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마루 밑 아리에티(2010) 본문
'마루 밑 아리에티'는 엄지공주를 연상하게 하는 아주 작은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아리에티 가족은 일명 '빌리는 사람들'로서
인간들의 물건을 조금씩 '빌려와' 생계를 유지해나가요.
이들은 인간과 섞여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인간처럼 쿠키를 굽고 홍차를 마시며
아름다운 집을 유지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인간과 매우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경계하고 조심해야하는 존재입니다.
이들은 일반 동화들처럼 동물과 완벽한 친화력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속해있는 것으로 보여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생각났던 것은,
이곡의 '차마설'과 이강백의 '결혼'이라는 희곡이었습니다.
이강백의 '결혼'에서 매우 가난한 주인공은 결혼을 하기 위해
저택과 하인과 부자로 보일 만한 여러 소품들을 빌리게 되죠.
요즘 결혼하려면 집이 필수라는데,
결혼을 하려고 사기까지 쳐야하는 저 연극을 보면 참 쓴웃음이 납니다.
다만 빌린 물건들은 모두 제한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이 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해요.
그 뒤에 여성 잡지 '사교란'에서 여자를 골라 맞선을 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빌렸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며 다시 빈털터리가 됩니다.
하지만 우습게도 여자를 정말 사랑하게된 그는
물질이 아닌 진심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얻길 바라게 되죠.
그리고 빼앗긴 물질을 더 이상 아까워하거나 초조하게 바라보지 않아요.
그는 그녀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빌린' 것이라는 진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당신을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빌린 것'으로 생각하면서 언제까지나 소중하게 대하겠다고 프로포즈 해요.
보통 그토록 열망하는 대상과 결혼을 하거나 연애를 시작한 뒤에
그것이 소위 '잡힌 물고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시들해지고 마는 것을 생각한다면 저것이 얼마나 로맨틱한 말인지 알 수 있죠.
이곡 역시 '차마설'을 통해서 모든 소유는 빌린 것에 불과하니
사람은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죠.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욕망하며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그것을 구매하며,
보이지 않는 소리 역시 소유가 가능하도록
CD와 같은 형태를 빌려 시각적인 소유물로 만들어냈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상대방이 나의 물질이나 외적인 조건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내 진심어린 마음을 깨닫고 사랑해주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 애를 쓰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온전히 소유되어 권태를 느끼게 될 사람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소중할 수 있는 존재를 원하죠.
그래서 우리는 소위 '밀땅'이라는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리에티 속에는 크게 두 명의 인간이 등장해요.
병약한 소년 '쇼우'와 통제력을 행사하려는 가정부
아리에티는 아빠와 함께 물건들을 빌리러 온 자리에서
실수로 각설탕을 떨어뜨려 소년에게 발각됩니다.
하지만 그는 아리에티를 잡거나 없애려고 하는 대신 도와주려고 애를 쓰죠.
쇼우는 큰 수술을 앞두고 있었던 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멸종해가는 종족인 소인들을 이해해주고 도와주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각설탕을 다시 갖다주고
새로운 부엌을 선물하는 등 선의를 베풀며 서서히 친해집니다.
문제는 쇼우가 선의로 행한 이 모든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가정부가 그들을 발견하게 되는 악몽의 계기가 되어버려요.
실제로 쇼우는 매우 착한 인물로 그려지며, 가정부 역시 악인이라고 하기엔 무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등장은 매우 공포스럽습니다.
이는 마치, 원주민들에게 '개화'나 '문명'의 이름으로 제공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그들을 파괴해버리는 것을 연상시키죠.
이들에게는 최첨단 신식 부엌이나 공짜로 얻는 각설탕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배려와 관용이 가장 필요했던 것인데 말이죠.
한편, 소인국의 존재를 알아차린 가정부는 청소업체를 불러 생포를 요청합니다.
그는 소인들이 우리의 물건을 '훔쳐간다'고 표현하며,
그들을 유리병에 가두고 통제하려고 애를 쓰죠.
사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들은 자연의 힘을 빌려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을 할 수 있는한 우리의 삶의 일상에서 내쫓기를 바라며
자연으로 인한 불편함을 참아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근대화된 인간이 자연을 즐기는 방식은 오지의 밀림 그 자체가 아닌
오로지 통제의 영역에 있는 가공되고 인공적인 정원과 같은 형태죠.
결국 아리에티의 가족들은 쇼우의 집을 떠나게 되며,
쇼우는 수술을 앞두고 아리에티와 이별을 고합니다.
이때 주목할 점은 쇼우가 '무료로 베풀었던' 각설탕을 받지 않았던 아리에티가
이별할 때는 '각설탕'을 자신의 자신의 머리 집게를 건내주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후자의 것은 값싼 동정이나 무상의 베품이 아닌, 마음의 선물이라는 차이가 있었죠.
이 작품은 매우 씁쓸하고 비관적입니다.
유일하게 소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 죽어가는 병약한 인간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큰 수술을 앞두며 이별을 한다는 점.
그리고 유일하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던 아리에티의 가족이
화해나 공존을 시도하지 않고 인간을 떠난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영화에서는 거듭해서 이 소인들이 멸종해 가고,
쇼우처럼 죽어가는 종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런 공통점들은 영화에서는 쇼우와 아리에티의 교감이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매우 씁쓸함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내내 빌려가고 빌려주는 관계였던 인간과 소인들의 관계가
아리에티와 쇼우의 '교환'과 '마음의 선물'로 전환되는 것은 꽤 긍정적이에요.
인간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강인한 존재로 거듭난 것이죠.
요근래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작품도 피하고 있었는데 기대 이상의 수작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운 색채와 세밀한 묘사, 그리고 유럽풍의 음악이
귀와 눈을 모두 즐겁게 하는 작품입니다.
요즘 독서모임 때문에 '오래된 미래'를 다시 읽고 있었는데,
라다크의 사람들이 자꾸 연상되는 이 작은 사람들 때문에
희망과 절망을 모두 담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이 참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그들 각자의 무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Balance(1989) (0) | 2012.03.23 |
---|---|
화차(2012, 변영주) (0) | 2012.03.18 |
고독한 스승(Lean On Me) (0) | 2012.03.16 |
고곤의 선물(2012,명동예술극장) (0) | 2012.03.11 |
키리쿠,키리쿠(2005) (0) | 2012.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