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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 5. 잃어버린 고향. 유자

DidISay 2012. 7. 4. 13:35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계속 아파트라는 성냥갑 집에서 살아왔지만,
나에겐 한옥과 관련된 각별한 추억들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전라도 어느 마을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친가 덕분이다.

너무 먼 탓에 자주 찾지는 못했지만 방학 때마다 난 친가에서 한참동안 머물곤 했다.
특별히 재미난 것이 있는 고장도 아니었고,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먹거리가 풍부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곳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기자기하고 작았던 동네 국민학교와 동그랗고 완만한 능선의 뒷산들
워낙 작은 고장의 토박이였던 친가탓에, 어느 골목의 구멍가게에 가도
'동백꽃집 손녀 맞지라우? 아따 참말로 지 아베랑 어쩜 이리 꼭 닮았능교' 라고

사탕 하나 더 쥐어주시던 할머니들.

친가는 그 옛날부터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독립된 사랑채가 따로 있는 커다란 ㅁ자 한옥이었다.
동백꽃집이라고 불리던 명성 답게, 집 주변을 사철 붉은 동백꽃으로 가득 채운 집. 말갛고 정갈한 곳.
까맣고 반들거리는 돌담과 날아갈듯 휘어진 외씨버선을 닮은 기와의 어울림이 
옛스럽고 정다운 느낌을 줘서 어린 마음에도 그 공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고등어는 먹지 않고 밭의 거름으로만 사용했었다는 화려한 시절도 있었더랬지만,
내가 태어났을 즈음엔 그 영광의 세월들도 모두 사그라들어
쌀가마니로 가득 찼던 곳간도 쉴새 없이 물을 퍼날랐던 우물들도 모두 빈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옥 특유의 느긋하고 넉넉한 평화로움이 집안 곳곳에서 느껴졌다.

창호지 사이로 들어오던 뭉클한 달빛과
겹처마와 대들보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넉넉함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감싸줄 것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이 커다랗고 넉넉한 주거공간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은
ㅁ자형 지붕 사이로 쏟아지는 네모난 햇살과 후원이었다.

아파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널직하고 반듯한 마당 위로 쏟아지는 햇빛은 참  곱고 눈부셨다.
수박이며 참외를 실컷 먹고 등에 시원하게 와닿는 마루에 누워 있으면
언제나 빳빳하게 물들인 모시옷을 고수하셨던 할머니가 저 멀리 아궁이가 있는 부엌에서는,
구성진 사투리 억양으로 끝없이 느릿느릿 이어지는 남도민요를 부르시곤 했다.

육자배기 민요자락에 스스륵 잠이 오기 시작하면, 
내려앉는 눈꺼풀 사이로 햇빛이 노랑색, 붉은색 프리즘으로 어렴풋이 비쳐보여 마음이 편안해졌다.

 

햇빛이 나른함이라면 후원은 넉넉함이었다.
후원에는 유자나무며 무화과, 감나무들로 가득했는데
할아버지가 소일거리로 가꾸시는 난들도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있어 소담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남도지방의 돌담은 서울의 그것과는 달랐는데, 점토 속에 돌을 끼워넣은 황토색 돌담과는 다르게
말 그대로 새까맣고 윤기나는 둥근 돌들을 어쩜 그렇게 촘촘하게 쌓았는지
혹시나 무너질까봐 어린 마음에 두근두근 하곤 했었다.

후원에서 가장 기억 나는 과일은 바로 유자이다.
후원 뒤편을 가득 매웠던 유자나무는 끝도 없이 넉넉한 과실을 맺었다.


처음 유자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귤이나 오렌지로 착각하고
새큰하고 달달한 속살을 기대하며 그 굵은 껍질을 억지로 깠지만
그 역경의 시간을 거쳐 나에게 돌아온건 씁쓸하고 단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과육이었다.

혹시 덜익었나 싶어 몇개를 연거푸 까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고,
결국 난 할머니에게 발각되어 불호령이 내려질 때까지 실망감을 맛보며 끝없이 껍질을 까고 있었다. 

 

유자는 그 뒤로 할머니집에서 우리집으로 종종 건너와 차나 정과로 만들어지곤 했는데,
할머니집 마루에서 먹는 유자정과는 꿀맛이었다.
유자를 얇고 동그랗게 썰어 꿀에 조려 만든 그 간식은
생강절편과 함께 먹으면 달달하고 쫀득해 행복하고도 건강한 맛을 보여줬다. 

 

여름의 음식이 유자정과라면 겨울엔 유자차를 주로 마셨는데,
어릴 적 나에게 유자차는 감기의 친구였다.


편도선염을 자주 앓던 나는 감기만 걸리면 엄마가 듬뿍 타주신 유자차를 마셔야했는데,
단 것을 예나 지금이나 그리 즐기지 않았던 나에게, 갑자기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가 녹아내릴 듯한 달달한 맛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할머니가 막내 손녀 준다며 직접 씻어 만들어 보내주시던 유자청. 
할머니의 사랑은 그렇게 진하고 구성진 육자배기 민요요. 나를 녹여내는 유자청이었다.

유자를 생각할 때면 넓지 않은 중정에 햇살이 한 가득이고,
작은 덧마루에서 노곤하게 흘러나오던 티비소리를 듣던 기억이 함께 떠오른다.

항상 까치밥으로 한두개씩 달려있던 감의 붉은 흔적.
세월 지난 소설들과 레코드판으로 가득차 있던 한 구석의 책장.
모기향 날리는 저녁이면 마을어른들 모여 부르시던 구성진 노래보따리와 옛이야기들.
함박눈이 내리는 신작로의 풍경과 시골집 굴뚝에서 매캐하게 타오르는 청솔 연기 냄새.
이런 고즈넉한 풍경은 이제는 할머니댁을 찾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산업화 과정에도 용케 살아남아 어린 나에게 넉넉한 한 켠을 내어주던 마을.
그 때 나를 귀애하시던 고장의 어른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항상 꼿꼿한 자세로 장기를 두시던 할아버지도 이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으신다.

나의 고향이 아닌 부모님의 고향이었지만, 나에게도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던 이 곳.
변해버린 이 마을을 보고 있으면, 아직은 그 자리를 지키며 남아있는 한옥의 모습이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