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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미셸 슈나이더

DidISay 2012. 9. 2. 06:08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한번쯤 스치듯 들어봤을 것이다.

절대음감을 타고난 천재이면서도 한평생 대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사람. 

 

이 책은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데,

이 사람 정말 글렌 굴드 빠구나 싶은 것이

이 얇은 책에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촘촘하게 스캔한듯한 엄청난 자료와

개인적인 생각과 메모들이 뺴곡하게 담겨서 재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좋은 한편으로는, 글쓴이가 생각한 방향으로

글렌 굴드를 편집하고 배치해낸 것은 아닌지 라는 의문도 살짝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좋은 문장들이 많아서 만족했다.

 

 

 

글을 읽다 보면 그는 연주자나 예술가라기 보다는, 

피아노를 대상으로 한 수도자나 고독한 나그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글렌 굴드 본인도 자신이 피아니스트에 머물기 보다는

라디오 진행자, 작가 등 다른 모습으로 서기를 바랐던 것 같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 음악적 접근을 원했던 사람.

 

실제로 32세 정상의 자리에 섰을 때 홀연히 은퇴해버린 그는

콘서트에서 직접 관객과 마주하는 것보다,

녹음이라는 매체를 사이에 두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더 즐겼다.

 

일평생 동성이든 이성이든 애정관계를 찾아볼 수 없었던 삶.

그가 좋아한 회색처럼, 언제나 미묘한 경계사이에 위치했던.

고독하고. 순례자와 같은 삶을 살아갔다.

 

 

 

 

내가 그의 이름을 접한건 그의 여러가지 독특한 연주와 관련된 행동이 먼저였는데

그는 연주하기 전 따뜻한 물에 반드시 손-팔꿈치를 20분 이상 담궈야 했고,

피아노와 신체를 가까이 접하게 위해 다리에 잭을 넣어 개조한,

본인만의 피아노 의자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고 했다.

 

관객을 거의 의식하지 않은 아주 편한 복장으로 콘서트에 서서 혹평을 듣기도 했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어간 연주로도 유명하다.

최근엔 이 흥얼거림을 살리려고 한다지만, 예전엔 녹음 시에 이를 지우느라 애를 먹었다고.

 

 

 

 

예전엔 그냥 스치듯 읽고 들었던 문장과 곡인데,

이 책을 다시 읽고 나니 어딘지 마음에 다가오는 부분이 많았다.

책은 그대로인데 아마 내가 변한 것이겠지.

 

평전인데도 마치 소설처럼 유려한 문장과 구성이 돋보인다.

읽는 내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 시대를 살아간 어느 피아니스트의 마음이 전해져서

아프기도, 고독해지기도 한 시간이었다.

 

북극을 좋아했던 글렌 굴드의 성향 덕에,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책장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물음은 다른 것, 즉 그가 정말로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었으며, 그러기 위해 길을 잃고 해체된 다음 재형성 되고 다시 분산되어야 했다. 손가락을 활짝 열고 손바닥을 천장으로 향하게 한 채 보내던 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여전히 건반으로 다가가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건반을 건드리지는 않은 채, 기다림이라기 보다는 정의 내리고 집중하려는 노력, 조만간 음악과 그 사이에 아무도 끼어들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손 밑에는 감지되지 않는 추상적인 조직만이 남을 것이었다. 일어나는 것, 떠도는 것, 낙하와 마찰, 불러도 오지 않는 것, 와서는 꺼져 버리고 마는 것, 지속되는 것

 

 

...이 고립이 그에겐 절개도 절단도 의미하지 않았다. 이 고립에서 그가 원한 건, 사라지기 전 그에게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환영처럼 다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말을 하는 이들의 동아리에서 절연되어 나왔을 때 한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 천사가 지나가는 하얀 길.

  그는 끊임 없이 자신의 고독의 영토의 경계를 그었다. 늘 역광을 받으며, 어둠을 거슬러 나아갔다. 누군가 우리를 맞이하는 문턱이 있음을 알지 못했으며, 시간의 촘촘한 직조 속에서 깊이 패인 애정을 거부했다.

 

 

...그는 무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했으며, 실제로는 자신만을 위해 연주한다고 믿었다. 한편 녹음, '간접적인 것'에 대한 선호는 다양한 경향들에 의해 규명된다. 즉 자신과 타인을 이어 줄 매체의 필요성, 일시적인 것에 대항하여 고뇌에 맞설 수 있는 기념비를 세우려는 의지, 위조(굴드는 자신의 음악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예외 없이 속임수를 썼다)에 대한 끌림 같은.

