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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나의 명원화실-이수지

DidISay 2012. 9. 1. 03:53

 

 

 

 

학교 다닐 때 거의 달마다 돌아오는  행사는 글짓기나 독후감 쓰기 같은 각종 '작문'대회였다.

 

매달의 각종 ~의 날' 혹은 '~의 달'은 글을 쓰는 하나의 의례적인 행사였고,

학년이 거듭될수록 매번 반복되는 주제 덕분에

'과학의 달'의 글짓기나 호국보훈의 달의 '통일'처럼

특정 주제의 글을 쓸 때 갖춰야하는 구성이나 내용 역시 점점 늘어만 갔다.

나중엔 주제만 듣고도 몇 개의 레퍼토리가 기승전결로 쫙쫙 연상될 지경.

 

초등학교 때는 얼떨결에 상을 받은 것에 재미를 느껴서

중학교 때는 내신점수를 위해서, 고등학교 때는 입시에 도움이 되라고.

그렇게 시작한 내 작문대회 인생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교내, 시도단위의 대회들, 대학교에서 개최한 온갖 행사들..

 

일정한 주제를 정해서 써야하는 백일장 외에, 각종 독서경시대회도 여기에 추가되었다.

처음에는 어린이나 청소년용 도서를 넘어 그럴듯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즐거웠지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정해놓은 글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는건 항상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그것이 글을 쓰기 위해 억지로. 급하게. 읽는 것이라면 더더욱.

소화를 시키거나 꼭꼭 씹어서 내 삶 속으로 녹아들 시간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상을 타기 위한 글'을 반복해서 써나가고, 내 책상 서랍 한귀퉁이에 각종 상장이 쌓여갈수록

늘어가는 것은 상을 탈만한 글솜씨와 고급스러운 어휘, 그리고 모범적인 내용들이었고

정작 그런 글을 쓸 때 난 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나에게 그저 너무나 사변적이고 멀게만 느껴졌던 최인훈의  '광장'은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의 새 장을 열어준 훌륭한 작품으로 탈바꿈되어 기술되었고

별 감동이나 놀라움을 느끼지 못한 책들도 항상 대단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로 포장되어

원고지의 칸들을 채우곤 했었다.

 

그리고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상장과 함께 내 머리 속에서 빠르게 잊혀져갔다.

 

그때 지리하게 읽었던 작품들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새로운 울림으로.

아주 천천히 나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때는 왜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까란 의문과 함께.

 

 

 

 

내가 정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내 개인적인 독서노트와 일기장 위에서의 글쓰기였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대회의 입상이나 입시를 위해 준비한 곡보다는

취미와 스트레스 해소 겸 쳤던 곡들을 더 사랑했던 것처럼

'목적'을 위한 글쓰기는 나에게 언제나 '수단'이었을 뿐이지 '즐거움'은 아니었던 것이다.

 

애초에 난 거창하고 논리정연한 깔끔하고 똑떨어지는 글들에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좀더 소소하고 신변잡기적인 생활감정을 잡아내는 글들에 더 애착이 갔는데

때문에 내 기억 속에 오래 자리한 글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큰 대회에서 입상한 어떤 원고지 속의 글자가 아닌

아주 일상적이었던 어느 날의 일기이다.

비록 나에게 상을 가져다 주진 않았지만, 솔직한 감정이 그대로 실린 그런 글.

 

 

 

 

 

 

'나의 명원화실'은 '동물원'이라는 작품으로 접했었던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이다.

(막상 이 작품에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 그림보다는 그 내용이었지만 ^^:

'동물원'은 참 아름다운 삽화들을 자랑하니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아이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그림책이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도 애정어린 눈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이유는

오히려 더 담백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내가 이 그림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위와 같은 시작 부분의 글 때문이었다.

나 역시 어떤 것이 '뽑히는 글'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늘도 내 그림이 맨 처음으로 뽑혔습니다.

미술 시간 끝날 무렵엔 언제나 선생님이 교실 뒤 벽에 걸릴 그림들을 뽑는데, 내 그림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지요.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이 내 뺨에 닿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요.

 

나는 어떤 그림이 '뽑히는 그림'인지 잘 알고 있거든요.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언제나 '뽑히는 그림'을 그리는 한 어린 소녀이다.

당연히 운명처럼 나는 화가가 되야지라고 생각하던 아이는,

어느날 진짜 화가가 있는 '명원화실'에 다니게 된다.

 

그런데 이 진짜 화가는  내가 학교에서 그린 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도 딱히 칭찬해주지 않고,

그저  연필로 바가지와 수도꼭지, 포도송이 등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비판이나 칭찬 없이 그저 묵묵히 지켜봐주는 것만 반복한다.

 

그렇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아이는 학교에서 그리는 것과 화실에서 그리는 그림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주인공처럼 이중창작을 계속해 나간다

 

 

 

세상을 뚫어지도록 열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나요.

그렇게 열심히 살펴본 것이 내 마음속에 옮겨지면, 그걸 조금씩 조금씩 그려 나가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바가지 안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는 알쏭달쏭한 말도 했습니다.

 

 

 

 

 

 

겨울이 지날 때까지 그림을 그리느라 방에서 꼼짝 앉는 화가를 관찰하고,

테레빈유 냄새가 나는 그의 작업실에서 두꺼운 화집을 구경하며

'가을운동회'나 '공룡시대'처럼 정해진 주제가 아니라

그저 연못이나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을 그리는 과정에서

아이는 '목이 따끔따끔한 것 같고, 가슴이 막 아프고, 가운데 배가 저릿저릿한' 느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가장 먼저 뽑히는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라

아주 가끔씩만 벽에 걸리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만 더 이상 아이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쓸쓸해지면, 혼자 앞산자락 연못가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다 오곤 했을 뿐. 

 

 

 

나는 이따금 내 방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둔 아름다운 점박이 생일 카드를 들여다봅니다.

여전히 그 작은 그림을 볼 때마다 목이 따끔따끔 합니다.

 

내 그림도 누군가에게 이런 따끔따끔한 느낌을 줄 수 있을까요?

 

 

 

 

 

 

나의 글들은 따끔따끔함이 아닌, 내가 글자를 적어나갈 때 느끼는

서서히 스며드는 따뜻함을 주길 원한다.

 

내 글은 누군가에게 이런 따스한 느낌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