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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바이러스-진중권 본문
만국의 노동자가 한국의 노동자를 부러워 하고 있다. 유럽이 제아무리 선진국이라 하나, 노동자의 지위는 한국에 빗댈 것이 못된다. 중국이 제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 하나, 나라의 국민이라는 노동자를 우리만큼 각별히 대우해주지는 못한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전 세계를 통틀어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한국만큼 높은 나라는 없다. 노동자를 드높여 아예 '귀족'으로 대접해주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전 세계 최장시간 노동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버젓이' 노동귀족'이라는 고약한 어법을 사용하는 것은 보수 야당만이 아니다. 가진 자가 아니라 서민을 대변한다는 집권 여당의 지지자도 서슴없이 이런 수사법을 사용한다. 노동자보다 사회적 먹이 사슬의 위에 있다는 계급적 여유의 표현이리라. 그들에 따르면 대한민국 노동자는 연봉6천만원으로도 모자라 툭하면 파업이나 하는 '귀족'들이다. 2003년 10월 17일 언론 보도에 연봉 1억이상을 챙기는 노동자도 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노동자가 대한민국에 '두 명'이나 된단다.
이런 '귀족'이 사치에 못 이겨 파업까지 해대니 얼마나 눈물이 사납겠는가. 몇 년 전에는 심지어 '가뭄으로 농사가 걱정되는 데 무슨 파업이냐'는 웃지못할 논리까지 나왔다. 이제는 파업도 기상청의 허락을 받고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이런 논리를 펴는 분들이 평소에 농민의 삶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뭄'걱정하던 분이 정작 농민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농업 사징 개발 문제에 관해서는 '나 몰라라'한다.
노조는 거의 범죄조직 취급을 받는다. 제 나라 노조만 욕하는게 아니다. 심지어 어느 신문은 '독일 경제가 노조 때문에 망해간다'는 기사를 올렸다. 보다 못한 독일 대사관에서 여기에 항의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쪽의 해명에 따르면 독일에서 노조는 '경쟁력 우위 요인'으로 간주되고 있단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파업이 자주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나도 오래 끌지 않고, 오래 끌어도 결국 조용하게 매듭지어져, 사회적 손실이 그리 크지 않다. 이 모두 협상력을 가진 제대로 된 노조 덕분이다.
노사 관계를 악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소통구조의 불평등성이리라.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노동자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 파업을 범죄시 하는 것은 곧 이견을 해소하는 데에 제도적-물리적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우리 노동현장의 분위기가 늘 험악하기만 한 것은 사회적 소통의 전근대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누구보다 먼저 급변하는 시대에 여전히 '위에서 찍어 누르면 된다'는 식의 무식한 발상이나 하는 사용자와 경영자에게 돌아간다.
노조가 '귀족'의 모임이라면 노조위원장은 뭘까. 아예 왕족에 속한다고 해야 할까?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목을 맸다고 한다. 사측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대화를 거부한다고. 홀로 130일간 농성한 끝의 일이다. 하긴, 귀족으로 태어나 교양 없이 사회적 지탄을 받는 파업이나 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귀족의 품위만큼 드높은 상공에서 귀족의 격조만큼 고고하게 입장을 표명하다가 혼자 조용히 모을 매는 수밖에......
듣자 하니 50대 노동자를 쫓아내려고 난데없이 엑셀을 교육시키고,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했다고 한다. 하긴 귀족이라면 마땅히 교양을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20년 근속에 월봉 150만원, 번거롭게 이것저것 다 떼어내도 80만원이나 되는 거금으로 호화생활을 하는 귀족들.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이들에게 부족한 건 천박한 물질이 아니라 고귀한 정신적 자양분이 아니겠는가.
시민혁명이 너무 철저하게 일어나서일까. 이런 나라에서 '귀족'으로 사는 것은 정말 고단한 일이다. 귀족이 아무리 귀하다 하나 아무도 '귀족'이 되려 하지 않고, 귀족마저도 "내 자식만은......"이라며 굳이 세습을 거부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공화국임을 보여주는 굳은 징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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