 

 

...굴드는 수도자가 추구하는 종교적 자세, 즉 가난, 순결, 복종으로 이루어진 포기의 삶과 완성의 길이라는 이상과 닿게 된다. 그가 음악을 접근한 방식은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접근한 방식과 동일한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굴드의 고독은 찢김이 아니고 스스로 아무는 상처였다. 풍요로운 은신처, 모아들이는 장소, 그는 묵상을 했던 것이다...사고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야 가능하다.감지될 수 있는 것에서 거리를 두고서야(굴드는 단지 대중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외관상 피아노에 더없이 가까이 있으면서, 동시에 피아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자 했다) 정신 활동이 실물 대신 자신의 대상을 구축한다.

 

 

 

...혼자 있다고 꼭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물론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벗삼고 있다. 반면 내가 혼자 있든 누가와 함께 있든 나 자신이 내게 결핍되어 있을 때, '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누구'가 다른 아닌 나 자신일 때, 이런 상태는 고립이다.(반대로 사랑은 상대방이 거기 있을 때조차 그가 그리운 상태를 말한다.) 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거기,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과 내가 모두 결핍되어 있는 단절도 있다.

사고한다는 것은 고독의 문제이다. 세상이 입을 좀 다물어야 할테니까. 그런데 고립이 사고의 작업에 치명타를 가한다. 굴드가 완전히 혼자여야 했던 순간은 그가 'Inn on the Park'의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푸가의 제 2주제 도입부를 어떻게 프레이징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연주를 듣고 몹시 만족한 팬들이 무대 뒤 휴게실로 몰려 들어올 떄였다. 악마를 두고 성녀 테레사가 '문 밖에서 짖어대는 개'라고 말했듯이, 그 역시 악마에 대항하기 위해 비슷한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임무를 꼼꼼히 완수해 내는, 그렇긴 해도 한쪽 눈은 먼 곳을 바라보며 그곳에 없는 것, 음악 속에 표현되지 않는 것을 꿈꾸고 있다.

 

 

 

...어떤 비율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낸 매 시간에 대해 x시간을 혼자 보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늘 직감적으로 느껴 왔다. 이 x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만큼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한 시간이다. (고독의 메타포인 라디오는 여러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 마음내키는 대로 틀거나 끌 수 있으니까. 우리가 원할 떄 자리에 없고, 없어도 좋을 때 곁에 와 있는 타인들과는 달리)

 

 

 

...그는 혹한 속에서 열기를 찾아냈으며, 허공에 기대고 있었고, 넘을 수 없는 거리 속에서 가까움을 갈망했다.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토론토에서 순회 공연 중이었떤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날 그를 방문했다. 굴드는 자신의 아파트에 함께 남아 있으려 하지 않았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러 갑시다"하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모피와 털로 안을 댄 외투, 목도리 속에 파묻힌 굴드는 얼굴과 손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굳게 닫힌 차 안에는 난방이 최고조로 틀어져 있었으며, 라디오가 악을 써댔다. 그들은 몇 시간 동안 도시 주위를 돌았다. 소음과 땀에 젖어 수 시간을 그렇게,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번스타인이 이런 일이 잦은지 물었다. 황홀경에 빠진 굴드는 '매일'이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숨막힐 정도의 열기를 찾으며 감기에 걸릴까봐 강박증적으로 두려워하면서도 북극과 북극의 추위를 열렬히 사랑하는 분명한 모순 앞에서 우리는 놀랄 수도 있다. 신체적으로 추워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차갑다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 차갑고자 하면서 추운 것은 싫어할 수도 있듯이.

 

 

... 그가 우리 각자에게 말한 것은 자신의 고독에 대해서였다. 또 테크놀로지 덕분에 그는 외부 세계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세상과 접촉을 갖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수많은 개인들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그의 부재는 보다 강렬한 현전이라 할 수 있다. 굴드는 청중을 원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그에게 올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할 줄 알았다. 

 

 

...음악은 분리시킨다. "음악의 동강들이 내 정신 속으로 뚫고 들어오면 나는 신기하게도 나 자신과의 접촉점을 잃고 대화로부터, 또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초연해진다"라고 그는 말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도 그를 음악으로부터 떼어 놓아서는 안되었다. 청중도, 악보도(굴드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악기도, 심지어 마지막 차폐물인 소리조차도...루진이 체스판 없이 체스를 두려고 했던 것처럼, 굴드는 피아노 없이 피아노를 연주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