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밥상머리 이야기 9. 그 날의 어설픈 파스타 본문

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 9. 그 날의 어설픈 파스타

DidISay 2012. 7. 9. 12:30

 

 

스탠딩 에그. 사랑에 빠져 본 적 있나요.


 


 

 

 

 

 

 

화이트데이와 발렌타인데이. 연말 크리스마스 한달전 정도의 기간은 이른바 소개팅 시즌이다.
수많은 남녀가 특별한 그날을 나와 함께 나눌 누군가를 고대하며,
약속을 잡고 고민와 설렘 가득한 문자를 주고 받는다.

'소개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은 바로 파스타이다.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나 스테이크처럼 거창한 이미지거나 부담스러운 가격대도 아니고,
호불호가 크게 나뉘지 않는 무난한 맛을 자랑하며,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서양 음식점들처럼 어느정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을 기대할 수 있기에
파스타는 소개팅의 음식이다.

지인 중 한명이 계속 되는 소개팅에 진절머리를 치며,
'이제 파스타도 지겹다'는 성토를 늘어놓았을만큼
파스타는 우리의 소개팅 문화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와 있다.

 

파스타가 보편화되지 않은 그 시절.
도대체 우리의 부모님들은 어떤 음식을 먹으며 만남을 가졌을지 궁금할 정도로,
우리는 소개팅을 잡으면 대개 맛있는 파스타집을 추천받고 그 이후 코스를 물색하며, 
처음 만난 누군가와 함께 그곳으로 향하곤 한다.

 

나 역시 연인과 만남을 가졌던 첫 자리는 보통 멋스러운 조명에 음악이 흐르는 파스타 전문점이었고,
보통 두번째, 세번째 약속도 비슷비슷한 이탈리안 혹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사실 내게, 파스타는 그렇게 고급스럽다거나 특별한 음식이라기 보다는,
해외에 나가있던 시절 그저 간편하게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라면처럼 만들어 먹던 음식.
냉장고 한 구석에 처치곤란으로 있던 해산물과 토마토를 한큐에 변신시킬 수 있었던 음식.
정형화된 소스와 면 덕분에, 어느정도 무난한 맛을 기대할 수 있는 음식.
만들기 간편하지만 누군가에게 근사한 식탁을 연출하며 생색낼 수 있는 고마운 음식이다. 


때문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연인과의 만남에서는 파스타보다는 정성들여 만든 한정식집을 더 선호했고,
파스타를 먹더라도 그 분위기에 끌려서라기 보다는,
새로운 맛의 어떤 것을 찾거나 음식 데코를 관찰하려고 이곳저곳을 탐방했던 것 같다.

 

 

며칠전 친구가 집에서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려다가
게임을 하는 바람에 다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어떤 날의 어설픈 파스타가 떠올랐다.

친구가 말한 '어설픈'은 자신의 요리 실력이었지만,
내가 떠올린 '어설픈'은 파스타를 먹는 포즈와 짝지어져 있다.

 

 


몇 번 안되는 소개팅 경험에도 갑자기 떠올린 그 사람은,
한국의 부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중심가 고급 아파트에
괜찮은 직업을 가진 명문대 출신의 남자였다.

보통은 고마워해야할 소개팅 자리였으나,  위에 나열한 단어만으로도 급격하게 피곤해지는 나는
어쩐지 거북스러운 느낌 때문에 사실 만나기 전부터 별로 호감인 상태는 아니었다.
엄마 치마폭과 사교육 열풍 속에서 정형화된 엘리트코스를 밟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에,
비슷한 유형의 아이들과 학부모가 떠올라 버리면서 강한 거부감마저 들었던 것이다.
 
나이와 이름만 딸랑 주며 잘 해보라며 웃었던 애꿎은 주선자를 원망했으나  
동시에 약속을 파기해서 주선자를 욕먹일 수도 없어
조금은 울며 겨자먹기로 나갔던 자리였다.

만나서도 외모가 딱히 내 스타일도 아니었기에,
그냥 데면데면한 상태로 이야기나 잘 하고 집에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그분의 안내로 예의 그 파스타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는데 어쩐지 반질한 이미지일거라 생각했던 그 남자는
여자를 거의 접할 수 없는 정통코스를 밟은 탓인지 달변가는 아니었고,
이런 말투에서 느껴지는 순박함이 좀 의외라고 느꼈었다.

난 이야기를 하면서 눈을 쳐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말투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적어도 눈을 피하거나 하진 않았고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말을 걸려는 자세가 느껴져서, 어쩐지 성실하고 진실된 느낌마저 주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나온 파스타!
그런데 이분은 메뉴를 시킬 때부터 그랬지만,
파스타를 먹는 폼이 어쩐지 처음 면요리를 먹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무나 너무나 어설픈 그 모습. 자꾸 포크에서 이탈하는 면들.

그래서 '드시는 게 불편하신가봐요?' 라고 물어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 중이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남자들끼리는 이런 곳에서 거의 식사를 안해서요. 제가 좀 어설프죠'라며
멋쩍게 말을 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 말 때문에, 카페에서 긴 커피 이름에 달달 떨었던 새내기 시절 남자 동기들의 모습부터,
소개팅에서 너무 긴장한데다가, 샐러드바를 처음 가본 탓에 
망고스틴을 껍질 째 씹어서 상대방을 경악하게 했다는 친구의 오빠까지
그 수많은 어설픈 남중남고 출신의 남자들이 떠올라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잘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털어놓고,
경청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그 모습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어설픔'에 해당했다. 


매끈하고 서글서글한 이미지는 어쩐지 경계하게 되고,
조금은 느릿하고 투박하지만 호밀빵처럼 재료 그대로의 맛을 보여주는 솔직함에 무장해제가 되는 나는
어쩌면 촌스러워보일 수 있는 그 모습에 호감이 갔었다.

그리고 이 솔직한 모습은 만남 전에 '그냥 내 할 도리나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애프터를 수락하고 몇차례 더 만남을 갖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온갖 소스와 향신료로 칠갑을 해버린 파스타는 결코 본연의 맛을 살려내질 못한다.
오일만으로 깔끔하게 살려낸 파스타.
단촐한 재료로 기본을 살린 파스타가 오히려 더 고급스러운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도 요리와 같아서,  내면의 중심 없이 그럴듯 해보이기 위한 허세와 허풍만 떠는 사람들은 그 밑천을 쉽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 수명이 길지 않고, 고급스러운 맛을 내기 보다는 쉬 질려버리는 싸구려 MSG 같다.

사람과의 만남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에서도 이 공식은 변하지 않아서,
'보잘것 없는 인간성을 온갖 스펙과 물질로 치장하려 할 때'
'비열하고 못되먹은 행동을 쿨한 척 덮으려고'하는 순간 비극은 발생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주머니가 비어있는 사람이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아는 척, 머리와 마음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뭔가 있는 척 그럴싸하게 꾸며내는 것이 촌스러운 행동이다.
알몸으로 남겨졌을 때 보이는 것은 추악한 인성만 남는 인간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약자를 극한으로 내몰 수 있는 세상은 지상에 펼쳐진 지옥이다.


적어도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아이를 키워내는 세상은
말갛게 빛나는 오일파스타 같은 사람들이 좀더 많은.
슴슴한 호밀빵 같은 세상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