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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만나는 시간

녹아내릴듯이 달콤한.

DidISay 2012. 1. 25. 14:19



금요일즈음에 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생각난 것은 혀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차가운 질감의 생크림 케잌의 기억이었다.

 

단 것을 사실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차가운 질감의 생크림 케잌을 사러 멀리 가기엔

펄펄 날라다닐 것 같은 체력도 아니라서

바로 뛰쳐나가 케이크를 사오진 않았지만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고 고른 그림이

바로 이 디저트의 화가. 티보!

 

(티보의 그림과 이를 사진으로 재현한  샤론 코어의 팝아트 작품을
매치시키면서 봐도 재미있다.)

 

현존하는 현대 예술가들 중에서 서슴없이 거장이라 칭해지는

웨인 티보는 1920년, 애리조나 주의 메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특별히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으나

당시 대공황으로 미국의 전국민이 가난했던 시기라

티보도 9살때부터 동네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불황의 고단함을 경험했다.

 

학창 시절의 티보는 매우 적극적이고 열심인 미술학도였던 것 같다.

극장의 무대조명 기사, 영화포스터, 광고디자인을 맡았으며

월트디즈니의 만화영화 작화 부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피노키오'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티보는 전문대학에 입학했으나,

일과 세계2차대전 발발로 인한 군입대로 졸업을 하지 못했다.

입대 후 티보는 공군에 배치되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군 당국이

그를 카투니스트 겸 일러스트레이터로 썼다고 한다.

전쟁 후 티보는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결혼해서 로스 앤젤레스에 자리잡았다.

그 후 대학에도 다시 등록해 미술과 미술사, 교육학 학위를 받았다.

강의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인지,

대학원 재학 중에 이미 학부강사로 일했는데

강의에 대한 평가도 좋고, 매우 인기가 많은 강사였다

학교에 머무르면서 티보는
상업예술보다 좀더 진지한 길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5,60년대 티보는 케잌,패스츄리, 음료수 등의 각종 먹거리를 그려

새크라멘토와 뉴욕의 화랑가에서 대히트를 기록한다.

밝은 색채와 매트한 질감의 물감을 두껍게 사용했지만

매우 사실적인 그의 그림을 보고

'팝아트'라고 말하는 일부 비평가의 혹평도 있었다.

하지만 티보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소재의 '상업적 대중성'때문이 아니라 달콤한 먹거리들이

고단했던 어린 시절이나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따스한 풍요로움을 대표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에는 에드워드 호퍼처럼 초사실적인 도시 풍경화를

많이 그렸고, 디저트류 외에도 넥타이, 립스틱, 안경 같은

다른 대중적인 소재를 많이 그렸음에도

여전히 그가 '케잌의 화가'라고 기억되는 것은

대중들도 그의 그림에서 향수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티보는 수많은 케잌을 한폭의 캔버스에 그렸다.

케잌이 조롱조롱 모여있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럽다. 

막 오븐에서 꺼낸 케잌에 조심스럽게 크림을 바른듯

결을 살린 붓질도 정답다.

그의 케잌에는 화려한 장식이 없다.

비슷한 사이즈에 평범한 둥근모양.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추억들이 설탕인형처럼

반짝이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부드럽고 녹아내릴 듯이 달콤하다.

 

새하얀 생크림 위에 꿈같은 사랑을...

또 그만큼이나 새콤달콤한 딸기시럽으로 그려놓은 발렌타인 케잌

밖에서 신나게 뛰놀고 들어와 부엌에서 샛노란 버터크림을 휘젓는

어머니 곁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기다렸을 보스턴 크림 파이

친구 생일날 훅하고 꺼지는 초와 팡팡 터지는 폭죽과 함께 했을

새하얗다 못해 반짝이는 생크림 케잌

신혼의 설레임을 닮은 분홍빛 웨딩 케잌

 

케잌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이 눈물나게 그리워서

뭉근하게 스며드는 바닐라 크림을 한 입 베어물어도

어느새 한 조각에 목이 메일 듯한 그림.

 

 

어느덧  스물 다섯이 된지 한달이 되어간다.

생크림으로 덮어버린 것처럼 내 인생에서 지워진 듯한 20대 초반.

조금은 힘들고 조금은 아쉬웠던 내 20대의 앞 절반에

그래도 그림이 내 인생의 행복을 더 했다는 생각이 든다.

2009년 한해에는 더 달콤하고 배부른 추억들만 생기길.

(예전에 썼던 글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