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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 파란만장 - 장다혜

DidISay 2023. 8. 22. 14:54

줄을 잘 타서 날치라는 이름이 붙은
전남 담양의 노비출신에서 명창이 된
이날치의 삶을 그려낸 픽션물이다.

문장이나 어휘들이 수려해서 읽는 내내 즐거웠고
평소에 접할 일이 없는 판소리들의
가사들을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해서
이 구멍들을 메우기 위해
그의 삶 주변에 여러 인물들을 창조해서 엮어놨는데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라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되었다.

이청준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미련하고 덧없을지라도
하나의 가치를 묵묵히 추구하는 삶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랑하는데
비슷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춘향전>의 몽룡과 방자로 분한 날치와 묵호는 각각 창공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서서 아득하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 남원에 온 지 오래인데 놀 만한 경치를 보지 못했으니, 너의 고을에 제일 경치가 어디이냐?”
“공부허시는 도련님이 경치 찾아 무엇허시게요?”
“어허, 네가 모르는 말이로다! 천하제일 명승지 도처마다 글귀로다. 하니 잔말을 말고 아뢰어라!”
“하면 소인의 고을에 별반 경치 없사오나 낱낱이 아뢰리다.”
방자가 설렁설렁 줄로 나아가며 사방팔방으로 손날을 뻗고 까딱까딱 고갯짓을 하였다.
“동문 밖엔 녹림간의 꾀꼬리가 환호성 치니 춘몽을 깨우는 듯하옵고, 북문 밖 나가오면 교룡산성이 좋사옵고, 서문 밖엔 관왕묘 경치가 끝내주고, 남문 밖엔 광한루, 오작교, 영주각이 있사온데 어디 골라보소서!”
“너의 말대로 어디 한번 둘러볼까!”

날치가 촤르륵, 부채를 펼치자 그것을 신호로 풍물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얼음을 타는 듯 조심스럽다 하여 줄타기를 어름이라 하던가. 어름사니의 걸음걸음이 과연 얼음판을 지치듯 가뿐히 미끄러져 나갔다. 날치는 활활 부채질을 하며 양반걸음으로 앞으로 쭉 나아갔다가, 얌전히 뒷짐을 지고 사붓사붓 뒷걸음질을 치다가, 또다시 도포 자락을 펄렁이며 곧장 앞뒤로 왔다리 갔다리를 반복하였다. 그러곤 껑뚱껑뚱 줄 위를 날 듯 뛰다가, 양반다리를 한 채 공중부양을 하듯 튀어 오르기까지 하였다. 쥘부채를 모아 쥐고 가랑이 사이로 줄을 타고 앉았다 일어나기는 기본이고, 휘리릭 재주넘기는 덤이요, 몸을 뒤채며 눈을 찡끗대는 건 끼 부리기였다. 이몽룡의 간들 걸음마다 얄포름한 도포 자락이 사방으로 나풀대며 어쩔 땐 만개한 꽃처럼 촤르르 펼쳐지고, 또 어쩔 땐 물 찬 제비처럼 쪼로록 접혀 들었다. 특히 그가 가맣게 떠올라 해를 등질 땐 언뜻언뜻 두 팔과 다리 선이 비쳐 보였다. 그 끌밋한 몸태에 사로잡힌 여인들은 희뜩희뜩 새눈을 뜬 채 볼을 붉혔다. 무심히 떨치는 손짓 하나, 줄을 튕기는 발짓 하나까지 실로 미묘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좌중은 벙찐 얼굴로 꼴깍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한참 발재간을 펼치던 날치가 돌연 줄 한가운데 건방지게 걸터앉았다. 한 다리는 늘어뜨리고, 다른 다리는 줄 위에 접어 올린 채 부채 바람을 살랑대는 그의 하는 양이 흡사 마실 나온 한량이었다. 가쁜 숨도 없이, 나른한 음성이 퍼졌다.
“방자야, 또 어디가 좋더냐?”
“또? 또 놀러 나가시게요?”
한바탕 좌중의 웃음이 터졌다. 방자는 천연덕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모난 눈으로 상전을 흘겨댔다. 그러다 발이 삐끗하여 말랑줄에 대롱대롱 매달리니 이번엔 좌중이 ‘어이쿠야!’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잇, 그만 되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마.”
몽룡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나른하게 갓끈을 잡아 풀었다. 그 자태가 마치 옷고름을 푸는 듯 야릇하여 여염집 여인들마저 괜스레 장옷을 여미며 헛숨을 들이켰다. 벗은 갓을 묵호에게 홱 날린 날치는 줄꾼에게 생명줄이라고 할 법한 부채마저 귀찮다는 듯 내던져버렸다. 드디어 독보적인 그만의 특기를 선보일 차례였다.
“풍악을 울려라!”



“대갓집에 들 때마다 떵떵거리는 양반들이 부럽지도 않더냐?”
“장지문마냥 쉽게 열리는 것이 저승길이옵니다. 생의 마감을 목도할 때마다 삶의 무게보다 그 덧없음을 더 체감하나이다.”
“해서 온갖 수모를 견디면서 계속 비루하게 살겠다?”
“망자를 저승길로 인도하는 것 또한 복을 짓는 것이라, 어미는 말했습니다. 전생의 업보 탓에 현생이 이리되었을 터, 소인은 매일 밤 비옵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비옵니다. 말로만 비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니 곡비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통곡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살피는 것은, 제 업을 닦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내생엔 저도…… 온전히 두 눈을 뜨고 살지 않겠습니까.”

그 마지막 말이 상록의 가슴 한복판을 냅다 찔렀다. 더 이상은 백연을 그저 제 호의를 저버린 괘씸한 것이라 치부할 수가 없어졌다. 여인은 윤회輪廻 속에서 공덕을 쌓기 위해, 이번 생은 곡비로 마멸되겠다 결심하였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그 의연함에서 묘한 우아함마저 우러났다. 영멸 앞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그 단호함이 상록에게 심리적 파장을 안겼다. 자신은 현생을 살아내기에 급급하여 내생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삶의 가치를 위해 싸워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천중이 서서히 짙은 쪽빛으로 갈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