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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홍세화

DidISay 2012. 1. 23. 03:31

홍세화씨의 이름만을 보고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읽어내려갔던 책이다.

 

이분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의 생각의 깊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얼마나 편협한 생각에..혹은 안이한 생각에 머물러 있었는지

깨닫고 부끄러워지곤한다..

 

이 책 역시 홍세화 사상에 항상 깔려있는

똘레랑스를 엿볼수 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한 '아웃사이더'의 고투
-홍세화,『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한겨레신문사, 2003)

그를 말하다

그 누군가에 대해서 말을 해야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와의 친소관계를 떠나 그의 삶을 온전히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작업은,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소개는 차치하고라도 일반적으로 다른 이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대개 과장과 축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게 마련이다. 한 해 두 해, 호적등본에 잉크가 마르면 마를수록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일이 조심스러워지는 건, 이래서다.
그러나 나는 지금 홍세화 선생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그가 쓴 책을 빌어 그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렇게 소심해진 내가 홍 선생을 말하려함은 왜인가, 이 글이 지은이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자부에서인가,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자만에서인가. 내가 그를 말하려함은, 이러저러한 이유들 때문이 아니다. 과장과 축소의 혐의를 둔다해도 내가 만난 그, 내가 읽은 그를 당신에게 말해야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귀한 인간성에 관한 얘기가 될 수 있다는 한 가닥 믿음 탓이다.

'악역'으로 돌아온 그

그가 돌아왔다. 그의 말처럼 23만의 귀향이다. 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망명길에 오른 후,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던 그 조국에 그가 돌아왔다. 그를 유배한 부끄러운 조국은 결코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를 유폐시켰던 부조리한 조국은 결코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 땅에 귀환할 수 있게 한 것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춥고 서러운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는 기꺼이 악역을 맡기로 작정을 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사람들을 위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하 『악역∼』)은 빠리와 서울에서의 이런 그의 분투를 담은 책이다.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프랑스 사회라는 거울'로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벼리는 그는 스스로 악역을 자임함으로써, 어느새 선량한 역할로 자족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한국사회가 강요하는 '일상의 덫'으로부터,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지 모르기에 가능한지도 믿지 못하는 몽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하여 마침내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악역을 맡으려 한다.
『악역∼』은 쉬운 책이다. 읽는 이에 대한 배려가 없는 글은 이미 글이 아니다라는 그의 지론이 평이하면서도 울림 있는 글을 낳았다. 그는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움켜쥐고 변화의 발목을 잡는 세력을 '사회귀족'이라 명명하며 예봉을 들이댄다. 이윽고 지역감정(지역감정이 아니라 명백한 지역차별이라 그는 힘주어 말한다)이라 불리우는 야만에 대한 성토와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조선일보에 유유자적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질타가 이어진다. 한편 프랑스사회를 통해 우리사회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는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정한 의미의 '공화주의'에 대해 일깨운다. 변화를 도모하는 벗들을 위해 쓰여진 후반부는 진보진영이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애정 어린 고언이 자리하고, 책의 말미엔 우리에게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르는 희망을 찾기 위해 말을 건네는 '편지'들이 엮여있다.  

인간으로 산다는 일은

한국사회에 산다는 것은 많은 부분 타협하고, 많은 부분 망각하고, 많은 부분 침묵해야 함을 의미한다. 현실의 부정과 타협해야하고, 역사의 상흔을 망각해야하고, 세상의 불의에 침묵해야 한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온갖 옳지 못한 일에 시비를 가리려는 자, 수백만의 이름 없는 죽음을 기억하려는 자, 약한 이웃들이 쓰러져갈 때 함께 하려는 자는 도저히 이 사회를 견뎌낼 수 없다. 이 몹시도 아픈 사회를.
그가 '왜'(현재 그가 맡고 있는 한겨레 토론면의 이름은 '왜냐면'이다)라는 주문에 주목할 때, 그가 우리가 잊고있는 분노를 공공연히 피력할 때, 그가 "연대를 사는 즐거움"을 노래할 때, 난 우리의 타협과 망각과 침묵에 내리치는 죽비소리를 듣는다.
측은해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악에 저항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에게 이 네 가지 심성이 있는 것은, 인간이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몇 천년도 족히 된 이야기다.
그럼 과연 우리는 인간인가. 그는 어느새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으로써 자연스레 가지고 있던 심성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는 이들에 대한 그의 연민에서, 극우들의 심장에 꽂히는 '척탄병'이 되고자 한다는 그의 자세에서, 모든 권력에 아웃사이더이길 고집하는 그의 태도에서, '택시운전사의 눈'으로 변화를 고민하는 그의 수고에서, 난 한 인간을 본다. 비로소 인간이라 불릴만한 한 인간을.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인간이길 포기한지 오래인, 너무도 많은 것을 잃고 살아온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가 스스로 악역을 작심했으니 남은 건, 우리다. 계속 인간이길 포기하고 살던가, 참으로 아프지만 인간이길 고집하며 살던가. 선택은 이제 당신 몫이다.

 

 

삶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패배하는것.

패배이긴 하나 "끝없는 패배"라는 것.

다시 말해 좌절이나 절망을 끝내 거부하고

그 삶을 마냥 껴안는다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