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본문
베스트셀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다가,
엄마를 다룬 뻔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볼 생각이 없었던 책.
예상외로 해외에서도 호평이 자자해 궁금해서 주문한 책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도저히 오지 않는데
그렇다고 딱딱한 교양서적을 읽을만한 마음상태도 아니어서,
늦은 새벽에 읽기 시작했다가
몸이 엿가락처럼 늘어질정도로 펑펑 울어버렸다.
영화 혜화,동, 이후로 계속 울면서 본 작품은 또 오랫만인 것 같다.
결국 밤을 하얗게 새버렸네... 어찌 생각하면 울기 위한 핑계로,
이 책을 집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위로해주길 바라며 집어든 책이었지만,
실제로는 울기위해 무의식적으로 집어든 것 같다는 생각이
책을 읽고나서야 뒤늦게 들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 째다...로 시작되는 이야기.
신파조일까봐 조금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담담한 문제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읽으면서 내내 했던 생각이,
어쩜 세상의 엄마들은 다들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지..였다.
엄마와 함께 떠오르는 이런저런 소소한 추억들
그리고 지금 도시 아이들은 알지 못할 시골의 풍경들
오직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정서와 체험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서 참 좋았다.
나의 아이들에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정서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런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베푸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얼굴울 들고 나를 보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날 때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네.누런 털이 빛나는 암소가 막 무릎을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네. 소가 힘을 쓰며 막 일어서려는 참에 태어난 아이이니 얼마나 기운이 넘치겠느냐며 이 아이 때문에 웃을 일이 많을 것이니 잘 거두라 했다네.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 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네가 아무 장식이 없는 민짜 원피스를 고르자 엄마는 어깨와 치마 끝단에 프릴이 달린 것을 네 앞에 내밀었다.
이거 어떠냐! 너는 에이 ...... 하며 밀쳤다. 왜? 입어보렴. 그때만 해도 젊었던 엄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릴 달린 원피스와 엄마가 머리에 쓴 때에 전 수건은 서로 다른 세상처럼 대조적이었다.
유치해요. 내 말에 엄마는 그러냐? 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지 자꾸만 원피스를 앞뒤로 살폈다.
내가 너라믄 이걸 입어보겠구만. 유치하다고 말한 게 미안해서 그건 엄마 취향도 아니잖아, 했을 때
너의 엄마는 아니다, 엄만 이런 옷이 좋아, 입을 수 없었을 뿐이다, 했다.
지금의 엄마 집이 새로 지어지기 전의 일이다. 지금은 지상에 없는 그 집의 마루는 마당과 대문을 향해 놓여 있었다. 네가 엄마 집에 가 있을 때인데 누군가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소리가 나고 연이어 동생 있는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와 방 안에서 귤을 까먹고 있던 엄마가 그 목소리를 듣고 화닥닥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찌나 빨랐는지 모른다. 누구이기에 저리 반가운 걸까? 궁금해 너도 뒤따랐다.
잠시 마루에 서서 대문 쪽을 살피던 엄마가 대문간에 서 있는 존재를 향해 오빠! 소리를 치며 내달았다.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고. 외삼촌이었다. 바람같이 달려간 너의 엄마는 외삼촌의 가슴팍에 주먹을 내지르며 오빠! 오빠!를 불렀다. 너는 마루에 선 채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의 엄마가 누군가를 향해 오빠! 하고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외삼촌을 말해야 할 때는 늘 너의 외삼촌이라고 했다. 잠시 너를 멍하게 한 것의 정체를 너는 곧 알아차렸다. 외삼촌이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닌데 엄마가 외삼촌을 향해 오빠! 반가운 콧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 왜 그렇게 놀랐는지를. 아, 엄마에게도 오빠가 있었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던 것이다.
