법을 강구하고 말겠다.
네가 원한다면 내 자비를 구하는 것은 허락하겠다만
침묵을 구하지 말아라.
이 수도원 안에는 그렇지 않아도 침묵이 너무 흔하다.


근자에 들어 설교자는, 대중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이로써 신앙심과 믿음에의 열의를 부추기고,
인간의 법과 하느님의 법을 공히 준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답시고 공공연히 극언은 물론
끔찍한 위협까지도 망설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만큼이나 참회라는 말이 난무하던 시대도 나는 알지 못한다.
교황청이 말하는 인간의 거듭나기란 믿을 바가 못되는 게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리스도보다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안토니오를 더 두려워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개가 그러듯 아무데나 오줌을 잘 누는데,
네가 만일 한 자리를 정(淨)하게 지키고 싶다면
나무 작대기로 그 자리 위에다
성 안토니오의 형상을 그려 놓아 보아라.
그러면 아무도 거기에 오줌을 누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육(肉)의 부활은 믿지 않고
육신의 상해와 불행만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그리스도보다 성 안토니오가 더 두렵지 않겠느냐?

세상에 거울이 있으려면 먼저 세상이 모습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러저러한 행위에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은,
행위 자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이러한 행위를 판단하는 교회의 자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문제를 제대로 수습할 양이면
이리로 올 것이 아니라 마땅히 저자 거리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 곳에 머무는 우리는, 수다를 떨어서도 침묵해서도 안됩니다.
오로지 행동해야 합니다.


우필 잡는 것은 손가락 세 개라도 일을 하는 것은 온몸이다.

유능한 조사관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에서 혐의를 두는 법이다.

노인이란 이미 잘 만큼 잔 데다
또 한차례의 영원한 잠을 준비해야 할 분들이니까.

세상에 이단 아닌 것 없고 정통 아닌 것 없다.
어느 한 세력이 주장하는 신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이 약속하는 희망인 것이야.
모든 이단은 현실, 즉 소외의 기치와 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죽음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하와와 그 딸들을 이렇듯 총애하시는데,
우리가 여자의 미덕과 기품에 발이 걸려 넘어졌대서
여자 자체를 몹쓸 것으로 여김은 부당하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해서 이런일이 생겨서 좋다는 뜻은 아니고...
생겼다고 해서 너무 자신을 책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을 가라 앉히기에 교회만한 곳은 없다.

우리가 얻은 것은 문제이지, 답이 아니야.

논리야말로 만능의 무기라고 믿던 나는 그제서야,
그 적용의 근거가 확실할 때만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논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사상(사상) 안에 있을 때보다는
거기에서 떠나 왔을 때
더욱 유용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어 준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죄악 중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신자를 타락시키는 것이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성직자를 타락시키는 것이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을 등진 수도사를 타락시키는 것이라네.

우리 인간은 모두 그렇게 기가 막히게 사악한 죄인들일세.
허나, 내 눈에 들보가 박혀 있는 것을 모르고
형제의 눈에 든 티를 찾으려 하여서도 안되는 일...
장차 자네가 나더러, 눈에 들보가 들었다고 한다면
내 고맙게 여기기는 할 걸세.
그러니 우리 나남없이 눈에 든 들보는,
서로가 일러주어서 바람에 날아가 버리게 할 일이네.


저는 제 이상을 겨냥할 줄만 알았지
거기에 맞추어서는 살지 못한 놈입니다.

이성과 감정은 충분하다...
하지만 확신과 행동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워지는 것입니까?
진실에의 사랑과 욕망 때문이기도 하고,
평생을 내 기억에 묻어 고형체로 남는 저 환상과 추억으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모든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되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나의 허물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여느 인간에게는 당연한 정욕이라고 해서
내 영혼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 그것이 나의 허물이었다.


돌이켜보아도, 그때 내가 지니고 있던 그 감정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상대의 미덕을 제 것으로
취하고자 하는 우정에서 기인한 사랑의 감정이었는지,
아니면 제 미덕은 따로 두고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에서
기인한 사랑의 감정이었는지 분명하게는 말하기 어렵다.


소는, 혹 비라도 내릴 양이면 스스로 알아서 우사로 돌아온다.
비를 피하면서도 늘 바깥을 바라보는 것은
밭일을 잊어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비가 그치면 다시 일을 계속하기 위해
밭일을 유념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싶은것은 해라. 하지만 해야될것을 잊진 말아라..

무해한 서책은 씨앗과 같아서
불온한 서책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장서관이라고 하는 게, 진실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다른 진실을 가두어 놓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까?

내가 본 그는 호탕하게 웃을 줄도 알았고,
팽팽한 긴장도 여상스럽게 견딜 줄도 알았으며,
침묵으로써 웅변 못지않게 사람을 설득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상대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시선을 돌려버림으로써 그 질문 자체를 무시하면서도
질문자를 무안하지 않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수수께끼를 풀자면,
아무 관련이 없는 듯한 두 세 가지의 특정 자료를 서로 견주고,
여기에서 우리가 아직은 알지 못하는 것, 알려진 바가 없는
일반적인 이치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인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에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학적 미덕에는 믿음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


사랑이라는 병은 괴질(怪疾)이기는 하되
사랑 자체가 곧 치료의 수단이 된다는
이븐 하즘의 정의는 인상적이었다.
이븐 하즘에 따르면, 사랑이 괴질인 까닭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신의 아름다움은 가죽에서 머무는 법이다.

진리를 가까이하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터이지요.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의논하고 있는 것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냐, 그러지 못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올시다.
오히려 진리를 행세하고자 하는
지나친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던가요?

"심문관은 고문 같은 것은 하지 않는 법이다.
피의자 육신의 관리는 속권(俗權)의 소관이야."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어리석기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심문관의 입장에서 보아도 다르고,
피의자의 입장에서 봐도 다른 것이야.
고문은 궁병대에서 한 것이다.
심문관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서 좋고,
피의자는 그렇게 고문을 당할 때는 차라리
심문관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어서 좋고...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 심문관을 만나면
피의자는 마음을 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법이다."

지식 자체에 대한 탐욕...
너는, 사람들이 접할 수 없는 바에, 그런 지식의 보고를
관리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탐욕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사부님이신 로저 베이컨에게도
지식에 대한 약간의 욕심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욕심은 갈망에 가까운 것이지 탐욕은 아니었다.
그분은 당신의 지식을 쓰시되,
하느님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쓰셨다.
따라서 그분은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은 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베노는 제 삶을 가꾸는 수단으로서
제 비천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
다른 인간을 믿음의 전사나 이단의 첨병으로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을 구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탐욕이라고 해서 꼭 육(肉)의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선(善)해야만
그 대상에 기울이는 사랑이 참사랑일 수 있는 법이다.


믿음은 있으되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의 벽을 뚫고
불길에 다가갈 수 없었으리라.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고기를 잡으면 버리게 되는 그물,
높은 데 이르면 버리게 되는 사다리 같은 것...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를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늙은 수도사에게,
제가 쓴 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많은지 적은지,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