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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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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DidISay 2012. 6. 19. 05:52

 

  이 책을 읽게 된 몇가지 이유들.

1. 웹상에서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몇가지 여성 대 남성 구도에 대한 짜증남
2. 관련 섹션에서 흥미로운 주제의 책들이 발간되어 찾던 중 계속 눈에 밟힘
3. 보슬아치니 정액받이니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단어들에 대한 의구심
4. 여성의 타자화에 대한 분노. 동시에 약하고 힘이 빠진 (?) 남성들의 한탄과 분노가 쏟아지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
5. 꽤나 패기찬 제목에 거침없는 문장들이 인상 깊었는데, 알고보니 저자가 48년생의 이제 은퇴한 동경대 명예교수라는 놀라움.
   그럼에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 중이다.


-일본의 드라마나 신드롬에 빗대어 설명해서 몇가지 안맞는 점이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과 학자들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남성과 여성 모두의 행동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문체가 대체로 시원시원하고 직설적이라 좋았다. 이브 세지윅의 이론을 주된 틀로 사용하고 있음.

  요즘 신사의 품격을 보고 있다보면, 이제 40대 아저씨들도 점점 살기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만 -_-; 
  과거에 '미시족'이란 말을 시작으로, 아줌마들도 퍼진 생활을 하면 패배자로 인식되었듯이
  이제 40대도 자기관리, 커리어관리, 미용에 힘쓰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와버린 듯.

  20->40대로, 여자->남자로 외모지상주의와 동안찬미은 늘어가나니.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점점 '평범함'을 유지하려면 해야하는 것들이 추가되는구나.

   


 


번역자의 말 중.

 

'딸 가진 죄인'

  아마도 현대의 많은 이들에게 있어 '여성 혐오'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계기는 취업과 결혼일것이다. 학교는 공식적으로는 젠더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고 핵가족 구조에서 부모는 젠더 차별을 행하여 기대할 이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들 못지않게 귀하게 자란'이가 처음으로 젠더 권력 관계의 벽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학교를 마치는 순간, 시집을 가는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결혼 제도 속에서 그 벽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딸 가진 죄인'이다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만으로 부모는 죄인이 된다는 이 말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었는지 한 번 기억을 더듬어보자.
   열 달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고추가 달려 있지 않아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 때. 돌잔치 때 시댁 식구 뒤치다꺼리 하는 친정 엄마를 볼 때, 명절 때마다 시댁 가져다주라며 바리바리 싸주는 친정 엄마를 볼 때, 그런 친정 엄마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댁 식구들이 화가 나지만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을 대, 시부모님 모시느라 힘든데 나까지 짐이 되면 안된다며 아파도 전화 한 통 안하는 친정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딸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은 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있지도 않은 '죄값'을 평생에 걸쳐 치러야 하는 것이다. 딸이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가 딸을 낳는 '어머니의 연쇄' 속에서 여자는 스스로 딸로 태어났다는 죄를 저지르고, 그 죄값을 부모가 치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 스스로도 딸을 낳은 죄값을 치러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는 태어남과 동시에 거대한 '원죄'구조 속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변해서 요새는 그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우선 그/그녀가 어떤 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는지 살펴보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 '시금치'의 쓴 맛을 보지 못한 '미혼 처자'의 희망에 찬 대사일 수도 있고, 미래의 아내가 맞닥뜨리게 될 상황을 상상할 수 없는 '미혼 총각'의 철없는 대사일 수도 있고, 눈 감고 모른 척 배 내밀고만 있으면 되는 '남편'의 천연덕스러운 대사일 수도 있고, 딸 가진 죄값을 치를 일 없는 '시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오만한 대사일 수도 있고, '아직 딸 키우는 재미에만 몰두하고 있는 '미래의 친정 부모'의 사려 깊지 못한 대사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보슬아치'

