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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 10. 힘내! 바나나 우유

DidISay 2012. 7. 11. 02:52

 

 

 

바나나 우유 하면 생각나는 빙그레의 둥근 용기.

손 안에 흐뭇하게 들어와 그립감마저 좋았던 이 제품은,
언젠가부터 '바나나맛 우유'라는 입에 딱 달라붙지 않는 이름으로 둔갑해 나를 슬프게 한다.

 

난 우유를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닌지라, 
국민학교 시절  강제적으로 먹어야 했던 우유는 거의 동네 강아지들에게 줘버려
동네 개들이 나만 보면 반갑다고 졸졸 따라왔었고
그나마 좋아했던 초코우유도 매일 먹는 건 역시 무리였다.

 

하지만 엄마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밀어주는 목욕재계의 시간이 끝난 뒤,
목욕탕 한 구석의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바나나 우유는 시원하고 달달한 기쁨이었다.

덕분에 항상 우유가 아닌 두유를 외치는 나이지만,
가끔은 저 빙그레 바나나 우유를 찾곤 한다.

 

 

 

 

바나나우유 하니 생각나는 기억 한 토막은, 어느 겨울 대학교 원서 접수를 할 무렵이었다.
서류를 빼먹고 제출하는 바람에 급하게 대학교에 가야했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2시간 반이 넘던 거리에 있었던 그 학교를 함께 가게 된 나는 사실 꽤 난처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난 이미 여름방학 전에 대학교 합격통지를 받아놓은 상태였었고,
당시 친구는 평소에 본인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은 대학에 원서를 써야했기 때문이다.

 

함께 가자는 친구의 부탁도 있었고, 그녀의 속상한 마음을 위로해줄 겸 동행했던 것이지만,
동시에 내 마음은 좀 불안하고 어쩐지 미안함이 뒤섞인 상태였다.

 

그래도 애써 농담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가는 길은 그래도 밝은 분위기에서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그 대학교는 아주 작은 데다가 그나마 있는 공간도 모두 공사 중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졸업한 중고등학교에 있었던 넓다란 잔디밭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도 너무 초라해보였고 건물들도 몇 개 되지 않아,
학교를 둘러보다 보니 겨울이라 스사한 느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게다가 겨울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던 그 날의 캠퍼스는 어찌나 그리 우울하던지...

 

 

 

그리고 친구가 원서를 제출하고 나올 때까지 우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친구는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고, 나 역시 뭐라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는 난처함 때문에
섯불리 입을 뗄 수 없어 그저 친구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학교를 나온 뒤 친구의 속이 어쩐지 허할 것 같아,
떡볶이와 저 바나나 우유를 사서 먹고 있었는데
떡볶이를 다 먹었을 무렵 친구가 갑자기 학교 건너편에 있던 공원에 잠깐 가자는 것이다.

이 추운 날에 무슨 공원이야 싶었지만, 
친구 심정을 생각하면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묵묵히 함께 걸어들어갔다.

 

그 공원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그 앞에는 벤치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친구는 그 벤치에 앉더니 가만히 호수만 바라보고 한참 동안 있었다.

난 그저 친구 손을 잡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순간 친구가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 너무나 서럽게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어떤 말을 했어야 할까.
그저 어깨를 토닥토닥 해 줄  뿐.. 어떤 것을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30여분을 울고 난 뒤에, 코와 귀가 빨갛게 된 친구에게
저 둥근 바나나 우유를 건내며 서로 말 없이 빨대로
달달하고 노란 액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계속된 침묵. 고요함. 가랑비 소리만 들리는 적막함.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우유를 거의 다 마신 친구가
삐익삑- 쉭쉭- 하고 좀더 마시고 싶어하는 애처로운 소리를 빨대로 내기 시작했는데
그게 왜 그 순간 그리 웃기던지 동시에 웃음이 터져서 한참이나 싱겁게 웃어댔다.

원하는 결과에 이르지 못했다는 실망감과 자책감과
내가 가지고 있던 왠지 모를 죄스러움이나 미안함도
모두 저 둥근 통에 모난 구석 없이 녹여낼 수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저 대학이 아닌 좀더 좋은 대학으로 진학했고,
그날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늪에 가까웠던 연못가에 한참동안 있느라,  
말도 못하고 그 겨울 모기에게 온통 종아리를 뜯겨
난생 처음 피부과에 가게 만들었던 그날의 그 시간들도
바나나우유의 이름처럼 모두 나름대로의 애잔한 기억으로 남았다.

 

 

 

저 사건 이후로 내게 바나나 우유는 힘내라는 표시다.
여행에서 지친 뒤에 가장 먼저 찾는 것도 저 바나나 우유이고,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뒤에 편의점에서 꺼내는 것도 바나나 우유이다.
어쩐지 힘내고 싶은 날이 있을 때 으쌰 하면서 찾게 되는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 힘을 주고 싶을 때도 생각나는 바나나 우유.


혹자가 비웃듯이 바나나가 아닌 바나나맛일지라도,
그 날 추억 속의 그 우유만큼은 무언가를 흉내낸 가짜가 아니라, 진짜배기 위로였다.


나의 친구도 힘든 날이면
둥글고 부드러운 저 노란색 우유를 보면서,
그때의 추억을 떠올려 힘을 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