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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손철주, 이주은

DidISay 2012. 7. 5. 00:07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칼럼을 주로 써온 손철주씨와
서양미술사 전공자인 이주은씨의 그림이야기.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꽤 되었는데, 그림 관련 글들은 사실 꽤 식상해지기도 했고
그냥저냥 별로 끌리질 않아서 구매하지 않고 있다가
도서박람회에서 세일 중이길래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손철주씨는 주로 동양화를, 이주은씨는 서양화를 통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화답하는 편지의 형태로 이루어져 다소 독특한 느낌이다.

보통 한명의 저자가 그림에 대해 쓸 경우 읽다 보면 다소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은
지리함이 느껴지는데 저자가 두명이고 주제를 정해놓고 주고받는 형식이라 그런 감이 좀 덜했다.
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그림과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했고.

낯익은 그림들도 꽤 보였지만,
처음 보는 좋은 그림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즐거웠던 독서시간.

 

유려한 필체가 엿보이는 그림책이다.

 

덧) 사실 내가 좋아하는 표지는, 저 삽화가 들어간 겉표지가 아닌
      그저 흰 색에 제목만 세로쓰기 되어있는 단촐한 속표지.

 

 

 


조영석, 이 잡는 노승, 종이에 수묵담채, 18세기

 

자비로운 마음

 

 

  18세기 선비화가인 관아재 조영석이 그렸는데, 언뜻 익살맞은 광경처럼 여겨지지요. 등장인물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요. 나무 밑동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노인, 하는 짓이 어째 수상합니다. 길고 헐거운 옷차림에 짧은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이 신분을 말해주는데, 머리를 박박 밀지 않아서 그렇지 스님이 틀림없죠. 왼손으로 장삼 윗도리를 잡아 맨살이 보이고 오른손으론 옷 안쪽에 붙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시늉인데, 뭘 하자는 심산일까요.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뻗은 손가락질에서 짐작이 갑니다. 스님은 이를 잡고 있어요. 그림 제목이 ‘이 잡는 노승’인데, 사실은 잡는 게 아니라 털어냅니다. 엄지로 잡으면 힘에 눌려 이가 죽을 수 있으니 살살 비질할 요량입니다. 생긴 모습이 우락부락해도 해로운 미물에게조차 자비를 베푸는 너그러운 스님이지요.

 

  이 절묘한 장면을 포착해낸 조영석은 늘 다리품을 팔면서 현장 스케치하기를 즐긴 화가였지요. 그는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이 그림도 자신이 육안으로 확인한 장면일 거예요. 스님의 코믹한 표정에 실감이 넘칩니다. 안타깝게도 그림 속의 스님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네요. 그나마 다행은 이 그림 옆에 조영석이 따로 써서 붙인 글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울창한 나무 아래에서 하얀 승복을 풀어헤치고 이를 골라내는 것은 선(禪)의 삼매에 들어가 염주를 굴리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화가는 이를 살리는 행위와 염불하는 마음이 마찬가지라고 여겼지요. 따져보면 알 일입니다. 이는 해충이긴 하지만 생물입니다. 살아있는 목숨붙이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서 어찌 부처의 길을 걷는다 하겠습니까. 살생을 멀리하고 상생에 마음 돌리는 자비심이 해학적인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참으로 곱살스러운 우리네 풍속화입니다.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긍긍하는 모성, 우리네 어머니들은 곁을 스치기만 해도 눈물겹습니다. 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애(仁愛)는 다함이 없지요. ‘석안유심(釋眼儒心)’이라, 석가의 눈과 공자의 마음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의 사랑도 가장자리가 없다지요. 정 없는 세상은 살아갈 도리가 막막합니다. 그 끝 간 데 모를 너그러움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이 사회 구석구석에 미친다면 그야말로 현세가 낙원이겠지요. 모쪼록 베풀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이 선생, 조락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의지가지를 잃은 낙엽이 거름 된다지요. 우리의 엽신들이 무슨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더불어 지나온 이 봄과 여름 한철은 벅차게 새기렵니다. 다시 만나도 여전하시길 빕니다.

 

-본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