  얼마전 지인에게서 '보슬아치'라는 단어가 인터넷에서 유행이라고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지와 벼슬아치를 조합한 말이 '보슬아치'로 알기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보지 달린게 무슨 벼슬인 줄 아나'이다. 측은함이 들었다. 비꼬는 말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공감과 동정을 표한다. 그동안 쌓인 게 얼마나 많았을까.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사회에서 짊어져야 하는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학교, 군대, 취업, 결혼과 같이 평생을 좌우하는 일대 이벤트를 거칠 때마다 남자들은 극도의 긴장을 경험하며 시험대에 올라야만 한다. 승리와 패배, 절망과 희망이 반복되는 이런 굴레가 남자에게만 씌워진 것 같아 '적당히 남자 하나 골라서 얹혀 살기만 하면 되는' 여자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고생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크기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남자가 짊어져야 하는 짐'을 짊어져 본 적이 없는 이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나마 고생한 걸 알아주기만 해도 조금 나을텐데, 우리 사회에서 군대 고생은 '누구나 다 하는 것',취업 전쟁은 스펙 쌓는 걸 게을리 한 '개인 책임'으로 정리되기 때문에 억울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연애라도 잘 풀리면 나름 위안이라도 될 텐데 그것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여친 비위 맞춰가며 각종 기념일 챙기고, '이벤트' 기획하느라 있는 돈 없는 돈,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바쳐서 뛰어다녔는데 그 대가로 돌아오는 건 보답도 인정도 대우도 아닌 '감사할 줄 모르는 여친의 태도'이니 '보지 달린 게 무슨 벼슬'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남자들은 그동안 남성 경험의 언어화를 게을리 해왔다,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고 벅차고 괴롭고 화나고 배알이 틀려도 그걸 말로 표현하면 '밴댕이'취급당하고,  입다물고 포용력 있는 남자를 연기하면 '남자답다'고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한편 남성 스스로가 '언어화'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고 '수다'를 '계집'의 전유물로 만들어온 책임도 있다. 어쩌면 '보슬아치'라는 말은 남성 경험을 언어화했다는 의미에서 환영해야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성 경험의 언어화를 환영한다고 해서 여성 혐오의 언어화까지 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보슬아치에는 분명 남성 경험의 언어화라는 측면이 있으나, 여성 혐오의 언어화 측면이 더 크며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의 배후에는 '벼슬하는 보지들'을 '노비'계급으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을 위해 뒤치다꺼리 하는 존재, 남자보다 논리력과 결단력이 떨어지는 존재, 남자보다 한 단계 아래 수준에 속하는 존재로 여기며 자라왔는데, 막상 연애를 해보려니 주제넘게도 나를 부려먹는 태도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원래 위치를 망각하고 감히 나를 이용해먹고 내 위에 올라서려 하다니 당치도 않다. 이 보슬아치들을 응징하여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야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말에느 또한 자신의 성욕을 여성이라는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와 울분도 새겨져 있다. 보지가 벼슬이 되는 궁극적 이유는 바로 남자들이 보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보슬아치'라는 말은 한국의 여성 혐오를 상징하는 대단히 훌륭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보슬아치란 말에 우에노가 이 책에서 말한 거의 모든 분석적 틀을 대입할 수 있으니 말이다.
  '보슬아치'라는 말의 탄생이 남성 경험의 언어화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라고 한다면 앞으로는 '보슬아치'처럼 저속하고 값싼 화풀이로 끝나는 언어화 말고 가려져 있던 현실을 드러내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진지하게 사회 전복적인 언어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지금껏 페미니스트들이 해왔던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짊어져야 하는 짐'을 열심히 말과 글과 행동으로 옮겨 왔고 '당사자가 아니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고생'을 모두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싸움을 계속해왔다. 이제 남자들도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 부조리한 남성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으면 좋겠다.

 

 

 

본문 중에서.    

