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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이치도-성석제

DidISay 2012. 7. 5. 02:20

 

 

풍성한 말꾸러미가 돋보이는 소설.
성석제 특유의 언어유희에서 오는 골계미와 만연체문장이 돋보인다.

촘촘한 내용과 전개를 미덕으로 갖춘 소설은 아니지만,
한바탕 언어의 나라에 몸을 듬뿍 나오고 온 느낌이다.

유쾌하게. 할머니에게 옛이야기 듣듯이 술술 읽힌다.
이분의 소설을 여러편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의 어딘가가 자꾸 겹치지는 느낌이 들어 묘하다.
도둑의 도를 말할 때는, 거지의 예를 말했던 모 글이 생각나서 재밌기도 하고.

가장 좋은건, 역시 성석제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 혹은 그의 에세이.

 

 

"야, 이 도둑놈아!"

누가 뒤에서 그렇게 부른다면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은 돌아볼 세상이건만 한 사람만은 묵묵히 자기 길을 갈 것이니 그의 이름은 바로 이치도이다. 제대로 도둑질도 못 하는 도둑놈들이나 남들이 소리치고 떠드는 소리에 신경을 쓴다. 진짜 도둑이 무서워하는 건 뒤에서 소리나 버럭 버럭 지르는 사람이 아니다. 한창 신나게 도둑질을 하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다가와 바로 귓전에 따뜻한 입김을 내뿜으며 "바쁘니?"하고 속삭이는 사람이다.

 

....대가는 남들도 다 하는 평범한 기술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연마한다. 가장 기본적인 동작을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하는 가운데 스타가 탄생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건 쉽지만 소도둑이 바늘도둑이 되기는 어렵다. 바늘도둑으로 시작한 소도둑이 다시 바늘도둑이 될 수 있으면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소든 바늘이든 "어라, 이게 언제 내 손에 들어왔지?"하고 탄식하는 무념의 경지, 왼손이 훔치는 걸 오른손이 모르는 무상의 차원이 진정한 도둑이 지향하는 바다. 이치도는 도둑질 중에서도 가장 평범하고 기초적인 단순 절도를 자신의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하긴 도둑놈이 묵묵히 훔치지 않고 시끄럽게 훔쳤다가는 진작에 잡히고 말겠지만, 성실하게 살았다.

 

....정통 도둑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경찰도, 감옥도 아니고 혼란이다.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 감옥은 감옥으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각대로 훔칠 수 있다. 감옥에 간다 해도 편하게 살 수 있다. 훔친 돈을 이리저리 뿌리면 바깥보다 편하다. 이치도는 직업상 주거부정이어서 투표를 한 적이 없지만 한다면 당연히 보수 우익, 여당을 찍을 셈이었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