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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한강

DidISay 2012. 6. 11. 14:04

 

 

 

 

채식주의자는 세 편의 중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영혜)의 남편이 서술하는 '채식주의자' / 그녀의 형부가 말하는 '몽고반점'/ 영혜의 언니가 이끌어나가는 '나무불꽃' 은 작가의 말처럼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기는 장편소설'로 완성되고 있다.

 

  이 소설을 처음 봤을 때는 최근 들어 트렌디해진 '채식주의'라는 단어를 도대체 작가가 어떻게 풀어갔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첫장부터 미처 덜 익은 밥을 허기져서 허겁지겁 손으로 퍼먹듯이 급속도로 빨려들어갔다. 가끔 어서 이 뒷부분을 읽고 싶은 탓에, 눈이 읽는 속도와 마음의 속도가 엇박자를 일으킬만큼.

 

  이 소설의 주인공 영혜를 묘사하는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말그대로 평범하고 어디든 모나지 않고 순응적인 사람. 남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도 없고 잔소리도 하지 않는 그런 여자이다. 사랑보다는 그저 평범한 아내의 역할 대행자가 필요했던 그에게 영혜는 최적의 상대였고, 5년이 넘어가는 결혼생활도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다.

 

 

다만 그녀에게 조금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브래지어가 자신을 너무나 숨막히게 한다며 이를 견딜 수 없어한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그런 행위가 누군가를 성적으로 도발하려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게 브래지어는 여성의 미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두툼한 패드'가 아니라, 여성을 일정한 틀에 가둬버리는 사회적인 억압이자 압제의 도구라는 것을. 그녀가 답답해하는 것은 물리적인 가슴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세월을 그저 침묵하며 견딘 폭력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여성의 젖가슴은,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도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 지는거지."



  어느날 자신이 피와 고깃덩어리를 잘근잘근 씹는 꿈을 꾸기 시작한 영혜는, 돌연 '채식주의자'가 될 것을 선언하고 모든 고기를 끊어버린다. 사실 그녀의 '채식주의' 행동은 모든 동물적 욕망의 중단에 가깝다. 그녀는 수면욕, 성욕, 식욕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중단하다시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식물'이 되고 싶어한다. 하늘을 향해 치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뿌리를 박는 식물. 고기냄새가 나지 않는 꽃.

  영혜의 이런 행위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이나 그녀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적인 압제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폭력과 관련된 그녀의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그녀에게 남게 되며, 결국은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녀의 이런 선택은, 폭력-육식-은 다른 폭력-육식-을 부르는 연결고리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1. 그녀는 꿈을 꾸기 전날 얼어붙은 고기를 썰고 있다가 남편의 짜증섞인 책망(언어폭력)을 듣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그녀가 그저 침묵했듯이, 이번에도 그녀는 변명 한마디 못한다. 이 와중에 우연히 칼에 벤 자신의 손가락에서 나온 핏방울을 입에 물자 마음이 편안해짐을 경험한다. 또 우연하게 들어간 식칼의 조각이 남편을 다치게 할 뻔 했는데도 그녀는 놀라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평온한 자신을 발견한다.

 



2.어릴 적 자신을 문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여 피거품을 토할 때까지 달리는 장면을 어린 영혜는 빤히 지켜본다. 그녀는 불쌍함을 느끼기 보다는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떠올리며, 보신탕에 밥을 말아 한그릇을 모두 비운다. 어른이 된 그녀는 그저 '나쁜 놈의 개' 였을 뿐이므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다.  


 

3. 그녀의 가족이 그녀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설득하면서 하는 말은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녀의 아버지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육식을 강요한다. 폭력과 육식은 언제나 공존과 상생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화의 과정이며 내가 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관계로 서로를 끌어들인다.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이런 그녀의 행동을 가족조차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그녀가 불편할 뿐이고, 남편은 그녀의 별난 행동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망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가 불편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 어딘가 병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더 이상 섹스를 해주지 않고 맛있는 고기반찬을 차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강제로 범하면서 야릇한 흥분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 내내 온순하게 말을 잘 듣던 영혜가 반항을 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너무나 폭력적이고 압제적인 방법으로 그녀에게 육식을 강요한다. 아무도 그녀가 자살하려 그은 손목보다 답답한 가슴이 아픈지, 왜 고기를 거부하는지 묻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녀가 모든 사회적인 규칙들을 거부하자 그녀와 모든 인연을 끊고, 타인이 되버린다. 유일하게 그녀를 떠나지 않은 (하지만 바로 곁에 두고 감당할 수는 없었던) 이해심 많은 언니도 끊임없이 그녀를 정상에 되돌려놓으려 애를 쓸 뿐이다.

  이런 그녀와 그나마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우습게도 가장 금기시 되는 관계인 형부였다. 그녀의 형부는 서글서글하고 화사한, 사회적 소통에 능한 그녀의 아내에게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을 알뜰살뜰 보살펴주는 여성스러운 아내보다는,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을 가진 영혜에게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그의 이런 마음이 욕망으로 폭발하게 된 계기는 바로 영혜의 '몽고반점'이다. '몽고반점'은 스물살즈음에 없어지는,  아이의 상징이다. 인위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 인간이 변해갈수록 점점 옅어지는 상징.

  하지만 영혜에게 아직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하게 들은 순간, 그녀의 채식주의와 푸른반점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그녀에게 강한 성적매력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에 대한 열정도 사랑도 사라졌던 그에게,  강렬한 예술적 영감과 욕망이 동시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영혜 역시 (의도적인 접근이었지만)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식물처럼 만들어주고, 역시 온몸에 꽃을 그려놓은 형부에게 몸을 연다. 다른 이는 꽃을 온몸에 그린 그를 불쌍하고 성적매력을 상실한 존재로 봤지만, 오히려 영혜는 '고기냄새'가 나지 않는 식물로 그를 받아들인다. 우스운 점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옷이나 신발에는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만, 가장 자연상태에 가까운 알몸이나 식물은 성적인 이미지를 상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들의 교합은 섹슈얼한 인간의 사랑나누기가 아니라, 풀냄새 나는 식물들의 번식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의 결합은 일반적인 가정과 사회 안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고, 결국은 타자들을 수용하는 장소인 정신병원 외에는 갈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인간의 삶은 욕망의 범벅으로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 또한 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고,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폭력적인 시스템 역시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존재해 왔다. 하지만 슬픈 것은 항상 누군가의 폭력은 다른 이에 대한 폭력으로 전염된다는 것이다. 마치 '링'의 죽음을 부르는 테이프처럼. 이런 잔인한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영혜의 선택처럼 식물이 되는 것 뿐일까. 

  한 가지 희망이라면 식물이 되어 가슴마저 점점 말라가던 영혜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보드레한 살 속에서 빛나는 젖가슴이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돌봄을 상징하는 여성의 모성과 생명존중에 주목했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포용, 공존의 부드러움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