 

  나는 예전에 가부장제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의한 적이 있다. ‘가부장제란 자신의 다리 사이로 낳은 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멸시하도록 기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어머니의 딸에 대한 기대는 아들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양의성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딸(=여자)로서 성공하라’를 동시에 보낸다. 두 메세지 모두 ‘제발 나처럼은 되지 말라’는 자기 희생의 메세지이지만 그 속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너야’라는 질책의 메세지가 숨겨져 있다. (…) ‘불만스러운 딸’이 고도 성장기의 산물이었다면, 그녀들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면서 대신 등장한 것이 어머니의 화신이 되어 그 부채에 신음하는 ‘자책하는 딸’이다.

 

 


  여학교 문화의 이중 기준 속에서 남자가 보기에 ‘괜찮은 여자’와 여자가 보기에 ‘괜찮은 여자’는 다르다. 남성이 여성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여성이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남자가 보기에 괜찮은 여자는 여자들 사이에서 원망과 선망을 동시에 받는다. 한편 여자들은 남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아니 더 나아가 남자들이 꺼려하는 여자를 괜찮은 여자로 인정하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매춘 가격은 매춘부에게 매겨지는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춘이라는 동전의 뒷면은 매춘이다. 남자가 지불하는 돈은 남자가 자기 자신의 매춘에 대해서 매긴 가격이기도 하다. A씨에게 5천엔을 지불한 남자는 A씨의 성의 가격을 5천엔이라 여겼을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성욕에 5천엔이라고 하는 가격을 매긴 것이다. 거기에는 성욕의 충족을 여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남자들에 대한 비웃음이 존재한다.

 

 

