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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그랑 블루(Le Grand Bleu, 1988)

DidISay 2012. 11. 22. 02:18

 

 

 

만약 뤽 베송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뽑으라면

레옹을 제치고 주저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 봐도 촌스러운 느낌이 없는 영화.

 

뤽 베송은 어릴적부터 바다와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고

돌고래 전문가가 되고 싶었지만, 다이빙 사고로 이 꿈이 좌절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푸르고 깊은 바다에 대한 로망만은 버리지 않았는지,

자신의 애정을 듬뿍 쏟아부어서 그랑 블루와 아틀란티스를 만들어냈다.

 

 

 

보통 바다나 돌고래 같은 소재는 추석용 가족영화 느낌이 풍기기 쉽고

무더운 여름에 생각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런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를 보는 내내 고독하고 서늘한 느낌을 더 많이 받게 되는데,

그래서 내가 이 작품이 생각나는 것은 언제나 추운 겨울이나 지독하게 건조한 가을날이다.

 

 

걱정마라.

내가 지쳐 쓰러지면 인어들이 도와줄거야.

 

주인공의 유년시절을 의미하는 흑백시절은

잠수부였던 아버지가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면서 끝나버린다.

 

어린시절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백미는

주인공 자크가 잠수를 하는 중에 펼쳐지는 바다 속 풍경인데,

흑백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음영이 지면서 더 서정적인 느낌이 난다.

푸른빛 없이도 햇빛에 의해 반짝이고 그늘지는 그 물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몇번을 보아도 감탄하게 된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잠수는 산소통과 복잡한 기구를 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해녀처럼 숨을 참고 들어가는 형태의 것이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고 신체의 움직임이 우아한 느낌이다. 자연인 그대로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잠수를 하면서 하는 것들.

샴페인 마시기나 돌고래와 소통하기, 곰치에게 먹이주기 등은

유쾌하고 해맑아서 주인공들을 마치 어린 소년처럼 천진하게 보이게 한다.

그래서 후반부에 나타나는 이들의 무리한 행동들 역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진다.

 

 

 

 

 

 

어른이 된 이후 인생은 여러가지 맛이라고 속삭이듯이

총천연색으로 영상이 바뀌어도, 전체적인 분위기나 음악은 외롭고 건조한 느낌을 준다.

빨강과 파랑으로 대비되는 잠수복은 매우 유쾌하고,

화면이 온통 물이 출렁이는 에메랄드빛임에도 시종일관 그렇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돌고래만을 가족으로 삼아온 자크는 무심하면서도 소극적이고,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도전하려는 엔조는 매우 남자답고 걸출하다.

 

 

 

 

당신이 바다에 대해 뭐 알아.

튜브나 끼고 놀라고.

 

바다는 내거야.

 

바다가 날 원하는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 있어.

그리고 오늘은 날 원해.

 

자크가 바다를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순수한 기쁨으로 잠수를 한다면,

엔조에게 바다는 일종의 도전하고 극복해야하는 공간이다.

그는 정정당당한 도전을 통해서, 자크를 넘어섰을 때 기쁨과 만족감을 느낀다.

 

죽음을 무릎쓰고 자크의 기록에 도전하려고 한 엔조는 결국 사망하게 되고,

자크는 아버지의 사고사를 그대로 떠올리게 한 친구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엔조의 죽음 후 괴로워하는 자크의 눈앞에서

천장이 온통 바다로 변해 쏟아져내리고, 그대로 푸른 물속을 부유하는 장면이다.

 

 

 

 

결국 그는 바다와 한 몸이 되기 위해 

깊은 물속으로 영원히 들어가게 된다.

엔조와 아버지가 머물러 있을 그 장소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바다와 잠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는 더 이상 바다로 올라올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온 조안나도,

그녀의 뱃속에 든 아이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잠수할 때 어떤 기분이 들어요?

 

추락하지 않고 미끄러져 떨어지는 느낌이야.

가장 힘든건 바다 맨 밑에 있을 때야.

 

왜죠?

 

왜냐하면 다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항상 그걸 찾는게 너무 어려워.

 

영화에는 인어를 위해 대신 죽을수도 있다는 마음이 생길 때

마침내 인어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다는 대사가 있다,

자크는 돌고래를 따라가, 마침내 인어를 만났을까.

 

 

 

 

 

 

 

덧)

 

1 보는 내내 고래 소리가 귀에 잔잔하게 퍼지는 것을 보고,

감독이 태고의 감수성을 참 잘 간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엔 '이 영화를 나의 딸 줄리엣에게 바친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한없이 깊고 짙은 저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딸이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할 수 있길 바랐던 것일까.

 

 

2. 줄리엣 베송은 뤽 베송 감독과 여배우 안느 빠릴로(니키타 주인공)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뤽 베송의 조감독 출신 로만 니콜라의 장편 데뷔작 <Par les epines>에서
벙어리 고아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