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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미야베 미유키) 본문
미스터리물을 잘 안보는 편인데도,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왜 미야베 미유키를 한국 팬들이 미미언니라고 부르며 칭송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몇가지 요인들은,
1. 한번에 큰 반전을 통해 빵 터지듯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퍼즐 맞추듯이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완성해나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2.한국의 상황과 소름끼칠 정도로 유사한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를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생리, 도시화로 인한 가족의 해체
지역공동체 와해, 도시인들의 허위의식, 여성의 가치관 변화,
하우스푸어와 거품경제, 여성의 노동 문제 등을
장르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고 묵직하게 전달한다.
3. 흑백논리로 몰아간다거나, 무조건적인 악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개연성 있고 현실적으로 납득할만한 인물을 창조했다.
단점은, 우연으로 인한 단서 발견이나 사건전개가 종종 눈에 띄어서 살짝 아쉬웠다.
다중채무자들을 한데 싸잡아서 '인간적으로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동차 사고를 당한 운전자에게 전후 사정을 전혀 참작하지 않고 '너희 운전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게는 면허를 내주지 말았어야 한다'고 쏘아붙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봐라, 그 증거로 한 번도 사고를 안낸 사람들이 허다하지 않느냐, 그런 사람들을 보고 배우라고 말이죠.
"난 말이죠, 강의 같은 데서 '어쨌거나 야반도주를 하기 전에, 죽기 전에, 사람을 죽이기 전에, 파산이라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청중들은 그걸 듣고 우수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닙니다. 파산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직장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호적이나 주민표를 옮기면 빚쟁이들에게 발각되니까 아이 학교도 가입학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숨죽이고 살아가는 거죠....그런 '버려진 이들'이 이삼십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죠."
살아 있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富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버려진 이들의 무리.
현재의 도쿄는 더이상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토지가 아니다. 땅의 기운이 사라지고, 비도 내리지 않고, 경작할 괭이도 없는 척박한 황무지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대도시로서의 기능뿐이다.
....도쿄도 그와 마찬가지다. 어쩌다보니 이 도쿄라는 차에 필적할만한 성능을 가진 지닌 다른 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있더라도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용하게 된 것뿐이지, 본래는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품 같은 것이다.
인간은 새것을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대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새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앟는다.
그러므로 지금 도쿄에 있는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뿌리 없는 풀이며, 대부분은 부모, 혹은 그 부모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뿌리의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다.
너무 많이 올라서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내 집 마련을 꿈도 꿀 수 없게 된 거죠. 그렇다보니 거주 목적으로 집을 사려는 보통 사람들은 무리해서 대출을 받지 않아요. 현재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으로 파산하는 사람들 중에는 투자 목적으로 빚을 내서 부동산을 사들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요. 원룸맨션을 잘 굴려서 돈을 벌 생각으로 큰 빚을 내는거죠. 그런데 어쩌다보니 거품이 꺼지고 맨션 값이 폭락해버린 거예요, 지금 팔면 원금도 못 받아요. 하지만 어쨌든 빚에 대한 이자는 내야하잖아요.
"정보파산?"
"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돈을 왕창 벌 수 있다, 주식을 해라, 아니, 집을 사라, 아니, 골프회원권이다 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의 젊은이들은 요새는 어느 나라가 재미있다느니, 어디로 여행을 가는 게 현대적이라느니, 사는 곳도 이 지역에서 살아야 폼이 난다, 맨션도 이런 세련된 곳이 좋다,입는 옷은 이게, 차는 저게 좋다.....이런 것들이 다 정보잖아요? 다들 들떠서 정보를 좇기에 여념이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아직 제도와 법률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소비자신용이 자기 회사의 이익만 노리고 돈을 빌려주죠."
"저도 슬슬 혼자 사는 데 질리기 시작했었고, 도쿄는 물가도 비싸서요."
"스물다섯이나 되면 회사에서 버티기도 힘들었을 테고 말이야?"
다모쓰가 놀리듯 건넨 말에, 이쿠미는 뜻밖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정말이야. 진짜 싫었어."
만약 지금도 여전히 도쿄에 혼자 살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오스기 이쿠미는 절대 그런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짖궂긴" 하며 상대를 툭 치고 웃으며 대답했을 것이다. "그래, 맞아, 외로워 죽겠다"라며, 전혀 외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그애는 아마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찾고 있었을 거에요."
"자기보다 못한 친구?"
'네. 보나마자 외로웠겠죠. 외톨이가 된 느낌이 들고, 밑바닥까지 내려간 기분이었나봐요. 물론 자세한건 잘 모르지만.....그런데 결혼하는 것도 유학 가는 것도 아니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버린 나라면, 적어도 도쿄에서 화려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자기보다는 우울한 심정으로 살고 있을 거라 짐작하고 전화를 건거죠."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게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 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이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든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죠...."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 그런 기분에 젖어보자. 안 그래요? 지금은 방법이 많으니까요. 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뿐이죠."
'남자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어요. 오히려 여자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죠.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애쓴느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 다 착각이에요. 다이어트에 미친 여자를 비웃을 순 없어요. 다들 착각에 빠져 사니까"
혼마는 불현듯 떠올렸다. 쇼와 50년대 후반의 신용대출 대란의 근저에는 내 집 마련 소망과 그것에서 비롯한 무리한 주택자금대출이 있었다는 사와키의 말을.
그것 역시 착각 아니었을까.'내 집만 마련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라는 착각....
"...저기, 뱀이 탈피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게 행복하다고.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거에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세키네 쇼코는 미조구치 변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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