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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Silver Linings Playbook, 2012)

DidISay 2013. 2. 23. 10:38

우리는 누구나 삶의 한 순간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사춘기 때 질풍노도를 겪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 뒤늦게 그 감정이 찾아오듯,

마치 밀린 빚을 언젠가는 갚아야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련이 밀려오는 것이 삶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환절기엔 흔히 찾아오는 감기처럼, 마음과 정신이 아픈 것도

한동안 우울증에 빠지는 것도 팍팍한 삶 속에서 내가 힘들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징후일 뿐

'회복하지 못할 무엇'이라든가, '삶의 오점'이라고 보는 시각은 경계해야 한다.

 

우울증과 같은 감정은 그 사람 개개인의 나약함이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의 환경과 시기가 너무나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정신병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좀더 사려깊게 헤아릴 수 있고

나 자신의 아픔 역시 좀더 개방적으로 털어놓고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우울한 감정이 내 삶을 옭아매는 덫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고방식은 정말 올가미가 되어서 내 삶을 무너뜨리기 시작할 테니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이다.

로맨틱&코미디로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알콩달콩한 남녀의 사랑쌓기를 보여준다기 보다는

상처를 가진 인물들의 극복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아내가 자신의 목욕탕에서. 그것도 면전에서 결혼식 때 축가를 틀어놓고

바람피는 꼴을 봤는데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애정을 갈구하는 팻

아마 그는 그녀의 마음을 다시 얻으면 잃었던 직장, 집, 정신까지 돌아올 수 있을거라 믿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내의 불륜 때문에 모든 것을 무너뜨린 멘붕 상태에서 정신병원까지 다녀왔는데도,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아내와 조금이라도 끈을 이어보려고 노력한다.

사실 내면 속에 그는 아내가 좋지 않은 사람이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텐데도,

 

나 역시 이것과 비슷한 감정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괴로웠던 적이 있었기에 보는 내내 너무 공감이 갔다.

이성적으로는 나에게 이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쉽사리 놓아버릴 수 없는 감정.

 

 

 

 

그리고 그의 삶 속에 갑자기 뛰어든 티파니.

그녀는 권태로워진 부부 관계 회복을 노력하는 시도 중에서 남편이 죽어 미망인이 되었다.

때문에 그 죽음에 죄책감을 갖게 된 그녀는 자포자기로 자신을 놔버린다.

 

막가자는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모든 직장 동료와 자는 바람에 

마을과 직장에서는 무분별한 섹스를 일삼는 '창녀'로 찍혀버렸고,

자존감을 상실해서 남을 믿지도 자신을 내보이지도 못한다.

 

 

 

러브스토리보다 사이코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이 두사람이 만드는

관계-멘탈 회복 과정이 이 영화의 주된 줄기다.

 

여기서 두 사람을 이어주는건 주로 조깅-춤인데,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두가지 일은

규칙적인 생활-운동-대인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를 나누게 해서

두 사람이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우울증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감정폭발과 자괴감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감정을 일궈낸다.

 

티파니는 외로움에 휩쓸려서 감정 없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지 않게 되고,

팻을 돕는 과정에서 자신 역시 치유되어 간다.

 

팻 역시 아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었는지 깨닫고,

정작 아내와 마주쳤을 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알콩달콩 예쁘다기 보다는 주인공들의 돌직구를 날리는 대사가 아주 인상깊었고,

상처를 내밀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찌질하게 보인다기 보다는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티파니 역을 맡은 제니퍼 로렌스가 너무 예뻐서 눈이 즐겁다!! >_<

 

 

 

 

너무나 사랑하던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났을 때, 내 인생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을 때,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거야' 내지는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화처럼 그들은 영원히 오래오래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설사 백설공주와 왕자가 다시 헤어지게 되고 치고박고 지긋지긋하게 싸운다고 해도

삶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며 우리의 존재 역시 인생의 길 한가운데 있다.

 

 

삶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의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인생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하지만 아프더라도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들은 과감히 버린다면

과거와 똑같진 않더라도 작은 기쁨들은 다시 내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른다. 과거보다 더 큰 기쁨들이 나를 찾아올지도.

항상 환한 햇살도 좋지만, 짙은 구름 뒤에 슬쩍 내비치는 햇빛 역시 달콤한 법이다.