네가 엄마를 생각하며 혼자 웃을 때가 있는데, 그날의 엄마, 늙은 엄마가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오빠! 외치며 마루를 뛰어내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간의 외삼촌에게 달려가던 그 모습이 연상될 때이다. 그때의 엄마는 너보다도 더 어린 소녀였다. 엄마의 그 모습은 너의 뇌리에 박혔다. 엄마에게도……라는 상상을 하게 했다. 당연한 일을 왜 그제야 깨달았는지.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가 너의 외삼촌을 두고 오빠! 부르며 달려가는 그 순간의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엄마도 네가 오빠들에게 갖는 감정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인간이란 깨달음은 곳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구나,로 전환되었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간혹 너는 실제로 1936년에 태어났으나 호적에는 1938년으로 기록된 엄마의 유년을, 소녀시절을, 처녀시절을, 신혼이었을 때를, 너를 낳았을 때를 생각해보곤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알레르기가 있어 무명옷이 아니면 입을 수가 없었 다고 했다.다른 옷감이 피부에 닿으면 몸이 간지럽고 부스럼이 났다고. 그는 어머니가 지어준 무명옷만을 입고 자랐다.그의 기억에 그의 어머니는 늘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속옷부터 양말까지 직접 손으로 만들어 입히려면 그래야 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옷장을 열어보니 거기엔 그가 평생토록 입을 수 있는 무명옷들이 쌓여 있었다고 했다.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중 하나라고.
그의 어머니는 어떤 용모를 지녔을까 ?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너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회상하는 그 앞에서 급기야 너는 어머니께서 기쁘셨을까요? 하고 말았다.
- 우리 어머니는 요즘 여자들과는 다른 분이에요.
그의 말은 정중했지만 네가 그의 어머니를 모독했다고 그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생각을 깊이 해보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뜻밖이라고 말하는 일들도 곰곰 생각해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뜻밖의 일과 자주 마주치는 것은 그 일의 앞뒤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
이 마당에서 가장 좋았을 때는 여름밤에 화덕을 내놓고 찐빵을 찔 때였네. 형철이가 퇴비를 걷어다가 모깃불을 피워놓으면 아우들은 평상에 아무렇게나들 뻗대고 앉아서 화덕에 얹어놓은 솥에서 찐빵이 쪄지기를 기다렸재. 한솥을 쪄 채반에 내놓으면 이 손 저 손이 금세 하나씩 집어가 없어지곤 했재. 솥에서 찐빵이 쪄지는 시간보다 자식들이 먹는 속도가 빨랐구만. 또 한솥 쪄질 때까지 화덕에 불쏘시개를 넣고 평상에 서로 포개지듯 드러누워 있는 자식들을 바라보면 좀 무섭기도 했네. 어찌나 먹성들이 좋은지. 모깃불을 피워놓았어도 모기들은 끈덕지게 내 팔이며 허벅지며 침을 박고 피를 빨아대고 밤이 깊도록 찐빵을 쪄내고 쪄내고 다 먹어버리고 자식들은 또 기다리고 있으니. 찐빵이 또 쪄지기를 기다리다 한놈 두놈 포개져 잠이 들던 그런 여름밤이 있었네. 잠든 틈에 나머지 찐빵을 쪄내 밥바구니에 담아 뚜껑을 덮어 평상에 두고 자면 새벽이슬이 내려 밥바구니 속 찐빵 껍질만 살짝 굳었재. 눈뜨자마자 찐빵이 든 밥바구니를 앞에 놓고 또 한바탕씩 먹어들 댔재. 그래서 내 자식들은 아직도 껍질이 살짝 굳은 차가운 찐빵을 좋아하재. 그런 여름밤이 있었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던 그런 여름밤이.
지나간 시간에 함께한 일들은 어찌 되는 건지 당신은 알고 있소이?
당신한테 묻고 싶은 말을 내 딸애한테 물었더니
내 딸은 엄마가 그런 말을 하니 너무 이상해, 하면서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거 아닐까, 엄마! 합니다.
무슨 말이 그리 어려운지. 당신을 알아듣겠소?
이젠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모두 여기에 스며들어 있다는데, 느끼지 못할 뿐 옛날 일은 지금 일과 지금 일은 앞의 일과 또 거꾸로 앞의 일은 옛날 일과 다 섞여 있다는데 이제 이어갈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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