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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1950, 구로자와 아키라) 본문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해 정직해 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하지 않고는 못배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인간, 즉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악이다.
- 구로자와 아키라.
몇년 전 신정아의 학력위조 사기극을 계기로 허언증이라는 증상이
떠들썩하게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자신은 죄가 없다고 끝까지 믿었던 것처럼
우리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악행을 범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악행이나 의도적인 잘못은 언제나 이루어지고
우리는 스스로의 꺼림직함을 속이기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위한 대의를 완성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하고 이를 그대로 믿어버린다.
이 영화는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단편 소설 '라쇼몽(나생문)'과 '덤불 속'을 묶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소설은 예전에 읽어봤는데 영화는 내용만 알고 있다가 이제야 보게 된.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는 '덤불 속'에서 따오고,
니힐리즘이 물씬 풍기는 배경이나 분위기는 '라쇼몽'에서 착안한 것 같다.
라쇼몽은 6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 좋은 영화로 일컬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해서 감상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참신한 연출과 스토리전개가 꽤 현대적이기도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그에 대한 공감대가
요즘 우리에게도 충분히 울림을 가지고 다가온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산적이 여성을 강간하고, 그 남편이 살해당한 사건을 통해 전개된다.
누가 범인이냐 누구의 잘잘못이 더 크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산적,여성,남편(이 자식은 죽어서까지 거짓말을-_-;;),
목격자의 말이 모두 다 다르다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인데,
그 전개 과정이 꽤 흥미롭다.
각각 자신의 잘못이나 위선,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서 각색한 기억들과 증언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군상들이
보는 내내 냉소적인 감정을 씁쓸하게 내뱉게 한다.
라쇼몽의 도꺠비들도 사람들이 무서워서 다들 도망갔을거라는 대목이 있는데
부정할 수가 없는...요즘은 귀신이나 자연재해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이니..
하지만 감독은 참 따스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결말에 작은 희망을 남겨주었으니까.
태어나자마자 버림받고 강도까지 당하는 아기는 결국 보호자를 찾았고,
이익을 위해 거짓증언을 했던 사내는 아기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을 것이다.
인간에 대해 강한 실망과 불신을 갖게 된 스님도
그 광경을 보면서 작은 위안과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를...
나생문이 그물처럼 얽히고 얽혀져서 태어남을 의미했던가.
마치 인드라의 구슬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한 사람이 불행하면 그 그물의 파동으로 그 불행을 나눠갖고,
또 한 사람이 기쁨을 갖으면 모두가 기쁨의 에너지를 받게 된다고 했다.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은 결국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더라.
당장의 이익을 위해 비정규직을 확대하거나 복지기금을 줄여버리게 되면
그 피해가 나에게까지 돌고 돌아오듯이..
우리가 어떤 선행을 행한다면,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닌
결국 나를 위한 善인 것이다.
덧1) 이 작품의 소소한 재미는 닮은 꼴 인물 찾기 ㅎ
감독부터 배우들까지 모두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감독-유재석/ 산적-노홍철/남편-독고영재/아내-눈 커진 데본 아오키, 이준기=_=;;
특히 산적은 영화 상에서도 ADHD가 의심 될정도로 산만해서,
몸짓이며 표정이 노홍철과 너무 흡사 ㅎㅎ
덧2) 보는 내내 생각났던 영화들.
오 수정, 어톤먼트,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덧3) 살아남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한다는 처절함은 소설 라쇼몽이 최고;;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뽑다니...
덧4) 라쇼몽(나생문羅生門)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수도였던
교토의 남쪽 정문이다.
소설 상에서도 교토에 지진과 회오리바람, 화재, 기근이
몇년간 끊임없이 발생한 탓에 거의 다 허물어진 상태로 등장한다.
다들 시체를 갖다 버리고 까마귀며 여우가 드나드는 그런 장소.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부터 폐허로 상상은 했는데
영화에서는 내 생각보다 꽤 웅장한 문이라 살짝 놀랐다.
문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사찰건물을 연상시켰던.
덧5)여자 캐릭터가 꽤 흥미로운데 나약하고 눈물만 흘리는 여성상이라
우는 소리 듣기도 싫고 어지간히 짜증유발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여성성을 이용해 원하는 바를 취하는 가장 영악한 인물-_-;;
남편은 어쩜 그리 찌질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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