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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의 불쾌감

DidISay 2012. 4. 6. 01:58

 

 

좋은 책이라는 평이 많았고,
몇달 연속으로 베스트셀러라 궁금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리딩하라고 하는 것은 독특하게도 인문학 고전 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태교의 일환으로 영어테이프나 클래식을 들려주며,
아이를 양육할 때도 수학공식암기나 영어회화에 치중하지
막상 독서...그것도 인문고전 독서는 그리 신경쓰지 않잖아요.

(특히 그 놈의 영어 집착 때문에,
요즘 아이들 어휘력이나 독해 실력을 보면 형편없습니다.
영어독해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 한글 문해능력, 문법능력부터 키워야할 때에요.
'닭이'를 달기로 발음하면 틀렸다고 말하는 애들이 태반이에요)

하지만 이 작가는, 낮은 지능의 아이도 인문고전을 읽혔을 때에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을 요목조목 말하고 있어요.

때문에 아이의 교육의 중심에는 인문고전교육이 있어야 하며,
성인이 된 우리도 인문고전을 통해 1%의 경영자들처럼
뛰어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해요.

그런데 전 인문고전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취지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어딘지 거부감이 들었어요.
가벼운 느낌이 들고 적어도 이 책을 구입할만큼의 매력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이 저자가 생각하는 인문고전의 가치와
제가 생각하는 인문고전의 가치가 확연하게 달라서가 아닐까 싶어요.

일단 리드라는 것 자체가, 나보다 못한 미천한 누군가를
우월한 내가 이끌어준다는 뉘앙스가 풍겨서 피곤했어요.

좋은 인문고전 교육법이란, 저렇게 성공이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이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테크닉으로 얻어진다면, 저건 교육이 아니라 기술이죠.

오히려 사상들을 자신의 삶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녹여나가며
꾸준히 성찰하는 것이 인문학의 핵심 아닐까요.

그래서 엉덩이 무거운 성실한 사람이 천재를 이기는 유일한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죠.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대두한지 굉장히 오래되었고,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쓰이는 말이지만
사실 어떤면에서는 인문학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에 상처받고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 탈출구로 인문학이라는 공간을 택했기 때문이지요.

왜 하필이면 인문학일까요.
인문학은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특정한 부분을 건드려주고,
보여주고, 허영을 깨주고, 바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선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과 우리네의, 공통된 상처와 고민을 맞닿게 해서,
위안을 주는 동시에 문제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내공을 쌓게 해주죠.

인문학이 그저 우리를 상위 1%에 올리기 위한 자기계발적 도구라면...
기존 체제에서 재빨리 적응해 문제의식 없는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학문이라면
우리는 요즘 인문학을 찾지 않을거에요.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인문고전마저 자기계발의 하나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너무나 뚜렷한지라 오히려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리드하지 못하는 자는 그럼 루저인가요?

전 이 책을 읽는 내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니
너무나 아름다운 시를 무식하게 해체해서 달달 외우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들었어요.


제대로된 인문학이라면,
경제적으로 상위 1%든 하위 1%든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대안을 고민할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왜 지능이 안좋은 아이를 굳이 엘리트로 끌어올려야 하나요.

몇 학교를 제외하면, 타자의 자리로 내던져지는 학벌사회..
대기업이나 공무원만 바라보고 죽어라 뛰어야하는 이 지긋지긋한 사회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좌절하는 노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인문학을 쉽고 빠르게 읽는 스킬은 제공하지만,
참된 인문학의 정신이 무엇인지는 간과하고 있는 책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