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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다이어트의 여왕-백영옥

DidISay 2012. 5. 1. 23:28

 

스타일의 작가 백영옥.

칙릿소설들은 좀 기피하는 편이라 읽을 일이 없었던 작가의 소설인데,
요즘 전자책을 대여해서 읽다가 눈에 띄어서 접하게 된 책이다.

명작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간간히 좋은 문장들이 있어서 의외였는데,
다이어트라는 소재 자체가 워낙 흔해서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사실 가벼운 주제는 아니다.

소설 속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감이 거의 안느껴질 지경이니,
이 세상이 물질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에 미쳐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려나.

부끄러움 없이 돈이나 외모가 최고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니까.

 

 

 

어찌되었든 눈에 띄었던 문장들을 남기자면.

 

*내가 왜 여행을 자주 가는지 알아? 그건 빠르게 사라지는 시간이 두렵기 때문이야. 여행은 일상속의 시간을 늘려주거든. 여행을 하면 내가 천천히 늙는단 느낌이 들어. 생각해봐. 차를 타면 언제나 처음 찾아가는 길이 되돌아 오는 길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지잖아.

  버스를 타고 낯선 동네에 들어섰을 때의 아득함. 목적지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를 때, 길은 한없이 낯설고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돌아올 때 보는 그 길은 한결 부드럽고 익숙해진다. 그렇게 시간은 이전보다 10도쯤 기울어 빠르게 흐른다.

  나이가 들어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건, 이미 살아온 삶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어제와 내일이 비슷하고, 올해와 내년의 사랑이, 십 년 후 친구와 가족들이 변치 않으리란 빤한 예측들, 성공의 기쁨과 실패의 절망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면, 앞으로의 시간들은 새롭게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들로 '포개져'버린다. 그러니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질밖에. 늘 가는 식당, 늘 가는 회사, 늘 만나는 사람들과의 시간은 언제나 포개지며 반복되니까.

  낯선 길이 두렵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익숙함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다. 시간을 확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러므로 미지의 길을 걷고, 나와는 다른 억양을 쓰는 타인을 만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어쩜 낯선 공기와 진한 향신료 냄새, 심하게 구불거리는 언어와, 우리와 다른 운전석에 시간의 비밀이 있을지도.

  여행이란 익숙한 시간을 깨끗한 물에 빨아 오후 2시의강렬한 태양 아래 걸어놓는 일인 것이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내가 다니던 집이랑 골목이 없어지고, 이십 년 동안 가던 목욕탕이며 헌책방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봐. 성룡 영화를 보던 극장이 죄다 멀티플랙스가 됐다고 생각해 보라고. 산티아고 나부랭이는 잊어버려! 연두 네가 여행을 가야 한다면, 제일 먼저 돌아봐야 할 곳은 서울이야. 이 대대적인 뉴타운 사업이 끝나고 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오래된 서울은 정말 많이 사라져 있을 테니까. 우리야말로 정부에게 고향을 강탈당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거야.


  여배우가 나아기 들면 주름 하나만으로도 연기가 되거든. 근데 서울은 보톡스를 엄청나게 때려맞은 중년배우 같아.


 

*사라지는 공간을 저장하는 것보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사진을 남기는 것은 더 중요하다. 공간은 추억을 남기지만, 사람은 사랑을 남기니까.


 

 

*나는 늘 이별의 상황을 생각했었다.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 '퍼플'의 주방에서 미끄덩한 대구의 비늘을 정리하다가, 양파를 썰거나, 가니시로 쓸 아스파라거스를 물에 넣다가도. 이별을 준비하면 그걸 받아들이기 조금 더 편안해진다는 친구 인경의 말이 떠올라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코끝은 언제나 매워졌다. 매운 봄양파 때문은 아니다.

  내가 잘할게!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말했던가.

  내가 변할게!
<추억>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그 시절의 젊은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잘한다고, 변한다고 울먹이던 사람들은 결국 버림받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늘 로맨스 영화의 희생양이 된다. 공포영화에서 가슴 큰 금발머리가 언제나 첫번째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이것이 연애의 잔혹한 법칙이다.

 

 

 

 

 

* “난 싸이월드 싫어! 요리사한텐 정말 최악이야.”

  블로그나 싸이월드에 올릴 사진을 찍느라 기껏 손을 데어가며 뜨거운 접시에 올려놓은 해물찜을 최악의 상태로 만드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70도에서 열두 시간을 구워 딱 70도일 때 먹어야 제맛이 나는 요리를 위해 오븐에 접시를 데우고, 부리나케 뛰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세심함은 눈곱만큼도 모르면서, 음식을 여기저기 휘젓는 행동 역시 못마땅했다. 지금 당장 먹으라니깐! 육질을 살리려고 저온에서 익히느라 죽도록 고생했다구,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요란스런 사람들을 향해 소리지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백건대, 나는 한 번도 요리사를 예술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요리를, 패션과 건축을 예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나는 늘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해왔다. ‘예술’이라는 휘황찬란한 단어를 내뱉는 순간, 자연스런 일상이 제거되면서 생기는 인위적인 조합들이 싫었다. R레지던스 앞의 강박적일 정도로 꾸며진 인공정원처럼 말이다. 소위 퓨전, 이를테면 아방가르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만드는 기괴한 요리들, 도저히 나이프나 포크로 뭉갤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답고 견고한 장식들...... 음식이 ‘패션’일 수 있다면, 그건 멋진 장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 단언컨대, 쿨한 이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 옛날 당신이 애인과 가볍게 인사하고 멋지게 헤어질 수 있었다면, 그건 진짜 연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가짜연애는 넘친다. 짝사랑, 폰섹스, 인터넷 채팅, 문자메시지에 메신저까지. 그건 레스토랑에서 진짜 스테이크가 아닌 ‘콩’으로 만든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과 똑같다. 콩이 쇠고기일 수는 없다.

 

 

 

 

 

 

 

* “인생은 초콜릿 상자에 담긴 초콜릿과 같다.

 어떤 초콜릿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도 달라진다.”


  인생의 달콤쌉싸래함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인생은 커다란 약상자에 든 당의정이다. 쓴맛을 감추기 위해 핑크빛 당의정을 덧씌우지만, 마지막에 입안을 압도하는 건 기막히게 쓴 원래 약 맛이다.


  인생이 당의정 같다는 건, 진실을 알기 위해 힘들게 삶에 입혀진 당의정을 벗겨봤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리다.

 

 

 

 

 


* 종종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은 인생이 노력한 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 거란 생각이 든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란 말이 그저 말장난이 아니란 걸 알아버리는 순간 깨닫게 되는 건, 인생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삶은 언제나 우릴 배신한다. 인생이라는 링 위에서 우린 언제나 얻어맞는 패자, 피 흘리는 복서다. 인생이 서글픈 건, 승자도 결국은 얻어맞기 때문이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상처 없는 얼굴로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복서 따윈 없다. 단지 덜 맞고, 더 맞고의 차이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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