  '여자가 여성 혐오를 자기 혐오로 경험하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 바로 예외적 여자가 되어 자기 이외의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여성 혐오를 전가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략이 존재한다. 하나는 특권적인 엘리트 여성, 즉 남자들로부터 '명예 남성'으로 인정받는 '능력 있는 여자'가 되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고 하는 범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여성으로서 가격 매겨지는 것 자체를 회피하는 '추녀 전략'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출세 전략'과 '낙오 전략'이라 할 수 있을까.
  미시마 유키오는 "논리적인 여자는 없다"고 말한다. 여자는 논리적이지 않다. 그런데 A는 논리적이다. 따라서 A는 여자가 아니다. 단순하고 완벽한 삼단논법이다. '예외'조차 설명 가능한 이 논법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그래 맞아, 진짜 여자는 너무 감정적인 것 같다. 나도 그게 싫어."
  A양이 말한다.
   "근데 너는 좀 특별하잖아."
  남자가 인정한다.
   "응, 나는 '평범'한 여자는 아니지."
  그녀는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그러나 이 '예외'를 통해 '평범'한 여성에 대한 멸시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호모소셜한 남성 공동체에 명예 남성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그것은 표면적인 인정에 불과하며 같은 '동지'로 여겨지는 일은 결코 없다. 마치 백인 중산층 사회에 들어간 흑인과도 같다.
  "검둥이 노예는 틈만 있으면 속이려 들고 사기를 치려고 하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돼, 자네? 자네는 특별해. 우리랑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중산층 집단 속에서 이런 말을 들은 흑인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까? 동조하여 차별을 조장하는 쪽에 설 것인가. 아니면 화를 내고 그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것인다.
  이 '예외'전략은 사회 곳곳에서 여러 종류의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나이든 분들은 참 골치가 아파요, 늘 욕을 해대고 같은 말을 반복하잖아요. 어머, 어머님요? 어머님은 달라요. 아직 정신이 멀쩡하시잖아요."  
  "그래, 그래서 나도 노인들 있는 데는 될 수 있으면 안 가려고 해."
  "일본 여자들은 왜 그렇게 태도가 애매모호하지? 예스인지 노인지 정말 모르겠다니까. 너? 너는 다르지, 너는 전형적인 일본 여자가 아니잖아."
  "응, 나도 지긋지긋해. 나는 일본하고 안맞는 것 같아. 그래서 일본을 벗어났지."
  이런 대화의 대부분은 사실 블랙 조크다. 
  특권적인 '예외'를 둠으로써 차별 구조는 보존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여자 전문대학에 교원으로 있던 시절, 나는 수업 때마다 학생들을 상대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하곤 했다. 나는 수업 때마다 학생들을 상대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하곤 했다. 질문 중에 '여자로 태어나서 손해인가? 이득인가?' 와 같은 것이 있었는데, 회수한 설문지에는 '디스코장 입장료가 반액 할인이라 이득' '데이트 비용이 안 들어가니까 이득' 같은 순진한 대답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집어든 한 장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답이 적혀 있었다.
  '못 생기게 태어난 저한테는 이 질문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손해냐 이득이냐는 '여성'이라고 하는 범주에 속해 있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여성'이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즉,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여자는 '여성'이 아니다. 늙은 여자는 '여성'이 아니다. 유방과 자궁을 잃은 여자는 '여성'이 아니다. 추녀는 '여성'이 아니다......이렇게 여자는 '여성'이라는 범주로부터 추방당한다.
  여자는 언제 '여성'이 되는가? '여자애'가 '여성'으로 변신하는 메타모르포제(metamorphose)의 시기가 사춘기이다. 오구라 치카코가 '사춘기'에 부여한 탁월한 정의를 내 식으로 다시 말하면 이렇다. 자기 신체가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였을 때, 그 연령에 상관없이 소녀의 사춘기는 시작된다.
  때문에 일곱 살 때부터 교태를 익히고 사춘기를 시작하는 소녀도 있다. 이후 여자의 인생은 줄곧 자신의 신체가 남성의 시선에 의해 가격 매겨지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각 '당하는' 경험이 된다. 한 섭식 장애 여성은 30대에 접어들어 자신의 신체가 남성에게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느낀 이후 비로소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살도 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연령'과 '체중'은 '여성'으로부터 내려오기 위한 전략이 된 것이다.
  자기 아이덴티티로서의 '못 생긴 여자'는 객관적인 범주가 아니다. '못 생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인이 그러한 범주화를 통해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내려옴 혹은 끌어 내려짐을 느끼는 것이 포인트다.
  하야시 마리코의 소설에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들, 즉 남성에게 가치 있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작가는 '여성'을 무기로 한 그녀들의 비열함과 보잘 것 없음을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남자는 여자만큼이나 하찮게 그려진다....그러나 남자가 원했던 것은 그녀의 젊음과 육체에 불과했으며 그런 사랑에는 어떠한 깊이도 없었다. 앗코를 기다리던 것은 결국 성공한 it벤처 기업 사장의 첩으로 들어간다는 흔하디흔한 '윤락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선의 배후에는 '자학'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비평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로 의심해보지만 여주인공의 파멸을 가차 없는 필치로 그리는 걸 보고 있으면 작가 자신이 '예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특권적 '외부'시선을 통해 악의적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자기 비평이라면 으레 뒤따르게 마련인 '쓴 맛'이 희박한 것도 더욱 그런 생각을 부추긴다. 여성 작가의 경우 남성 작가가 품고 있는 여성 판타지가 부재한 탓에 여성 혐오가 더욱 철저해지고는 한다.
  못 생긴 여자라는 사실, 인기가 없다는 사실, 여성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은 관찰자에게 절대적 안전지대를 제공한다. 비웃음 당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다. 여성 혐오는 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 그녀가 그리는 이야기 속에서 여자는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고 남자는 여자가 이용하는 도구이며 여자들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여자에 대한 불신감이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야시가 그려낼 수 있는 이유는 하야시의 여성 혐오가 '자기 이외의 여자'에게 향해져 있기 때문이다.    
  예외의 위치에 서는 것에 의해 그녀는 여성 혐오를 낳는 가부장제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따라서 하야시의 작품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된다.

