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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미셸 투르니에 본문
이번에 읽은 책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소설 입니다.
이 소설은 영국작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에요.
로빈슨 크루소는 아마 한번쯤 제목정도는 들어보셨을 작품인데, 무인도와 다름 없는 섬에서도 30년 가까이 꿋꿋이 청교도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한 영국인의 이야기 입니다. 루소가 에밀에게 읽히는 최초의 책이 바로 로빈슨 크루소였던 것이 생각나네요.
이 책에서 주인공인 로빈슨은 자신이 식인종으로부터 구출해준
흑인을 시종처럼 부리는 등 제국주의의 논리를 이 섬에서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말 그대로 영국중산층의 주체성을 잃지않고 꿋꿋하게 살아가요.
우리는 엉뚱하게 꿈과 희망을 잃지않는 어린이용 작품처럼 읽히곤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영국인들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2년 남짓 살고 구출되었는데
이것을 28년으로 늘려놓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뻥튀기 작가이기도 합니다 ㅎ
투르니에는 미셸 푸코나 들뢰즈와 더불어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도 하고,
본인 스스로가 칸트 강독 모임을 만들어 주도한 경험도 있었죠.
때문에 이 소설에도 그런 내공이 깃들여 있어,
일종의 패러디작품임에도 원전을 훌쩍 뛰어넘는 사유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이 책이 유명해지게 된 건, 투르니에의 고교동창 들뢰즈가 이 책을 읽고
위대한 작품이 나왔다고 극찬하며 그의 책 '의미의 논리'에서 언급해
유명세를 타면서 중요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죠.
투르니에가 그의 회고록에서 마치 칸트가 살아돌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들뢰즈의 천재성으로 인해, 철학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문학자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고 잘 한듯 -_-;; 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 투르니에는 기존의 로빈슨크루소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철저히 타자의 위치에 있었던
프라이데이를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요.
로빈슨크루소가 금요일날 구해줬다고 해서,
이름마저 프라이데이였던 주변적인 인물에게 이야기를 주도하게 합니다.
네.맞아요.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의 불어식 이름입니다. :)
이 소설은 6장까지는 기존의 소설과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되다가,
방드르디가 등장하는 7장부터 급격한 변화를 보여요.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로빈슨크루소는 방드르디를 통해 완전히 변해버립니다
사실 30년이나 무인도에 혼자 산 사람이 오히려 원주민을 미개하게 여기고
꿋꿋하게 문명에서 누리던 생활습관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죠.
보통이라면 마치 늑대 소년처럼, 그 섬에 동화되어 적응해가는 것이 정상적이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때문에 패러디물인데도 이 소설은 오히려 원작보다 리얼하고 설득력이 있어요.
원작에서 구출되어 영국으로 돌아가는 로빈슨크루소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 그는 섬에 남아 있는 삶을 선택합니다.
이 섬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영국의 자본주의와 문명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죠.
이 소설은 투르니에가 작정을 하고 꼼꼼하게 구성한 아주 지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이 섬에 와서야 내면화된 자본주의의 흔적을
발견하는 과정이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들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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