 

 

 

  현재의 황태자가 마사코 씨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한 말이라고 전해지는 대사가 있다. "평생 모든 힘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이 대사에 당시 얼마나 많은 일본 여자들이 전율을 느꼈을까. 만약 당신이 이 대사에 '전율'을 느낀 여성 중 한 명이라면 당신 역시 '권력의 에로스화'를 신체화한 여성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지키다'라는 것은 울타리 안에 가두어 평생 지배하겠다는 의미이다. 그 '울타리'가 온실이든 감옥이든 매한가지이다. 마사코 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 대사의 의미대로 '포로'가 된 그녀의 현실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지킨다'고 말할 때, '지켜야 할' 외적이란 종종 자신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남성을 가리킨다. '소유'를 다른 말로 표현했을 뿐인 '지킴'이라는 말이 '사랑'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 '권력의 에로스화'이다. 야유하는 것이 아닏. 청년 황태자가 이 말을 성실한 사랑의 표현으로 사용했다는 것에는 거짓이 없을 테지만, 남성의 사랑이 소유와 지배의 형식밖에 취할 수 없음을 이 개념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여성의 사랑이 종속이나 피소유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평생 당신을 따르겠어요.' '죽을 때까지 나를 놓지 말아줘' 같은 표현이 그 상징적인 예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바지런하게 일상 신변 뒤지차꺼리를 한다' 라는 대단히 근대 가족적인 돌봄 역할의 형식 말고는 표현할 회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좋아하게 되자마자 하숙방에 찾아가 밀린 청소나 빨래를 하거나 도시락을 만들어오는 여자의 행동은 주부가 하층 중산 계급의 무상 가사 노동자로 전락한 이후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자제라면 여자가 도시락을 만들어오는 순간 '하녀로서는 적합하지만 아내로서는 적합히자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로스같이 불가시적이고 부정형적인 것의 문화적 표현 회로는 역사적 맥락에 의존한다. '권력의 에로스화'라고 하는 개념은 일견 무시무시한 것처럼 보이나. 상술한 것처럼 일상적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 오해란 ‘페미니스트는 여성 혐오자다’라는 설이다. 이에 관해서는 ‘그래, 맞아요’라고 긍정하면 된다. 부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첫번째 이유는 여성 혐오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여성 혐오를 신체화하지 않은 여성은 없기 때문이며, 두번째 이유는 페미니스트란 스스로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려 하는 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 만약 자기 자신은 여성 혐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만 주위의 사회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회 변혁을 위해 싸운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자기 해방의 사상’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도구로 머물게 될 것이다


 

 

남성학은 젠더의 속박 속에서 남성 역시 고통받아왔다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후자, 즉 남자가 '충분히 남성이지 않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고통이 아닐까. 성적 약자, 비인기남, 프리터, 히키코모리 등의 '남성 문제'는 호모소셜한 남성 집단의 규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규격에서 벗어난 남자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느낌 속에서 점점 고독해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호모소셜한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남성이 되지 못한 남자'에게 연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에게도 같은 식으로 '규격'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공포와 고통이 있다. 다이어트 소망, 불임 치료, 노처녀 공포....그러나 그녀들이 다행히도 그 공포를 극복하여 '규격'에 달했을 때, 이번엔 자신이 여성 혐오의 틀 안으로 꼭 들어맞게 된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규격 외 여자'들이 자기 혐오와 격투를 벌이며 연대하기 시작한 것이 페미니즘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자기 혐오의 보편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의 자기 혐오란 타자화한 신체가 되돌려주는 응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남성이 여성 혐오를 넘어설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신체의 타자화를 그만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체 및 신체성의 지배자로서의 정신=주체됨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성과 연결되는 성, 임신, 출산, 육아를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만약 모리오카처럼 남자들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신체를 포함한 자기 자신과 화해해야만 할 것이다. ...남성으로 태어난 이에게 그것은 '남성이지 않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싸워 이겨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페미니즘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이지 개개의 '남성 존재'가 아니다. 만약 '남성'으로 분류되어 있는 자들이,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정당한 바람이다-여자들이 여성 혐오와 싸워왔듯이 남자들도 자신의 여성 혐오와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